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남자 김성근
고독한 남자 김성근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2.04.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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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독립야구단에서 새로운 기적을 꿈꾼다
“인생에 포기는 없다는 걸 세상에 어필하고 싶다”
[플러그인]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

‘잠자리 눈깔’은 매서웠다. 그의 눈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타격 연습을 하는 선수에게 공을 던져주는 틈틈이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뭔가를 말하며 타격 폼을 취하다가도, 아무 말 없이 멀리서 뛰는 선수들을 쳐다봤다. 배트를 휘두르는 선수의 입에선 신음에 가까운 기합이 새어나왔다. 공으로 가득했던 바구니가 어느새 텅 비었다. 그는 다시 야구 방망이를 지팡이 삼아 그라운드를 향해 섰다. 선글라스 안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야신’보다 더 마음에 들어 한다는 ‘잠자리 눈깔’이란 별명다웠다. 선수들은 해가 질 무렵까지 뛰고, 던지고, 휘둘렀다.

박찬호, 김병현, 이승엽 등 슈퍼스타들의 복귀로 여느 때보다 뜨거운 야구의 계절. 김성근 감독의 주변에선 관중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았다. 고양시 야구 국가대표 훈련장에는 조금은 낯선 유니폼을 입은, 생소한 이름의 선수들만 눈에 띄었다. 그래도 그는 상관없었다. 국내 최초의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이끄는 김성근 감독에게 2012년 4월은 예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야구를 하고 있으니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악마라 불린 사나이
1964년, 스물셋의 김성근은 홀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가족들과는 생이별했다. 일본 교토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이 땅은 이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야구뿐이었다. 김성근은 야구로 살아남아야 했다.

“한국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집에도 별다른 얘기를 안 했어요. 나의, 하나의 결심이지.”

그의 왼팔은 남달랐다. 국가대표를 거쳐 순식간에 실업팀 기업은행에서 에이스로 떠올랐다. ‘혜성처럼 에이스로 등장한 사우스포(좌완투수)’라는 당시의 신문 표현대로였다. ‘투수의 신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절실함 속에서 핀 꽃이었다. 화려했던 만큼 꽃은 일찍 시들었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선수 관리가 이뤄지지 않던 때였다. 혹사당하면서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팔은 서른도 되지 않아 망가졌다.

이때부터 감독 인생이 시작됐다.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그였다. 선수가 아니라면 감독으로 최고가 되고자 했다. 1969년 마산상고를 시작으로 기업은행, 충암고, 신일고 감독을 맡았다. 봉황기, 화랑기 우승을 이루며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고액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리더’의 기질을 타고났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팀의 훈련을 도맡았다. 동기들도 예외가 없었다. 달려서 산을 오르내렸고, 펑고(공을 수비수 좌우로 빠른 속도로 굴려서 잡게 하는 훈련)도 수백 개씩 쳤다. 후배들은 그를 ‘악마’라고 불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훈련’을 한다는 김성근 야구의 뿌리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에는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감독에 취임했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프로야구 팀에서만 6번이나 감독 자리에서 ‘잘렸다’. 수차례 해고되면서도 바로 다른 팀의 감독을 맡은 건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성적이 증명한다.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사명감을 갖고 성심 성의껏 야구를 한” 덕분이었다. 경질 이유는 모두 구단과의 마찰이었다. 그는 자전 에세이 <꼴찌를 일등으로>에서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유일한 실패로 삼성 시절(1991~1992)을 꼽았다. 

“당시 삼성은 구단과 선수들이 손발을 맞추고 있었어요. 몰아댔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모여 안에서 트러블을 일으킨 거죠. 연습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며 노골적으로 나왔다고. 노골적으로.”
김성근 감독은 야구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히질 않는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자신의 길을 걸으면 된다고 여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김성근’으로 산다.

‘평생 남이 닦아놓은 길만 따라갈 게 아니라면 자신이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누군가 그 길을 뒤따라온다면 그걸로 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 책 <김성근이다> 중에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김성근 감독에겐 ‘안티팬’이 많다. 특히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았을 때(2007~2011) 절정에 달했다. 정상의 자리를 독주하는 팀에 으레 따라붙은 ‘시샘’과는 달랐다. 그가 추구하는 ‘지지 않는 야구’ 때문이었다. 그는 상대 팀이 역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봉쇄했다. 잦은 투수 교체, 작전을 통한 득점 등이 대표적이었다. 좀체 극적인 ‘드라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많은 야구팬들은 그의 야구에 ‘재미없다’는 딱지를 붙였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으며 ‘확인사살’하는 스타일에는 ‘인간미가 없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건 승부를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예요. 사업을 예로 들면, 99%를 잘하다가도 1%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망한다고.”

절실함 때문이었다. 이겨야만 살아남는 승부의 세계를 살아온 지 수십 년이었다. 그에겐 책임져야 할 선수들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다. 그가 즐겨 쓰는 ‘일구이무(一球二無)’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하나의 공에 다음은 없다. 공 하나하나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1% 때문이다. 그는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에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맞고 역전패했다. 모두 공 하나였다.

“노력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누군가 생각했던 게 반드시 결실을 맺어야 비로소 ‘노력했구나’ 하는 거지. 그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노력도 아닌 거요.”

그는 치열해야 했다.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선수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야구에 더욱 몰두했다. 갈수록 보는 눈도 깊어졌다. 그리고 끊임없이 진화했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아나운서 레드 바버는 “야구는 지루한 정신에게만 지루하다”고 했다. 야구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게 전부가 아니다. 투수의 견제 하나에도, 수비 위치를 잡는 걸음 하나에도 오랜 기록과 상황을 토대로 한 분석과 고된 반복 훈련들이 녹아 있다. 그의 야구는 공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세이프와 아웃을 판가름하는 30㎝를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야구의 진정한 재미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싫어했지만 결국엔 매료됐다는 전문가들의 ‘고해성사’가 심심찮게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승부를 향한 집념은 삶의 매 순간까지 규정한다. 그의 징크스는 유별나다. 밥 먹는 일부터 화장실 가는 것까지 징크스가 얽히지 않은 순간이 없다. 고양 원더스에선 “아직 징크스를 만들어놓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머잖아 줄줄이 생길 터다. 지난해까지 SK 와이번스에서 전력분석팀장을 지내며 아버지와 한솥밥을 먹었던 김정준 야구해설위원의 일화가 증명한다.

‘2008년 부산으로 원정을 떠났을 때 김 팀장이 김 감독에게 밥을 사달라고 했다. 아버지한테 밥 한 끼 사달라고 조른 건, 김 감독이 SK에 온 뒤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부산 롯데호텔 지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졌다. 그 후로 김 감독은 아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 책 <김성근 그리고 SK 와이번스> 중에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기적을 꿈꾸는 패자부활전
김성근 감독에게 선수들은 ‘우리 아이들’이다. 모두 친아들처럼 여겨서다. 그는 평소에도 “지도자는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자식이 넘어지더라도 잠자코 보고 있는다.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할아버지와는 다르다. 가슴은 아프지만 자식의 자립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매사에 엄격하고, 연습은 혹독하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결과를 얻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게 리더예요. 사리사욕을, 자기 욕심을 버리고 조직의 목적을 위해 모든 걸, 자기를 내던지고 일할 수 있어야 돼요. 모든 일은 시작부터 끝까지 쉬울 수가 없어요. 그걸 해내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지. 그걸 못 하면 내가 필요 없는 거예요. 어려움이 닥쳐도 마찬가지예요. 집에 문제가 생겼다고 아버지가 도망가지는 않잖아요.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하지. 나는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도망간다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 떠올린 적이 없어요.”

누구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끝끝내 될 때까지 가르친다. 사람의 잠재능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는다. 믿음을 갖고 선수들을 끌어안는다. “사람은 절대 버리는 게 아니”라며 단점이 많아도 장점 하나를 극대화한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경기를 풀어나간다. 구단에서 방출하려는 선수를 각서까지 쓰며 보호하고, 실수를 한 선수를 감싸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에게‘그라운드 출입금지’라는 징계를 내린 ‘김성근식 믿음’의 배경이다. 고독 속에서 우러나온 그의 진심이 전해져 빛을 발한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제 그는 새로운 기적을 꿈꾼다. 패자부활전이다. 수많은 역경을 지나온 그와, 사업에 연이어 실패했던 구단주와, 한때 야구를 접었던 선수들이 ‘고양 원더스’에 모였다.

“이왕 시작했으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가치가 있는 팀이 되어서,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죠. 그래야만 이 팀의 존재 가치가 있는 거고, 존재 가치가 생김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에 포기는 없다는 걸 어필할 수 있으니까요.”

깊게 패인 주름과 충혈된 눈에는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악마’라는 험담, ‘인간미가 없다’는 비난에도 고독하게 버텼다. 데자뷰처럼 이어지는 해고와 비주류의 설움을 가슴으로 받았다. 그래도 그는 행복한 야구인이었다.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 야구를 너무 좋아했다. 야구를 직업으로, 취미로, 꿈으로 삼으며 한 평생을 살았다.

김성근은 여전히 ‘나쁜 남자’로 산다. 때로는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야 ‘김성근’일 수 있고, ‘우리 아이들’이 잘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근은 정말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