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합의했지만 달라진 건 없다
복직 합의했지만 달라진 건 없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2.04.0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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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권리보장 말도 꺼내기 힘들어
언제쯤이면 눈치 보지 않고 일할 수 있나?
[뉴스 後] 복직 결정된 비정규직, 그 후

지난 2010년 11월 1일,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며 5년 넘게 싸우던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정규직 고용 합의서’를 손에 쥐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이번에는 5개월이 넘게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던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이 해고된 지 2년여 만에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해를 넘겨 2011년 2월 2일에는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옛 지엠대우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복직에 합의했다.

이들 세 사업장 비정규직은 오랜 기간 복직투쟁을 진행하면서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싸움 끝에 복직이라는 열매를 손에 넣었다. 합의한 지 1년을 훌쩍 넘긴 지금,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참여와혁신 포토DB
복직 기다리며 투쟁현장 지키다

가장 먼저 복직을 이끌어낸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있다. 아직 복직하기로 합의한 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의 당시 기륭전자 노사는 당시 끝까지 남아있던 조합원 10명을 ‘1년 6개월 이내에’ 복식시키기로 했다. 아직 1년 6개월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합의를 어긴 것은 아닌 셈이다. 물론 그 이전에 복직이 된다면 좋겠지만, 유흥희 분회장은 “회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싸웠는데 하루라도 덜 보고 싶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더라도’ 복직시키기로 약속한 시한은 이제 겨우 1달도 안 남은 상태다. 오는 4월 30일이면 1년 6개월을 채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5월 1일이 되면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기륭전자의 정규직이 된다.

2010년 11월 1일 합의 이후,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국을 돌며 투쟁의 기간에 자신들과 함께하고 지지해준 연대단체들에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끝까지 싸운 조합원들이 없었다면 기륭전자 투쟁이 승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조합원들의 투쟁에 함께한 수많은 연대단체가 없었다면 기륭전자 투쟁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기륭전자 투쟁이 마무리됐다고는 하지만, 투쟁에 함께하고 지지해준 수많은 연대단체들에 보답하는 길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흥희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인사를 마치고도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투쟁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 없었다. 5년 넘게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싸웠던 조합원들이기에, 투쟁이라면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을 테지만,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차마 투쟁현장을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투쟁현장에 달려가는 데에 조합원들 중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함께 힘을 보태는 이들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오랜 투쟁으로 몸도 마음도 힘들고 지친 상태였지만, 아직도 수많은 투쟁현장에서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한진중공업에서 쌍용자동차를 거쳐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까지,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다.

투쟁현장만 챙긴 것은 아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서라도 ‘몸을 만들어야’ 했다.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요가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마련한 치유프로그램 ‘품’에 참가하면서 오랜 싸움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누군가는 기륭전자가 이미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사업장에서 철수한 마당에 당장 돌아갈 공장이 마땅치 않은 것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한다. 물론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유흥희는 그렇다고 복직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구로에 있던 공장이 철거되고 중국으로 이전했다고 하지만 연구개발 분야는 여전히 남아있어요. 사업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이쪽 사업이 거대한설비나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에요. 맘만 먹으면 한 달 만에라도 생산라인을 깔 수 있다는 겁니다. 신대방동에 7층짜리 사옥도 있잖아요. 그 공간이면 충분히 생산라인 돌릴 수 있어요. 최근에는 여수엑스포에 납품할 전자팔찌를 수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조합원들이 적응하는 데 시간은 걸리겠지만, 사측이 복직 약속을 어길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복직했지만 일에만 묶여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아직 복직을 하지 못했지만,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중 일부는 이미 복직해서 일을 하고 있다. 이백윤 지회장도 복직자 중의 한 명이다. 2010년 11월 3일, 9명의 조합원들은 2011년 6월 말, 2011년 12월 말, 2012년 6월 말까지 3차례에 걸쳐 3명씩 복직하기로 사내협력업체와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6명이 현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있고, 나머지 3명은 오는 6월 말에 복직하게 된다.

복직해서 일하고 있음에도 이백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 돌아간 공장이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2008년 투쟁을 시작할 때보다 한참이나 후퇴했다. 이백윤이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막상 복직하고 보니, 각 업체들은 소속 노동자들과 개별 면담을 모두 마친 상태였어요. 복직자들과 어울리다가 괜한 불이익 받지 말라는 거죠. 업체들은 복직자들과 휴게시간에 이야기를 하거나 같이 밥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개별 면담을 해요. 심지어 퇴근 후에 술 한 잔 같이 마셨다고 다음날 바로 면담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렇게 복직자 6명은 철저히 관계가 끊어진 상태다. 복직자와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만 끊어진 건 아니다. 복직자들 간에도 만날 시간이 없다. 6명이 각기 다른 업체로 뿔뿔이 분산돼 복직됐기 때문이다. 복직자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은 주말밖에 없는 실정이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가 공장 밖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동희오토의 사정도 달라졌다. 조합원들이 해고되기 전, 850여 명의 노동자들은 12개의 사내협력업체에 소속돼 일했다. 현재는 생산량이 늘어남에 따라 노동자 수도 1,250여 명으로 늘었고 업체 수도 17개가 됐다. 생산하는 차종도 두 종류로 늘었고, UPH(단위시간당 생산대수)도 2008년 해고 당시 30UPH에서 50UPH로 높아졌다. 지난해에는 서산공장에 출하장까지 생겼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조선족 등 이주노동자가 늘었다는 점이다. 이백윤은 “전체적으로 50% 이상이 이주노동자로 채워졌다”며 “이주노동자는 신분상의 불안함 때문에 조직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린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지난 노사합의 당시 ‘금속노조의 활동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포함됐지만, 실제 노조활동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어차피 복직자들은 3년 반이 지나도록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어서 설득도 안 통할 테니 그냥 인정해주는 대신, 주변의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노무관리 방식을 바꾼 것 아니냐”고 이백윤은 분석한다.

“먼저 투쟁을 시작했고 복직하게 됐으니 아직 투쟁하고 있는 다른 사업장에 모범을 보여야 할 텐데, 지금은 노조활동은커녕 일에 묶여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서, 죄송하기도 하고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겁니다. 매주 한 차례 조합원들이 모여 그 주에 있었던 일 공유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돌파구를 만들어내겠습니다.”

ⓒ <금속노동자 ilabor.org> 신동준
복직약속, 누가 책임지나?

지난 2010년 12월, 지엠대우비정규직지회(현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조합원 두 명이 한국지엠 부평공장 정문 아치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기륭전자분회와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가 오랜 투쟁 끝에 복직에 합의한 직후였다. 지엠대우비정규직지회도 이들 못지않게 오랫동안 복직투쟁을 해왔다. 이젠 정말 투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다 싶어 선택한 길이었다.

때마침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와 금속노조도 팔을 걷어붙였다. 두 조합원의 고공농성이 이어지는 동안, 땅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촛불집회가 열렸고, 노조들과 시민단체들의 지지방문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나 고공농성을 하던 두 조합원이 다시 땅을 밟기까지는 64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신현창 당시 지회장은 45일간 단식을 했다.

투쟁 끝에 이들 비정규직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사내협력업체로부터 ‘계약해지’된 9명은 1년의 유예기간 후 1년 이내에 순차적인 복직을, 징계해고자 6명은 2년의 유예기간 후 6개월 이내에 순차적인 복직을 진행한다는 것이 당시 합의사항이었다. 이에 따르면 계약해지자 9명은 올해 2월 1일부터 2013년 1월 31일까지 순차적으로 복직돼야 한다. 징계해고자 6명도 2013년 2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6개월 이내에 순차적으로 복직돼야 한다.

그러나 당시 합의 이후 1년의 유예기간이 훌쩍 지나갔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복직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당시 합의에 따라 지난 2월 2일부터는 계약해지자 9명에 대한 복직논의가 진행됐어야 하지만, 이영수 지회장은 “회사 측이 아직까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한국지엠이 원청의 사용자성을 부정하면서 복직 이행을 위한 협의를 기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합의 당시 ‘합의시점 이전이라도 생계곤란자들을 복직시킨다’는 구두약속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구두약속에 그쳤다. 오랜 투쟁을 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등 조합원들 중 ‘생계곤란자’가 아닌 이들이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복직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의 생계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조합원들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빚을 내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게 안정적인 생계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하루빨리 복직하는 것이지만, 사측은 전혀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아요. 합의 이행의 실질적인 책임이 한국지엠에 있다는 것은 합의과정을 지켜본 지역사회가 다 아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한국지엠은 지난해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면서도 해고자들은 복직시키지 않았습니다.”

ⓒ <금속노동자 ilabor.org> 신동준
당시 합의서에 서명한 사측 당사자는 한국지엠 하청업체협의회다. 따라서 합의서만 놓고 보면 합의사항 이행의 책임은 한국지엠이 아닌 사내협력업체에 있다. 더구나 복직시한이 2013년 1월 31일이기 때문에 아직 합의를 파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직접 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합의 당시 교섭에는 한국지엠이 직접 나섰다.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가 원청의 사용자성을 주장하며 합의 이행의 실질적 책임이 한국지엠에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당시 마이크 아카몬 한국지엠 전 사장은 사태 해결을 약속하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지엠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2배 이상 늘었다. 2010년 9월 고용노동부가 ‘300인 이상 사업장 사내하도급 현황’을 발표했을 때, 한국지엠 부평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493명이었다. 이에 비해 지난해 4월 한국지엠지부가 발간한 ‘비정규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평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는 1,017명이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사내하청 노동자가 2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이영수가 “사측이 해고자를 복직시킬 기회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복직 이행의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근거다.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는 현재 한국지엠과의 직접적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국지엠지부가 한국지엠과 이후 복직논의 시점을 협의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 번 공장 밖으로 밀려난 비정규직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이 얼마나 긴 싸움이 이어질지, 싸운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어렵사리 복직에 합의한다고 해도 합의가 지켜진다는 보장도 없다. 복직했다고 해도 이른바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기도 어렵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들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게 거창한 건 아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으며,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 없이 일하고 싶다는 게 전부다. 그런 요구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을 바꾸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