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미소 뒤에 감춰진 비정규직 승무원의 꿈과 눈물
환한 미소 뒤에 감춰진 비정규직 승무원의 꿈과 눈물
  • 참여와혁신
  • 승인 2006.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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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평 남짓 고속열차 승무원 대기실 들여다 본 날

김경아 기자 kakim@laborplus.co.kr

 KTX 승무원의 하루
‘꿈의 열차’로 불리며 2004년 4월 개통한 KTX.
항공사 못지않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한국철도공사의 ‘호언장담’ 속에는 KTX 승무원이 있었다. 1기14대 1, 2기 163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승무원이 된 이들은 지상의 스튜어디스로, 고속열차 서비스 전도사로 나서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개통 일 년. 고속열차에 자신들의 꿈을 함께 싣고 달리던 환한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어가고 있을까?


‘KTX 보다 빠른’ 승무원의 발걸음
“여기가 아닌가” “잘못 왔나보네” “시간도 없는데 어째” 9시 출발 부산행 열차의 출발 시각이 가까워 오자 서울역 플랫폼은 열차번호와 플랫폼 번호를 혼돈한 승객들로 어수선하다. 이때 말끔한 제복 차림의 KTX 승무원 유수란(25)씨가 바삐 걸음을 옮기며 승객들에게 다가가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행신을 출발해 서울, 대전, 동대구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는 열차가 서울역을 벗어나기 무섭게 유씨는  11호차를 시작으로 객실을 돌기 시작했다. 평일 아침인데도 객실은 거의 다 차 있는 상태. 6호차까지 숨 가쁘게 객실을 둘러본 그는 특실서비스 준비를 위해 5호차와 6호차 사이의 객차로 종종 걸음을 친다.

 

경부선 고속열차에는 현재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는데, 기본적인 승객 안전 관리, 화장실 등의 시설 점검, 검표 등은 함께 하지만 특실서비스, 안내 방송, 자유석 검표는 3명이 각각 따로 맡고 있다. 특실승객에게는 첫 정차역 도착 전까지 음료나 과자 등 서비스를 모두 제공해야 하는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승무원 한 사람이 120명이나 되는 승객들에게 서비스 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래서 보통은 일반객실을 담당하는 승무원이 특실서비스를 돕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특실서비스가 마무리되고 다시 객실을 살피고 돌아오니 어느새 대전 도착 2분 전. 가쁜 숨을 고르며 안내방송 마이크를 잡는다.
“잠시 후 열차는 대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도착방송을 마칠세라 승하차 준비가 기다리고 있다. 승무원에게 있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승하차할 때다. 승강장 계단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으면 승객들이 철로 아래로 떨어져 사고가 생길 수 있기 때문.
대전역을 출발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린 유 씨가 그제야 물 한 모금을 마신다.


3명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에 승객들의 불만이라도 쏟아질라치면 승무원들의 하루는 고속열차만큼 빨리 간다. 개통했을 당시 역방향 좌석, 좁은 좌석 등 시설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모두를 승무원이 받아냈다. 일일이 양해를 구하고, 설명을 하는데도 승무원이 지나갈 때마다 불만을 터트려 난처한 경우도 많았다고.

개통 2년이 다 돼가는 지금은 그런 불만은 많이 사그라졌지만 승무원이 당장 해결해줄 수 없는 불만이 터져나올 때면 가장 곤란하다고 한다.

 

꽃보다 엄마.
내 아이 돌보듯 정성으로…
흔히 승무원을 ‘KTX의 꽃’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들은 ‘엄마’ 같은 존재다. 혹시 승객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불편한 곳은 없을까 살피고 또 살피는 것이 이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20여 명 되는 손님들에게 과자나 음료를 드리고 나서 나중에 빈 컵이나 다 드신 과자봉지를 쭉 걷어서 나오면 왠지 뿌듯하다”며 웃는 유씨의 미소에서 ‘강한 부드러움’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크고 작은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큰 소리로 떠드는 승객에게 여러 번 양해를 구하며 작게 얘기해 주십사 부탁해도 한결같이(?) 소란이 잦아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다른 승객들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내내 불편하기도 하단다. 이 뿐이 아니다. 개찰구가 자동화되고, 역무원이 줄어들면서 마음만 먹으면 객실 안까지 표 없이도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열차 내 검표 업무가 강화됐는데, 검표하는 도중 발생하는 불상사는 더욱 승무원을 괴롭힌다. 노숙자나 무임 승차자가 열차를 타고 나서 승무원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종착역에 내려서 올려다보면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꽉 채운 승객들이 올라가고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왠지 가슴이 꽉 차요” 라며 웃는 유씨에게 승무원으로서의 꿈과 자부심은 여전히 진행형인 듯 보였다.

 

어색한 붉은 띠에 새겨진
소박한 꿈
유수란 승무원과의 ‘동승 취재’가 끝난 날 저녁, 으리으리한 서울역 대합실 한복판에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투쟁가’가 쩌렁쩌렁 울렸다. 70여 명의 승무원들과 철도노조 관계자들이 참석한 집회에서 이들은 ‘KTX 승무원 한국철도공사 직접 고용’, ‘KTX 승무원 위탁 철회’ 등을 요구했다. 이제 막 근무를 마치고 바로 온 것 같은 승무원들이 남색의 제복을 입고, 붉은 머리띠를 두른 모습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집회를 지켜보던 한 아주머니는 “젊은 아가씨들이 저렇게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어서 어째, 스티로폼이라도 줘야 되겠네” 라며 혀를 찼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저 사람들 해고된 사람들이여?” 라며 잠깐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운 대합실 바닥과 붉은 머리띠, 단정한 그녀들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관심을 갖는 듯 했지만 정작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아 보였다.


지난 1월 12일, 승무원들을 위탁관리하고 있는 철도유통(구 홍익회)은 승무원 관리업무가 고유업무도 아닐 뿐더러 승무원들의 단체행동이 기업 이미지에 손실을 준다는 이유로 승무원 위탁 관리사업을 포기하고 철도공사에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철도유통이 승무운영에 미숙했을 뿐 아니라,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철도공사가 먼저 계약을 파기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1월 말, 철도공사 측에 승무운영과정의 문제점을 제기한 철도노조 KTX 서울승무지부 민세원 지부장은 “노조의 문제제기로 철도공사가 철도유통에 대한 감사를 시행했고, 12월 말 철도유통은 승무원들에게 ‘철도공사에서 위탁관리 계약을 파기했다’는 공지를 했다”며 “철도유통이 사업을 자진포기 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철도유통이 승무원 위탁사업 자격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하는 만큼 인정받고 싶어요!”
현재 철도노조 KTX 서울승무지부는 승무운영사업의 위탁이 아닌 철도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중이다.


계약직임을 알고 입사하긴 했지만, 승무원들은 정규직 못지않은 대우는 물론 정년까지 보장해준다는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근무평가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돌아왔다. 참석하지 않으면 근무평가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압력’으로 비번에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고, 지난 추석에는 비번인 승무원들이 나와 얇은 한복을 입은 채 하루 종일 인사를 하기도 했다.


당초와는 다른 근무조건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조는 철도유통의 승무운영 능력 미숙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KTX 승무원은 교번이라고 하는 한 달 정도의 스케줄 표에 따라 근무하는데, 이것이 승무운영 능력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철도유통은 ‘예비’라고만 작성한 백지 교번을 운영하거나, 상ㆍ하행 열차가 거의 만석인 주말에만 쉬는 승무원이 생기게 교번을 운영하는 등의 미숙함을 보이기도 했다.


민세원 지부장은 “승무업무 경험이나 전문성이 없는 자회사의 정규직이 되는 것보다는 비정규직이라도 승무운영 능력이 있는 철도공사에 직접 고용되어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승무업무는 승객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의 교육만으로 바로 실무에 투입되는 현재의 방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객기와 달리 정차역마다 승객이 타고 내리는 철도는 더욱 전문성이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하우가 쌓여서 업무능력이 향상되는 서비스 전문직임에도, 여전히 철도 승무원에 대한 인식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다. 결국 승무업무의 중요성이 무시될 뿐 아니라 철도공사 소속이 아니란 이유로 정작 KTX에서 열심히 일하는 당사자이면서도 수익에 따른 성과급은커녕 할인권 한 장도 받아본 적이 없다.


승객들과 최전선에서 만나는 이들의 얼굴이 곧 고속열차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승무원을 진정한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철도공사의 태도는 이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커튼 뒤 어두운 표정 걷히는 날을 꿈꾸며
승무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고, 승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그래서 일하는 만큼 인정받고, 일하면서 행복해 할 수 있는 승무원이 되는 것. KTX 승무원들의 바람은 ‘첨단’ ‘초고속’ ‘최고’라는 고속열차의 수식어에 비해 한결 소박하다.


설을 앞두고 있어 더 했는지, “후배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민 지부장의 얼굴에서 답답함이 스민다.
KTX승무원 중에는 유난히 지방 출신이 많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지방의 베이스(일종의 승무원 본부) 두 곳이 운영되지 못하고 축소된 탓이다.


설 연휴, 모두들 손에 선물을 들고 고향으로 향하는 들뜬 객실을 점검하는 승무원의 마음은 승객들보다 먼저 고향에 가 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 안, 겨우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작은 공간에 앉아있는 승무원의 얼굴은 혹시 우리에게 보이는 환한 미소와는 다른 서글픔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