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 위기가 아닌 곳 없다. 교육으로 돌파한다
SOS, 위기가 아닌 곳 없다. 교육으로 돌파한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1.07.2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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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비정규직의 엄청난 차별, 노동운동의 출발점돼야
노동운동가의 어려움 호소… 배부른 호사일수도
[플러그 人] 단병호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이사장

“우리 노동운동이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날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으려고 ‘소금꽃’ 김진숙이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200일이 되는 날이다. 대한문 앞에서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곡기를 끊은 지 열하루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사방에서 ‘희망’의 이름을 단 버스가 생기고, ‘희망’ 단식을 진행한다. 희망과 단식이라니! 이 역설이 자연스러운 2011년 대한민국은 한여름이다.

이처럼 극과 극이 어우러지는 까닭은 왜일까? 지금 대한민국은 분노해서 싸우고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노동운동의 위기상황 교육으로 돌파
위원장이 아닌 이사장이 된 단병호

노동운동의 ‘위기’ 또는 ‘위기적 상황’을 이 사람만큼 체감하는 이는 없을 거다. 단병호다. 그의 이름 뒤에 ‘위원장’이나 ‘국회의원’이라는 호칭을 달지 않는 불손함은 ‘단병호’ 그 자체가 노동자의 대명사이자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단병호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90년에 세워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1~4대 위원장을 맡은 단병호는 1995년 건설된 민주노총의 3~4대 위원장을 지냈다. ‘위원장’의 영예는 ‘별’로 남았다. 다섯 차례 감옥을 갔고, 여덟 해를 감옥에서 보냈다.

17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그는 ‘잠바’ 차림이었다. 당선증을 받기 위해 국회에 들어서려다가 경비에게 가로막히기도 한 단병호는 영락없는 노동자다.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떤 호칭으로 불리든 노동자의 ‘벽’을 넘을 수도 없고 넘지도 않는다. 국회의원 당선자 단병호가 국회 입구에서 제지되었듯 입법기관은 노동자에게 ‘벽’이다.

그 벽을 억센 노동자의 손으로 야금야금 때론 쿵쾅쿵쾅 부수려고 했던 단병호. 그의 좌절은 두툼한 벽이 아니었다. 바로 ‘동지’였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쪼개졌다. 단병호는 선택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18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노동자 단병호가 그토록 바라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의 첫 실험은 노동자의 희망이었던 민주노동당 안에서 무너진 거다.

2008년 ‘공식’,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라진 단병호가 다시 나타났다. 위원장도 국회의원도 아닌 ‘이사장’으로.

“우리 노동운동이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상당히 어려운 시기고.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나가려면 가장 중요한 게 사람들 역량들이 있어야 한다.”

어려운 시기를 뚫고 나가려는 힘, 그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단병호는 사람의 힘인 “역량을 재구축”하려고 교육기관을 세웠다. 지난 6월 17일 문을 연 노동자 교육기관 ‘평등사회노동교육원(교육원)’, 단병호는 이사장을 맡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왜 어렵고 무엇이 위기인가

노동자계급이 양극화 되다

왜 ‘어려운 시기’이고, 무엇이 ‘위기 상황’인지를 묻지 않고서는 이 시기 왜 교육기관인가를 알 수가 없다.

단병호는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만들어진 노동운동 체제가 1998년 아이엠에프 시절을 거치면서 “단절되거나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다. 아이엠에프 시절을 겪으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고용시장의 양극화가 나타났다. 이 양극화는 노동자 내부에서도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30%정도의 비정규직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문제는 그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성이 그리 크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 할지라도 고용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았어요. 고용형태와는 상관없이 노동계급 내의 차별은 없었는데….”

단병호는 현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가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조직되어 있는 노동자는 주로 (경제적으로) 중상위층에 있는 노동자인 반면 비정규직은 “연봉 천이삼백 받는” 현상을 꼬집는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의 동질성을 확보해 갈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단병호가 직시하는 노동운동의 ‘위기’다.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개별 기업의 담장을 넘으려고 했지만 “여전히 기업지부를 인정해야 되느냐 안 되느냐 이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금속노조를 비롯한 산별노조의 현주소를 보며 “기업별 노조가 도리어 고착해 되어 나가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어느 한 구석을 보더라도 우리가 위기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말을 던지는 단병호의 눈매는 매섭다. 입술을 앙 다문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운동을 끝났다”라고 보는 게 아니다. 섣부른 ‘희망’을 질타하는 거다. 뜬구름을 쫓는 노동운동 활동가에게 허공이 아닌 땅에 발을 딛으라는 일침이다. “현실에 대한 진단이 정확”해야 ‘위기’ 또는 ‘위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단병호의 ‘위기’는 패배가 아닌 도약의 계기를 향한다. 전노협, 민주노총,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거쳐 온 노련한 운동가 단병호는 ‘승부수’를 과감히 던진다.

탄압받는 시절에 한가하게 교육?
‘진짜 교육’은 내용과 방법이 다르다


그 ‘승부수’가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다. 그래서 설립한 것이 교육원이다. 껑충한 키, 배싹 마른 몸으로 노동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던 그 열정, 예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불타고 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단체협약 일방해지…, 숱한 당면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교육운동’이라니? 한가하게 여길 사람도 있을 법하다. 교육의 필요성을 “공유해 나가는 게” 첫 번째 어려움이었다. 교육원 설립을 위한 재정을 만드는 일도 힘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단병호의 교육은 무엇이냐다. 노동조합이나 노동단체들에서 이러저러한 교육을 하는데, 왜 새로운 교육기관을 만드느냐는 질문에 답이 있어야 했다.

“주로 단발식 교육이 많죠. 길어야 하루, 일박이일. (교육내용도) 정세교육, 현재 당면한 방침들.”

교육원에서는 3개월 총 12강좌를 진행하는 기초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한 강좌 당 3시간이다. 2시간은 강사가 이야기하고, 나머지 1시간은 질의응답을 받는 교육이 아니다. 수강생이 참여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80%를 차지한다. 수강생이 ‘졸’ 짬을 주지 않는다. 쉼 없이 보고, 듣고, 말하기를 해야 한다.

교육원의 강사는 강사가 아니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다. 수강생들이 올바로 학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멘토에 가깝다. 주제가 정세든 역사든 철학이든 상관없이 강사는 한 사람이다. ‘교육의 관점과 통일성’을 위해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만든 교재와 프로그램이 있기에 가능하다. 50명이 넘는 전문가, 학자, 현장 활동가들이 달라붙어 교재를 만들었다. 교육원 프로그램은 기초, 중급, 심화과정 3단계로 구분된다. 현장 활동을 했던 활동가라면 누구나 일정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강사가 될 수 있다. 이 강사들이 현장에서 소모임을 꾸려 교육할 수 있도록 현장 맞춤형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10년 3월 교육원 설립을 제안했고, 2011년 2월 시범 교육을 들어갔다. “다섯 개 지역에서 시연”을 했고, 수강생들의 “놀라운 호응”으로 6월 교육원을 창립할 수 있었다.

▲ 지난 6월 7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관에서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창립총회 및 기념식이 열렸다(왼쪽).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노동운동 활동가 기초과정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평등사회노동연구원

어떤 관점에서 배우고 어떻게 실천할 건가
문제는 역시나 ‘돈’ … 아름다운세상 만들기에 투자


아무리 프로그램이 좋아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 아니냐는 물음에 단병호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게 참 어려운 문제인거 같아요. 옛날에는 간부들 그러면 가방에 책 쪼가리가 들어가 있고 하다못해 신문이 들어가 있고 그랬는데, 요즘은 간부들, 그런 게 없죠.”

아쉬움이 묻어 있는 말을 건네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라고 진단한다. “인터넷이라는 것도 있고, 하다못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 다 하니까. 사람들이 굳이 교육을 안 받아도 내가 필요한 지식을 알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질 수 있는 ‘현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단병호는 “하나하나씩 만들어” 가려고 한다.

하지만 홀로 ‘득’한 지식을 홀로 ‘득’하고 있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 지식을 “어떤 관점에서” 얻고, “어떻게 실천”하여, 사회 전체가 이로울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하루 강의를 들어보면 ‘아 재밌다. 다르다’ 반응이 나와요. 이 반응을 보면 어렵더라도 (이 사람들이) 현장에서 다시 교육을 조직할 수 있는 자산은 될 수 있겠다 여겨집니다.”

누군가 교육원을 ‘알까기 교육’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알까기가 슬슬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초과정 교육 수강생들 가운데 시연강연을 들은 이가 추천하여 참여한 이가 많다. 개원 한 달이 채 안됐는데 벌써 교육원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육을 진행하는 지역(서울, 부산)이 생기고, 강사훈련을 하는 곳도 있다.

문제는 역시 재정이다. 수입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석 달 열두 강좌를 수강하는데 교육비는 고작 십만 원이다. 비정규직은 삼만 원에 불과하다. 교재비와 강의 장소 대여 비용에 불과하다. 교육원이 직접 강의를 하는데 집중하기보다는 각 지역 현장에서 이 교육 프로그램을 가져가 자발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정말 남는 것 없는 장사를 시작한 셈이다.

“운영이 되려면 이 사업에 대해서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참여해 주어야 한다.”

교육원 제안자(208명)들이 호주머니를 턴 2억여 원이 종자돈이 되어 교재를 만들고 교육원을 문을 열 수 있었다.

이곳에 노동운동의 ‘위기 상황’을 이겨내려는 정성이 간절하다. 교육원은 CMS 방식으로 1만 원 후원자를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크레인에 노동자가 200일씩 매달리지 않아도 일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방법이 교육원 후원에 있다.

다시 이야기는 ‘희망’으로 돌아왔다. 단병호는 ‘희망버스’를 “상당히 좋은 현상”이라 말한다. 그리고 주문한다. “노동운동이 (사회를) 주도하기 위한 상황적 변화에 대처할 뭔가가 있어야 되잖아요”라며 ‘힘 잃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안타까워한다. “노동자 의식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조건이 바뀌면 이거를 반영해서 사회적인 힘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버스와 같은) 역할을” 민주노총에 바란다.

“민주노총에서 그런(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안을 내야 되는 거죠. 그런 사람을 모아가지고 ‘당신네들이 이런 역할을 해주시오,’ 주도해야죠. 민주노총이 안 하더라도 민주노총이 운동을 주도해 나가는 그런 변화를, 능동성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운동 방법에서도 그렇고 사회변화에서도 그렇고 뒤를 따라가는 데 급급해하는, 이런 거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죠.”

단병호는 꿈꾼다. 노동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주도하기를. 앞장서기를. 맨 앞에서 희생하기를.

▲ 지난 해 11월, 모란공원에서 열린 전태일 40주기 추도식을 마친 뒤, 홀로 열사묘역을 둘러보는 단병호 이사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전노협 반지를 만지며 말하다
2011 대한민국은 후텁지근하다


요즘 노동운동 탄압이 예전보다 강하냐는 말에 단병호는 주춤한다. “체감적으로 더 강한 거는 아닙니다.” 기업들의 탄압이 “수단과 방법은 상당히 교묘해”졌지만 예전보다 노동운동 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오후가 되면 ‘돈 만 원’을 구하는 게 ‘운동’이었던 전노협 시절 이야기를 한다. 돈이 없어, 밥을 먹을 수 없어, 사람을 만나러 갈 차비가 없어, 차 한 잔 살 여유가 없어, 힘들었던 과거에 비하면 요즘 노동운동가들의 어려움은 ‘호사’일지 모른다.

7월 20일, 한여름 더위가 후끈후끈 세상을 달구던 한낮에 영등포에 자리한 교육원에서 단병호를 만나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전노협 반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이야기 도중 반지를 종종 만지는 단병호. 그는 반지를 만지며 지혜를 얻는 것 같다. 전노협의 정신?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그 정신이 민주노총에 계승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파닥파닥 살아있던 그 시절은 잊어서도, 잊혀서도 안 되는 귀중한 유산임은 분명하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 통합 문제에 대해서는 ‘오프 더 레코드’를 하고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음…, 일단” 긴 침묵 뒤에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약속대로 옮기지 않는다. 이곳에 옮기지 않아도 세상에 전달되리라 믿으면서.

다음을 약속하며 돌아서는 길, 여전히 대한민국은 후텁지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