<84>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고려대의료원지부
<84>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고려대의료원지부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1.07.0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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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넘어설 대안은 무엇?
병원 간 경쟁에 노동자는 골병
산별은 사회적 합의 틀 … 정부 참여해야

▲ 지난해 10월 파업 중 고려대 재단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 고려대의료원지부 ⓒ 고려대의료원지부
지난해 10월 7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고려대의료원지부(지부장 조순영, 이하 고대의료원지부)는 20일에 걸친 파업을 단행했다. 당시 고대의료원지부 ‘시설보다 사람에 투자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파업 후 8개월여가 지난 지금, 과연 고대의료원에는 얼마나 변화가 있었을까?

삼성·아산병원, 병원산업 틀 바꿔

고대의료원지부 조순영 지부장은 지난해 파업을 ‘실패한 투쟁’이라고 평가했다. 요구조건에 걸맞은 성과물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섭요구안은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요구안에서는 크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임금 인상하고 소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요구안에서 이야기한 걸 쟁취하지 못한 것이죠. 그나마 투쟁과정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던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고대의료원지부의 요구는 하나의 병원에서 노사간 교섭으로 풀릴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들이 환자유치를 위해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어느 한 병원에서 사람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화되기도 어렵고, 나아가 그 병원의 지속적인 유지도 보장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각 대학병원들과 대형병원들에게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다. 바로 ‘Big 5 안에 들어가기’가 그것이다.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들이 의료산업에 뛰어든 이후, 의료산업의 지형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재벌기업 계열병원들이 신기술과 차별화된 서비스로 무장한 채 병원을 신설하자, 그동안 질 높은 의료서비스에 목말라 하던 환자들이 이들 병원으로 급속하게 이동했다.

▲ 지난해 파업 중 삭발하고 있는 조순영 지부장 ⓒ 고려대의료원지부
그동안 명성만 믿고 환자서비스에 소홀했던 대형병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당장 환자들이 급속하게 빠져나가 운영이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대형병원들은 경쟁적으로 환자서비스 강화와 시설 확장에 나섰다. 빠져나간 환자들을 다시 데려오려면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불친절에서 벗어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첨단시설에 대한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지속되고 있는 병상증축은 이처럼 대형병원들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 같은 경쟁의 결과 환자서비스가 개선되고 권위주의적이던 병원의 조직문화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병원들은 경쟁적으로 시설투자에 나선 나머지 의료기관에 대한 중복·과잉투자가 이뤄졌고, 투자에 따른 수익 보전을 위한 비급여항목 개발 등 갖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대 동대문병원이 문을 닫은 것처럼, 대형병원들도 이 같은 경쟁에서 밀리면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병원들로 하여금 더욱더 경쟁에 매달리도록 내몰고 있다. 결국 이 같은 병원들의 무한경쟁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가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게 조순영 지부장의 생각이다.

“산별노조는 사회적 합의 틀거리입니다. 사회적 합의로서의 산별교섭이 의미를 가지려면 정부도 교섭에 들어와야죠. 산별교섭에서 예컨대 일과 양육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정책적으로 합의하면, 현장교섭에서는 각 사업장별로 가능한 수준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야 산별교섭이 정착될 수 있죠.”

▲ 지난해 파업 중 직접 대자보를 만들고 있는 고려대의료원지부 조합원들 ⓒ 고려대의료원지부
조합원, 기업별 의식 넘어서다

이렇게 병원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병원 현장에서는 온갖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고대의료원은 병상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기존에 10일이던 입원기간을 7일로 줄였다. 제조업에 비유하자면 기존에 5시간 걸려서 만들던 자동차를 4시간 만에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러니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노동강도는 높아지지만 그만큼 인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줄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료원 역시 인력부족 문제를 심각하게 겪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병원이 의료기관 평가나 서비스 인증 등을 강조하면서 조합원들은 노동강도 강화에 더해 연장근무시간을 늘리라는 압박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는 논의는 실종됐다. 오로지 병원에서 이야기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장만 남아 조합원들을 옥죄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20일 파업은 이렇게 병원들의 무한경쟁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현장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조합원들의 노동강도를 어떻게 완화시킬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그런 고민을 슬로건으로 만든 게 ‘시설보다 사람에 투자하라’는 구호였다.

필수유지업무제도에 따라 분만은 60%, 수술·마취는 70%의 인력을 유지하면서 나머지 인원이 파업에 참가했다. 수술실의 경우 인력은 평소대비 70%로 줄었지만, 수술 건수는 평소대비 90%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남아 있는 인력은 더 큰 노동강도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파업을 통해 조합원들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 고려대의료원지부가 바자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을 3개 병원 환우와 저소득가정에 전달하고 있다. ⓒ 고려대의료원지부
“지난해 파업 전까지만 해도 조합원들은 기업별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런데 파업을 거치면서 우리가 왜 이런 조건에 놓여 있는지 조합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됐죠. 비록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몇 명의 정규직화로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인 셈입니다.”

이런 생각을 모아내기 위해 고대의료원지부는 지금 병원과 함께하는 공청회 준비에 한창이다. 고대의료원지부는 병원과 함께 오는 7월 5일에 고대의료원의 발전방향에 대한 공청회를 열 예정이다. 이 공청회를 통해 고대의료원지부는 고대의료원의 장기발전전망을 만들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노사간의 접점을 모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