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이 아닌 ‘눈물’을 먹었던 그해 겨울
국물이 아닌 ‘눈물’을 먹었던 그해 겨울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2.04.3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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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다큐 2000]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두번째 이야기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가 거리로 쫓겨난 그해 겨울은 잔인했다. 30년만의 폭설이 내렸고, 영하 15도의 추위가 이어졌다. 길거리에서 ‘얼음밥’에 ‘눈물국’을 먹었다. 눈이 내리는 날 지붕 없는 거리에서 국을 먹으면 줄어들지가 않았다. 훌훌 마시는 동안에도 국물에 눈이 더해졌다. 국물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식판에 밥을 푸는 동안에 밥은 얼음이 되었다. 허기는 지는데 손이 꽁꽁 얼어 숟가락을 쥘 수가 없었다.

얼어 죽느니 맞아죽자

겨울 내내 눈 한번 구경하기 힘든 부산에서 올라온 노동자에게 추위는 공포였다. 부산 수영전화국에서 올라온 이창기는 “그렇게 추울 줄 알았나에”라며, 그해 겨울을 겪고 나서는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많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이춘하의 기억에 남은 그해 겨울이다.

“기억나는 게 많죠. 그해 눈이 많이 왔었고, 천막도 제대로 못 치고, 침낭 같은 것도 준비를 못해 온 동지들이 많았어요. 철물점에 가서 급하게 비닐을 구해와 남성 동지들은 비닐을 노천에다 쭉 쳤죠. 바람이라도 막으려고 비닐을 치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그 비닐 위에 눈 위 쌓인 채 얼어 비닐이 주저앉았더라고요. 다들  얼음 속에서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젤 기억에 남아요.”

‘얼어 죽느니 맞아죽자’는 심정이었다. 본사 앞 인도에서 잠을 자다가는 죽을 것 같아 본사로 뛰어 들려고 하니 경찰들이 ‘닭장차’에 태워 경원대학교로 이동시켜주는 일도 벌어졌다. 2001년 1월 11일 한통 계약직 노동조합과 이랜드 노조 연대투쟁 문화제가 있었던 날이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파업대오는 노숙투쟁에 들어갔다. 새벽 1시 영하 20도의 강추위로 조합원들의 몸이 굳어갔다. 덮을 비닐도 부족해서 이 상태로는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모두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본사로 진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전경들이 무장 준비를 했다. 새벽 2시 경찰은 “전경 차량을 제공해 줄 테니 제발 숙소로 가라”고 했다.

‘에이~’ 카더니 막 밀려들어간 거야. 본사로. 사람들 막 이제 홍준표 위원장이 막 말리고 ‘야! 이~ 어 그러면 안 돼’ 뭐 말리고 막 그랬었다고. 와~ 이거 와~ 몰려 들어가고 막 홍준표 위원장님 확 따라다니고 ‘안 돼! 안 돼.’ 어쩌구 저쩌구 뭐 ‘얼어죽느니 맞아죽자’ 그러고. 정말 그 그랬다니까요. ‘얼어 죽느니 맞아 죽자’고.
- <517일 간의 외침> 가운데서

입에서 훅훅 뿜어지는 입김은 머리카락에 고드름을 매달게 하였다. 잠에서 깨어 팔을 들면 우두둑 거렸다. 한겨울에 쫓겨난 이들은 삶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추위에 쓰러진 노동자

추위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가슴에 지울 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2001년 1월 15일 11시 30분, 분당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바위처럼’에 맞춰 율동을 하자고 했다. 하나둘 일어났다. 그러나 한 사람만이 일어서지를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 “이동구 동지”를 불렀다. 하지만 눈동자가 풀린 이동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웠다. 한쪽 다리는 땅을 딛건만 오른쪽 다리는 접힌 채 펴지지가 않았다. 119를 부르고 몸을 마사지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뇌경색이었다. 좌측 뇌세포가 절반 이상이 죽었다.

1996년 한국통신 공주전화국에 들어온 이동구, 당시 스물일곱이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목숨을 연명하면서 두세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혼수상태를 이겨냈지만 결국 오른쪽 전신마비와 언어장애가 나타났다. 위급한 상황을 넘겨 일반병실로 옮겼지만 혼자서는 숨을 못 쉬고 식사도 할 수 없었다. 목 기관을 절개하여 호흡을 하고 음식물 호스와 소변 호스를 달았다.
-<517일간의 외침> 가운데서

517일간의 싸움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다고 이춘하는 말한다.

“그 동지가 굉장히 활발했어요. 농담도 잘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언어장애가 있어 말도 잘 못하고…, 그게 제일 안타깝죠. … 경기도 쪽에 잠깐 취업을 했죠. 지금 시골로 내려왔어요. 아직 취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다보니까. 그래도 잘 걸어는 다녀요. 말이 안 되고 있죠. 대전지역 동지들이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거든요. 가끔 가다 동지들 얼굴 보여주려고 데리고 와요.”

대전에서 이춘하를 만나고 공주로 가서 이동구를 취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서지 않았다.

이동구가 쓰러지던 날, 노동조합은 고려대학교로 숙소를 잡았다. “30만원을 주고 기름을 때고” 조합원들을 재웠다. 영하 17도, 바람도 거세어 몸으로 느끼는 추위는 더 심했다.

홍준표 위원장은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파견 나온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과 동고동락 하던 박상윤을 불렀다. 

“야, 상윤아! 지금 동구가 저렇게(쓰러지게) 되고 나서 (조합원들이) 침체 되어 있는데, 우리가 뭔가 투쟁을 해야 되는데, 어떤 게 있겠냐?”

“한강 철교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은 어때?”

“한강 철교? 지금 올라갈 수 있겠냐?”

영하 17도다. 강바람은 얼마나 거셀 것인가? 홍준표는 이 날씨에 다리 난간 위에 올라갈 조합원은 있겠는가, 만약 있다 해도 그 강바람에 제대로 서서 버틸 수나 있겠는가? 온갖 걱정이 되었다. 박상윤이 말한다.

“형들 주특기잖아. 전봇대에 올라가는 거.”

홍준표는 조직국 사람들을 불렀다. 이동구가 쓰러져 있는데, 이리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 추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더 희생 될지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널리 알려야 한다.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 현수막을 내걸자. 홍준표의 제안에 조직국 사람들의 답은 간단했다. “합시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맨발로 한강대교에 우뚝 서다

그런데 누가 오를 것인가.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가운데 ‘나선’이라고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 선로를 깔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나선 일을 하던 노동자 다섯 명을 뽑았다. 물론 이들에게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할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구속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말로 대신했다.

“창기야! 창기야!”

오랜만에 따뜻한 곳에서 단잠에 빠졌던 이창기는 눈을 부비며 잠에서 깬다.

“투쟁이 있는데 너 갈래?”

“아, 가야죠. 가야죠.”

이창기는 두 말이 필요 없었다. ‘투쟁’이라는 말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따뜻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창기의 모습을 바라보던 홍준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당시를 회상하던 홍준표의 눈이 붉어진다.

“그때 눈물이 확 나는 게, 이런 놈(동지)들이면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

다섯 명은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 어떤 일을 하는 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다. 다리에 올라간다, 이게 전부였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승용차는 한강대교에서 멈췄다. 대전에서 온 한창원과 이창기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오르기로 했고, 나머지는 위에서 내려주는 현수막을 걸기로 했다.

홍준표는 출발하기 전 한창원에게 일렀다.

“정말 춥다. 바람도 불고. 한 바퀴 돌고 여의치 않으면 전화하고 돌아와라.”

초조하게 고려대에서 상황을 기다리던 홍준표의 전화기가 울렸다.

“위원장님, 만만치 않습니다. 철교 위에다 구리스를 발라놔 미끄러워 못 올라가겠습니다.”

“그러면 철수해라.”

십여 분 남짓 시간이 흘렀다. 다시 홍준표 전화기가 울렸다.

“그래 어디쯤 돌아오나?”

“지금 다리에 올라갑니다.”

이들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찌 그냥 돌아가는교?”라며 한강대교를 올랐다. 다행히 가장자리 쪽으로 윤활유가 발리지 않은 곳을 찾아냈다.

김해 삼성병원 입원실에서 2012년 1월 16일에 이창기를 만났다.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육 개월 전 통신 일을 그만 두고 철강회사에 들어갔는데 철판에 다치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다음은 이창기의 증언이다.

“바람이 많이 불대에. 처음에 올라갈 때는 바람도 많이 불고, 원래 강바람이 상당히 쎄잖아요. 날도 춥고. 한창원은 키가 커가지고 그나마 구리스 발라져 있어도 잘 짚더라고. 쭉쭉 (다리가) 길어가지고. 나는 쫌 힘들더라고. 손이 잘 안 딸려가지고. 저 같은 경우는 바둥바둥되면서 올라갔어에. 옆에서 니는 안 되겠다, 이라더라고에.”

이창기의 오르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은 말렸다. 하지만 창기는 “이왕 하는 거면 해야 되지 않나!” ‘경상도 사나이’의 뚝심으로 올랐다.

다리에서 아치 꼭대기까지는 오 미터다. 하지만 아치 위에서 출렁이는 강물까지는 수십 미터다. 고소공포증이 없었지만 아찔했다. 한창원이 등에 가로질러 매고 올라간 현수막을 펼쳤다. 워낙 세게 바람이 부니 현수막이 허공에 휘날렸다. 아래에 대기하던 이들이 현수막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순간, 이창기는 자신이 신은 등산화를 벗었다. 현수막 끝에 달린 각목에 등산화를 매달아 던졌다. 그 신발의 무게 때문에 아래에서 아슬아슬하게 현수막 끝자락을 잡아 다리에 매달 수가 있었다.

‘한국통신은 고용안정 보장하라’

흰 바탕에 검고 붉은 글씨로 적힌 구호가 펼쳐졌다. 이제 언론사 기자들만 오면 된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강바람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기자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하지만 잠시 뒤 이창기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517일간의 외침>에 나온 이창기의 구술 내용이다.

‘그 철판이, 양말을 신었는데도 그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가만히 있으니까. 처음에는 후끈후끈거리더라구요. 이래 좀 있었더구만, 다 발이 얼기 시작하는데, 바람도 쎄게 불지, 이 또 공간도 얼마 안 되잖아요, 이게 중심을 못잡고 가만 있으면 또 떨어질 거 같은 거에요. 난… 죽을라 한 건 아니고, 일단 우리 홍보 활동하러 갔기 때문에, 떨어지면 안돼잖아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몸 한 쪽이 마비가 오며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창원이 굳어가는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기자들이 오는데 아치 위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경찰이 오고, 잠시 뒤 소방차 3대가 출동했다.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농성을 하던 이들은 1시간 뒤에 모두 연행이 되었다.

깁스한 채 병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은 이창기가 말한다.

“나는 다리(한강대교)가 친근감이 있대. 고향에 왔다, 이런 느낌이 들어. 집이 영도기 때문에. 영도다리 새 다리랑 (한강대교) 모양이 거의 똑같아예. 고향에 온 거 같더라. 다리에 서니까 집에 가는 기분. 남포동에 내려가지고 많이 걸어 다녔거든요. 그 느낌이 참 좋더라고예.”

그 끔찍하게 두렵고 무서웠을 순간, 이창기는 고향 영도의 부산대교를 떠올렸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한국통신이 아닌 청와대와 맞선 싸움

추위에 쓰러진 이동구와 한강대교 농성의 결과였을까? 파업 36일째인 1월 17일, 한국통신 이상철 사장과 홍준표 위원장의 최초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국통신의 답은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앞에 또 다른 적이 있음을 확인 시켜주는 자리에 불과했다.

다음은 <517일의 외침>에 실린 홍준표의 말이다.

‘이상철 사장은 구조조정이란 큰 틀을 전체 주식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1대 주주인 정부의 구조조정이니, 나(한국통신 사장)의 운신의 폭은 적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나의 입장이다.’

한국통신, 정규직 노동조합, 추위라는 다중의 적과 싸워왔던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는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이라는 또 다른 적과 마주쳤다. ‘계약해지 철회, 고용안정 보장’ 요구는 한국통신이 아닌 정부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의 구호도 이때부터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 쟁취’로 바뀌었다.

“이상철과 면담을 했는데, 홍위원장님 이거는 내가 사장이지만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내가 해주고 싶어도, 나 역시 정부에서 규정되어서 와 있는 자리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 들어서면서부터 이 구조조정, 외환위기를 넘기 위해서 엄청난 민영화 속에 있는 걸 내가 무슨 수로 해결을 하냐.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야 길어지겠구나, 정부와 싸움이 되겠구나, 타겟을 한국통신이 아니라 청와대로 돌려야겠구나. 그래서 국회 정부 투쟁으로 가고 목표 자체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전환을 하면서 장기 레이스로 가는 걸 택했죠.”

홍준표의 증언이다.

이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일명 ‘골뱅이@ 투쟁’을 준비한다. 이 투쟁을 준비하며 ‘목동의 전사’들이 탄생한다.

▶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