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모형 전도사
못 말리는 모형 전도사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1.10.0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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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철도, 장비 등 축소 제작
“일이자 놀이…대중화를 꿈꾼다”
[젊은리더] 모델러

하마터면 ‘결혼 못 하는 남자’가 될 뻔했다. 일로도 모자라 취미마저 모형 만들기인 남자, 남들은 학점 올리고 토익 점수 쌓으며 취업에 목맬 때 만날 모형 스케치 하던 남자, 군대에 있을 때조차 병장을 달고부터는 하루에 10시간씩 교량 모형을 만들던 남자 조병훈(37, 지에스모형 대표)은 아내를 만나 말했다.

“나는 휴가 때도 너 안 만나고 집에서 모형 만들 거야. 그래도 나랑 사귈래?”

호기를 넘어 객기 수준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모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뭔가 어둡고,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있고,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일반인들의 편견도 무시할 수 없다. 양해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협박(?)을 한 셈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면 밤에 아내 몰래 만들거나, 가격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아내가 아니었으면 아마 결혼 못 했을 겁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랬다. 그만큼 모형이 좋았다.

▲ 지에스모형 조병훈 대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취미가 알바로, 알바가 천직으로

어린 조병훈은 소풍 가는 날이면 설레었다. 소풍 때문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두둑한 용돈을 받아 프라모델(조립식 장난감)을 살 수 있어서였다. 문방구로 달려가는 게 그만의 소풍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세뱃돈을 받은 그는 큼지막한 비행기 프라모델을 산다. 그것을 계기로 인생이 바뀐다. 전까지는 발만 담가 보는 수준이었다면 그날 이후로 풍덩 빠져버린다.

대학생이 돼서도 중독은 멈추지 않는다. 선생님이 가라고 해서 선택한 건축공학과는 그에게 놀이터와 같았다. 건축모형을 그리고,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자연스레 아르바이트도 됐다. 선배들 졸업작품을 만들어주다가 손재주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현장의 업체에서도 일거리가 들어왔다. 지금 돌아보면 전문가들이 받는 돈에 비해 턱없이 적었지만 학생 신분에서는 많은 액수였다. ‘꽁돈’을 벌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 밤새워서 번 돈으로 일렉트릭 기타나 갖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사기도 했다.

모형이 평생 ‘밥벌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모델러’란 직업(박스기사 참조)이 있는지도 몰랐다. 시기가 절묘했다. 군대 간 지 1년 만에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가 1, 2학년이던 시절, 건설 경기는 하늘을 찔렀다. 워낙 사람이 많이 필요했던 때라 졸업만 하면 취직은 문제없었다. 다시 돌아온 학교는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치열한 경쟁, 삭막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그는 모형 세계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말씀을 드리지도 못했다. 혼자서 몰래 시작한 일이다.

처음에는 미니어처를 많이 쓰는 영화사를 두드렸다. 모형회사가 따로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만의 작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곳이면 족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건축모형회사를 발견한 건 그때쯤이다. 홈페이지에 수시로 글을 남긴 끝에 졸업하면 찾아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부푼 꿈을 안고 만난 사장은 지하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둘이 먹고 자면서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후, 조병훈도 그때 그 사장처럼 지하실에서 혼자 모형 사업을 펼치기로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불황은 모형을 잠식했다

원래는 큰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모형만이 아니라 조직 관리와 같은 다양한 영역의 일을 배우고 싶었다. 3년 반 동안 정든 회사를 떠난 이유다. 하지만 새 출발이 만만치는 않았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살림살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급한 대로 알음알음 들어오는 모형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일거리가 꾸준히 들어왔다. ‘작업실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지하실을 하나 구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나고, 작업실은 자연스럽게 ‘지에스모형’이란 이름의 어엿한 회사가 됐다. 2006년의 일이다.

“저는 즐기면서 살아요. 돈을 안 좇아요. 모형 제작을 좋아하니까 하고, 그걸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요.”

그에겐 일과 놀이가 하나다. 물론 한동안 제작 의뢰가 안 들어올 때도 있다. 초조해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럴 때 직원들과 새로운 모형을 만들며 제대로 ‘논다.’ 놀이는 자연스럽게 연구·개발이 된다. 만든 모형을 블로그에 올리고, 여기저기 전시하면 기존에 거래하지 않았던 곳에서 연락이 오기도 한다. ‘철없는’ 대표만큼이나 모형을 좋아하는 직원들만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회사가 자리를 잡을 즈음 악재가 터진다.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는 모형 시장도 뒤흔들었다. 건설 경기가 침체되면서 모형 시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축모형 일도 절반으로 줄었다. 문을 닫는 회사들이 하나둘 생겼다. 조병훈도 노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에게 20대의 IMF 외환위기가 그랬듯 세계 금융위기도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예전부터 취미 삼아서 하던 철도모형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다. 경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 건축모형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철도모형은 시장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냥’ 좋아하니까 만들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저 좋아서 시작한 철도모형

아버지는 철도원이었다. 조병훈은 철도가 좋았다. 어릴 적부터 기차가 신기했고, 역에서 뛰놀았고, 철길을 따라 걸었다. 프라모델에 흥미가 생기고, 모형 일을 하며 조금씩 멀어졌을 뿐이다. 마음속에서 다시 기차가 달린 건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모형회사를 한창 다닐 때다. 철도모형 일이 들어왔다. 무궁화호 모형을 색칠하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을 하고, 철도모형이 취미인 사람들을 만났다. 실제 모델을 쏙 닮은 조그만 기차들이 구동장치가 깔린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조병훈의 귓가에 다시 기적이 울렸다.

“매력적이잖아요. 실제로는 직접 가서 보는 것조차 힘들지만 모형은 만드는 재미도 있고, 감상할 수 있고, 가지고 놀 수도 있고.”

워낙 모형과 철도를 좋아했던 그다. 철도모형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외국에서 기차 모델과 레일들을 공수했다. 수집한 모형들을 그만의 손길로 매만지고, 역이나 터널 같은 주변의 다양한 상황들을 만들었다. 2년 전부터는 카메라를 메고 나서는 일도 잦아졌다. 하나둘 사라져 가는 기차와 역, 선로들을 사진으로 간직해두기 위해서다. 그의 블로그는 갖가지 철도 사진들로 가득한 ‘보물창고’가 됐다.

‘철도 사랑’은 의도치 않은 투자로 이어졌다. 사실 철도모형은 미개척 분야였다. 그냥 좋아서 한 일들이 알려지면서 제작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건축모형 시장이 어려웠던 참이었다. 새로운 빛이 보였다. 아직까지는 주로 전시나 설계회사들의 실험 모형으로 많이 쓰이지만 그는 여기저기 철도모형이 놓일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다.

“소아과 병원처럼 애들 많이 오는 데 철도모형 하나 딱 갖다놔 보세요. 어떨 거 같아요? ‘토마스’ 기차 돌아다니면 애들은 안 아파도 그거 보러 올 걸요? 얼마 전에도 애들 전용 치과에 설치하고 왔어요.”

철도모형 사업은 어느새 지에스모형 매출에서 건축모형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내 사전에 슬럼프는 없다

조병훈은 의아했다. 모형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처럼 즐기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형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현실에 부딪치며 지치는 이들을 많이 봤다. 물론 일과 취미를 동일 선상에서 조절하고, 유지해나가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에 오늘도 그는 즐길 수 있다. 친구들은 그를 보며 “넌 정말 슬럼프가 없는 거 같다”고 말한다. 정말 슬럼프가 올 틈이 없다. 매 순간 할 일이 생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혼자 목표를 세워서 뭔가를 만들고, 해내면 또 다른 걸 시작한다. 마음속에서 계속 우러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조병훈이 좋아하는 말이 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은 아무리 거친 길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길이 닥쳐도 우왕좌왕한다.’ 영국의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이 한 말이다. 마음에 쏙 와 닿았다.

그가 즐겁게 살아가고, 돈에 연연하지 않고, 일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목표가 있기에 가능했다. 바로 모형의 대중화다. 열 명 중에 세 명 정도가 즐기는 대중적인 취미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저변이 확대되고, 수요가 생기고, 산업이 발전하고, 모형이 존중받는 취미이자 직업으로 받아들여질 거란 기대감이다.

갈 길이 멀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저처럼 모형 좋아하는 친구들을 꾸준히 만나고 있고, 그들과 뭔가를 해보기 위해 각자의 힘을 키워나가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모형은 숙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그걸 푸는 첫 단추는 대학원 진학으로 끼울 생각이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어서다. 지금도 건축과 특강을 자주 나간다. 2007년에는 산업디자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라모델 조립’ 과목을 한 학기 동안 가르치기도 했다. 교수라는 목표 또한 모형의 대중화를 위해 세웠다. 전문가들을 배출하고, 기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 성과를 통해 모형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이다. 어찌 보면 그의 삶은 철도와 닮았다. 지금은 드넓은 벌판에 레일을 까는 중이다. 모형을 즐기는 이들이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달리길 바라면서.

“전망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을 다해서 한 길만을 쭉 가는 게 전망이라고 봐요. 그런 사람은 없던 시장도 만들어내고, 결국 누군가는 그 사람 뒤를 따라가게 돼 있어요. 상투적인 얘긴데, 정말 그래요. 제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조병훈은 가끔 먼 미래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백발의 그는 한적한 시골의 조그만 집에 있다. 마당에는 철도를 비롯한 각종 차량의 부품으로 만든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한쪽의 넓은 창고에는 산과 들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 길게 펼쳐져 있다. 손자·손녀들이 재잘거리고, 친구들이 하나둘 들어선다. 오랫동안 모아온 모형 기차들이 달릴 채비를 한다.

환하게 웃는 그의 뒤로 그날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 디자인비아트 모형사업부 이석재 과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모델러는 누구?

아파트 모델하우스나 박물관에 가보면 건물이나 다양한 상황들이 축소된 전시물이 있다. 이런 모형을 만드는 이들이 ‘모델러’다. 건축, 자동차, 산업 장비 등 여러 방면으로 활용되지만 아직까지는 건축모형 시장이 가장 크다.

이석재 씨(디자인비아트 모형사업부 과장, 사진)는 현대건축 모형을 주로 만드는 건축모델러 9년차다. 아파트나 오피스텔, 도시계획 모형 등을 작게는 1/150에서 크게는 1/50의 크기로 만든다. 모형은 단순히 전시 용도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완성품처럼 정밀하게 만들어져서 건설, 제작 단계에서의 오차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도면에 맞게 설계를 해서 각종 재료들을 가공하고 조립, 도색을 한다. 재료는 보통 아크릴이나 포멕스, 목재 등이 주로 쓰인다. 예전에는 재단도 일일이 손으로 했지만 수치를 입력하면 레이저로 재단해주는 기계가 나와 한층 편리해졌다. 하지만 세밀한 모양을 가공하는 작업에는 모델러의 손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 과장은 “모델하우스 하나를 만드는 데 5~6명이 달라붙어도 꼬박 2~3주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모델러는 무엇보다 꼼꼼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1㎜만 어긋나도 뜯어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조립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직 모형 제작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과나 교육과정은 없다. 디자인을 전공한 이 과장의 경우 모형 제작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입사해서 1년 가까이 보조 업무를 하면서 배웠다. 그는 “설계도면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건축 전공을 한 사람은 유리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