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일, 길마저 뒤바뀐 시간
1500일, 길마저 뒤바뀐 시간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2.02.0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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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이 쓴다 ․ 11] 재능교육에서 쌍용자동차까지, 뚜벅이 열 하루째 날

뚜벅이들에게 희망의 소식이 전해졌다. 희망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갇힌 몸이 되었던 송경동과 정진우가 보석으로 석방된다는 소식에 희망 뚜벅이 11일차는 한껏 들뜬 걸음으로 거리를 누볐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 뚜벅이’ 열 하루째 날은 수원역에서 출발했다. 차가웠던 겨울바람은 뚜벅이들의 걸음이 시작되자 잦아들었다. 수원 화성 박물관을 지날 쯤 상기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둘러보는 뚜벅이가 있다.

▲ “여기 이런 도로도 있었네! 내가 십년 동안 일한 곳인데….” 재능교육에서 십 년 동안 일하던 여민희가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1,500일 동안 거리에서 농성하는 사이, 그의 일터였던 곳에는 전에 없던 길이 생겼다. 1,500일은 ‘길마저 뒤바뀐 시간’이 됐다. ⓒ 오도엽 객원기자 dyoh@laborplus.co.kr
“여기 이런 도로도 있었네! 내가 십년 동안 일한 곳인데….”

여민희다. 여민희는 1998년 재능교육에 입사해 이곳에서 십 년 동안 학습지 선생으로 일했다. 2007년 12월 21일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농성을 시작한 지 1,500일이 훌쩍 넘었다. 1,500일. 일 년 삼백예순날을 쉼 없이, 십 년 동안 골목골목을 두 발로 누비며 다니던 일터의 길조차 바뀐 시간이 됐다.

“여기가 내가 수업을 하던 곳이거든요” 하며 말끝을 흐리는 여민희의 목소리가 떨린다. 길이 바뀐 시간, 그 시간은 여민희에게는 멈춤이었다.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텅 빈 공간 안에 여민희는 살고 있다.

4.4㎞를 걸어 경기지방경찰청 앞에 도착했다. 11시 30분에 있을 삼성전자 앞 집회 때문에 잠깐 항의만 하고 돌아설 예정이었다. 집회신고를 한 터라 뚜벅이들은 자연스럽게 경찰청 정문 앞으로 갔다.

▲ 엄연히 신고까지 된 집회인데 경찰은 건너편에서 집회를 하라고 밀어댄다. 경기지방경찰청의 대처로 행진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뚜벅이들의 발바닥이 때 아닌 호강을 했다. ⓒ 오도엽 객원기자 dyoh@laborplus.co.kr
하지만 이게 뭔가? 갑자기 경찰청 건너에서 집회를 하라며 밀친다. 거리에 감금돼 몇 시간씩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몸자보를 벗지 않고 버티던 뚜벅이들이다. 하물며 엄연히 신고까지 된 집회인데 장소를 벗어나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경찰력이 배치되고 몸싸움이 벌어지고 방패 앞에 주저앉고. 뚜벅이들은 유성기업과 쌍용자동차에서 용역경비들의 폭력은 수수방관하고 노동자의 행위에만 엄격 대응한 경찰의 편파성을 규탄하는 발언을 이어가며 경찰청 앞 도로에 주저앉아 집회를 이어갔다.

경기지방경찰청의 ‘대처’ 때문에 행진 일정이 늦어졌다. 11시 30분까지 삼성전자에 도착하는 게 무리였다. 덕분에 뚜벅이들의 발바닥이 호강을 했다. 어렵사리 준비된 삼성 앞에서의 집회이기에 버스로 이동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삼성전자가 있는 수원시 영통구청 사거리 앞에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피해자들과 함께 하는 ‘반올림’과 삼성일반노조에서 이미 집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뚜벅이들이 건네는 유인물에 삼성전자 직원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사진을 찍힐지 몰라서….” ⓒ 오도엽 객원기자 dyoh@laborplus.co.kr
점심시간에 맞춰 삼성전자 직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좀체 선전물을 받지를 않는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묵묵히 바닥만 바라보며 잰걸음으로 지나친다. 선전물을 왜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진을 찍힐지 몰라서….”

조용하게 말을 하며 지나친다.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은 언제 어디서 감시할지 모르는 뛰어난 정보력과 감시력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반올림 활동가는 “이미 사회문제화 되어 은폐할 것 다 은폐했음에도 이번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1급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것은 그전에 얼마나 많은 발암물질 속에서 노동자가 생명을 바쳐가며 일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후에는 오늘 숙소이자 저녁 문화제 장소인 한신대학교까지 10㎞를 걸었다. 재능교육 등 장기농성 노동자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이동수 화백은 뚜벅이들의 얼굴을 종이에 그려내느라 정신이 없다. 뚜벅이들이 행진을 멈추고 쉴 때는 자신이 직접 편곡 개사한 노래를 불러 힘든 여정에 즐거움을 전해주기도 했다.

내일(10일)은 ‘붕붕 데이’다. 차를 타고 외국투자기업에 의한 노동조합 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 장안공단으로 가 한국3M, 포레시아, 파카한일유압의 노동자들을 응원한다. 이후에는 유성기업 아산공장으로 이동해 ‘밤에는 잠 좀 자자’는 노동자들과 연대할 예정이다.

지금 한신대 한쪽에서는 삼겹살이 구워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학생들과 함께하는 저녁문화제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