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일간의 외침, 노동조합 해산으로
517일간의 외침, 노동조합 해산으로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2.07.0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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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다큐 2000]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마지막 이야기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목동 전화국을 점거했던 ‘목동의 전사’ 198명은 전원 연행 되었다. 홍준표 위원장을 비롯한 5명의 간부들은 구속되었다. 칠천 명의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가 해고되어 백일을 넘게 싸워도 알려지지 않았던 외침이 전화국을 점거하고 나서야 공중파 방송을 비롯한 중앙 일간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통신과 대화는 점거농성 이후에도 열리지 않았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동지들은 목동전화국을 점거하고, 엄호조직은 목동전화국 주변에서 공권력의 진입을 저지하며, 민주노총이 전 노동계의 관심과 지원을 집중시키고 공공연맹이 사측의 교섭을 이끌어낸다는 3.29점거투쟁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517일간의 외침>

국회 본회의장에 울린 외침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2001년 4월 30일에는 데이콤 용산지부 앞 8차선을 가로지르는 광케이블에 몸을 매달고 투쟁했다. 국회의원회관 옥상을 점거하고 유인물을 뿌리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차 골뱅이 투쟁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전화국이 아닌 정보통신부 건물이었다. D-day는 9월 12일. 11일 임시총회를 열고 점거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그날 밤 예기치 않은 일이 터졌다. 미국의 국제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진 9.11사건이 일어났다. 이 상태에서 국가기관을 점거하는 일은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판단했다. ‘골뱅이 시즌2’는 유예되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에게 생각지도 않은 ‘적’이 등장한 거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2001년 10월 31일 비장한 표정의 동지들이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으로 들어간다. 이승환 조직국장, 임경상 조합원, 윤성진 교육국장이었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난생처음 앉아 보는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 이렇게 가시방석인 의자가 또 있을까? 오후 2시 20분 경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항공사에 대한 국가지급 동의안’ 처리 순서가 진행되고 있었다. 동지들은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뭔가를 확인한다. 잠시 후 대한민국 헌정사상 유례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통신 계약직문제 해결하라!”

이승환 동지가 구호를 외치며 4미터 본회의장으로 뛰어내렸다. 그사이 임경상, 윤성진 동지는 유인물을 뿌렸다. 현수막을 걸려는 순간 경위들이 출동해 저지했다. 본회의장으로 뛰어 내린 이승환 동지는 중앙 발언대로 내려가려 했다. 경위들이 저지했다. 그 자리에서 처절한 함성이 이어졌다.
“한국통신 계약직문제 해결하라!”
-<517일간의 외침> 가운데서

국회 본회의장에서 뛰어든 계약직 노동자 3명은 국회의장 ‘소란죄’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한 여론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통신 계약직의 외로움 외침이 두터운 사회의 벽에 바늘 구멍만한 틈을 내기 시작했다.

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이대로 겨울을 맞이할 수 없었다. 9.11 사건으로 미뤄졌던 골뱅이 시즌2도 다시 준비되었다. 11월 11일 전국노동자대회 날을 D-day로 잡았다.

노동운동 진영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외로운 저항에 ‘연대’로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 이어졌다. 2차 점거투쟁의 연대세력 조직을 담당했던 김혜진의 말이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의 싸움은) 비정규직 문제가 구조조정 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사안이었구나, 하는 것을 그제서야 다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구조조정은 정규직이 맞서서 싸워야 하는 거고, 운동의 중요한 과제고, 비정규직은 완전 별개의 것이라고 사고했던 거에서 그게 아니라는 인식이 한통계약직을 통해서 최초로 드러난 거죠. … 운동진영을 각성시킨 게 사실 제일 큰 성과죠. 처음(목동전화국)에 오십 명 모으기 빠듯했던 그 조건에서, 아 제가 이차 투쟁을 한다고 순회를 하는데 여기저기 다 사람을 낸다는 거예요. 저 감동받았거든요. 기운도 났고. 정말 해볼 수 있게구나. … 사람도 내겠다. 투쟁할 때 같이 연대하겠다. 사람을 모아서 어떻게 가면 되겠냐. 대개 적극적이었고, 물론 날짜를 잘 잡은 탓도 있죠. 노동자대회랑 연동해서 잡았기 때문에.”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2차 점거 브레이크 걸리다

점거를 앞두고 조합원들은 흩어져 ‘잠수’를 탔다. 조합원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목동 전화국의 악몽이 떠오른 한국통신도 긴장을 했다. 11월 9일 한국통신 인력관리실장이 공공연맹 간부에게 “종업원지주제에 대해 한국통신에서 교섭할 의향이 있다”는 의견을 전했다. 공공연맹은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에 “연맹에서는 판단하기 어려우니 노동조합에서 판단하라”고 했다. ‘종업원지주제’는 집행부에서 ‘최후의 안’으로 논의했던 부분이다. 이 ‘안’을 한국통신이 2차 점검투쟁을 앞두고 던진 것이다. 집행부는 혼선에 빠진다. 점거를 몇 시간 앞둔 10일 저녁, 조합원들은 숭실대학교로 집결한다. 종업원 지주제에 대한 설명과 점거농성 유예를 집행부는 조합원들에게 밝힌다.

점거농성이 유예되었지만 한국통신은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 한국통신이 종업원 지주제를 가지고 대화하겠다는 말은 점거농성을 막기 위한 기만술이었나? 노동조합에서 이 안을 가지고 논의한 것을 한국통신은 어떻게 알았을까? ‘진짜로’ 한국통신이 공공연맹에 이 말을 던진 걸까? 숱한 의혹이 불거졌다. 이춘하 당시 위원장 직무대행의 말이다.

“아직까지 저도 궁금해요. 그런 말이 진짜 케이티에서 나왔는지, 누구한테 나왔는지, 아직까지 확인이 안됐어요. 확인이 안 됐는데, 공공연맹 000의 뜻이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어요.”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한 의혹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교섭대표로 활동했던 공공연맹 간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파업 1주년이 지났다. 두 해가 바뀌었다. 하지만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옥상 기습시위에 이어 다시 한강대교 아치 위를 올랐다.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 정규직화 쟁취를 위한 1000인 실천단’이 꾸려져 사이버 시위 등 다양한 연대가 이어졌다. 2002년 4월 6일과 7일, 계약직 노동자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다시 점거투쟁을 위한 행동이 들어간 거다. 그제야 한국통신은 노동조합에 교섭을 하자고 연락을 했다. 5월 4일 이춘하 위원장 직무대행과 한국통신 송원중 노사협력팀장이 만나 오백일이 넘는 투쟁에 종지부를 찍는 노사합의서 조인식을 가졌다.

2002년 5월 12일 대전 유성 유스호스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이 창립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일박이일에 걸친 조합원 임시총회. ‘… 도급업체에 취업을 알선하되, …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 동안 고용이 보장되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노사합의서를 조합원들은 통과시켰다. 그리고 ‘…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법적 절차에 따라 조합을 자진 해산하며…’라는 합의서에 따라 노동조합 해산을 결정했다. 517일의 외침의 결과는 도급업체 3년 고용보장이라는 초라한 결과물에 노동조합 자진해산이라는 단서가 달려있었다.

투표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춘하 의장은 결과를 듣고 “노동조합 조건부 해산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뒤돌아서서 울었다. 투표결과가 확인되는 순간 모두가 흐느꼈다. 처음에는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나중에는 통곡의 바다가 돼버렸다. 투표참여인원 140명, 찬성 105명, 반대 35명으로 2/3인 94명이 넘은 것이다. 여기저지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한 조합원은 그 자리에서 투쟁조끼를 찢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서러운 눈물이었다. 이춘하 의장은 “현장으로 돌아가더라도 최선을 다해 싸우자. 그리고 500여 일 동안 싸운 경험으로 이후 현장으로 돌아가도 충분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서 노동조합 해산의 허탈함을 위로했다. 517일간의 처절한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517일간의 외침> 가운데서

노동조합 해산하다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심성들이 많이 여렸죠. (조합원들이) 많이 착하니까 그 수준에서 끝날 수 있었지, 정말로 독했으면 그렇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고철윤의 말이다.

“(가슴을 중심으로 위아래를 가리키며) 여기선 이리 올라오는데 여기선 이리 내려오는데, 딱 막혀버리더라고. 무호흡증. 꺽, 소리 밖에 안 나오는 거야. 인제 (노동조합) 깃발 내려버린다고, 직무대행이 꽝꽝 거리면서 할 때…. 호흡곤란, 그렇게 울음 나온 거는 처음이었어요.” 최봉준의 말이다.

“햇수로 삼년이고 오백일 싸운,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이게 말도 안 되죠. 그런데도 그 기간 동안 가족 있는 사람 힘들고, 또 갈수록 힘이 지쳐가니까, 말도 안 되는 거지만…. … 그 자리에서 오백며칠 동안 싸웠던 게 한꺼번에 무너지는 모습도 볼 수….” 이운재의 말이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아, 마음은 계속하고 싶지만은 인원도 그렇고, 시간도 계속 흐르고, 그라니까에. … 결론적으로 봤을 때는 패밴 거는 맞지요. 실패한 투쟁인데 얻은 것도 많구요.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실패하지 안했다고 생각들지에. 따져보면 월급도 못 받고, 벌은 수입도 없고, 가정도 어려웠던 사람들 어려웠고, 뭐 희망보다는 절망도 안겨주고. … 사람 얻은 것은 다행이다 생각. 그 사람들 이제 평생 같이 만나고 같이 술도 한 잔 먹고, 서로 돕고 돌아가면서 살고 있잖아에. 그런 거 봤을 때는 큰 수확이라고 볼 수가 있지에. 물론 고생스러웠던 것도 조금 있었지만 고생이야 잠시(517일) 뿐이고, 어째든 사람 많이 얻었으니까, 충분히 만족하고 인생의 경험도 쌓고에. 몰랐던 부분도 알게 됐고, 그랬지에.” 이제 불혹이 된 총각 이창기의 말이다.

“다들 힘들긴 힘들구나. 그런 생각을 가졌죠. 뚜껑을 열어보니까 찬성하는 동지들이 많더라고요. 다들 힘들어서 저러는구나, 그런 생각들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구요. 지금도 가끔 가다가 그때 생각나면 비디오(당시 투쟁 다큐 ‘이중의 적’) 꺼내다 보고. … 앞으로도 그런 일이 닥치면 선뜻 나서서 그런 일을 벌일 거 같습니다.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내 인생의 전화점이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당시, 처음 노동조합 깃발 내리고 한동안 공황상태 있으면서 다들 내가 왜 싸웠나 후회들 많이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다보니까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그런 이야기 많이 합니다. 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런 일을 겪으면 다시 돌아가지(싸우지) 않을까.” 마지막 총회에서 노동조합 해산 건 투표결과를 발표한 이춘하의 말이다.

“한통계약직은 사실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굉장히 높게 평가를 받았죠.” 김혜진의 말이다.

당시의 투쟁을 평가하려고 취재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중의 적’에 맞서 외로이 ‘517일간의 외침’을 했던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의 저항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기에 기록할 뿐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요즘, 그 아픔의 저변이 더 넓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십년 전 한국통신 계약직들의 삶과 저항이 더욱 절실하게 살갗을 떨리게 한다.

이 기록은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백서발간 위원회가 펴낸 이운재, 정경원이 엮은 <517일간의 외침>과 이지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중의 적>, 그리고 목동전화국에 함께 들어가 섬광탄을 맞으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정용택의 영상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국에 흩어져 지금도 ‘전봇대’를 타는 당시 노동자들을 더 늦지 않게 만날 수 있어 행운이었다.

▲ 다큐 <이중의 적> ⓒ 노동뉴스제작단
여전히 전봇대를 타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통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처지는 여전히 ‘비정규직’이었다. 처지도 십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암과 싸우는 고철윤과 산재를 당한 이창기의 빠른 쾌유를 빈다. 추위에 쓰러졌던 이동구가 예전처럼 활기차게 농담을 던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날 미뤘던 인터뷰를 하고 싶다.

전국에 흩어져 있어 많은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당시를 꼬박꼬박 기록했던 김왕주를 만나지 못한 것은 게으름 탓이다. 그의 기록이 고스란히 세상에 드러날 날을 기다린다. 당시 114, 100번 콜센터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싸움에 크게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취재를 하지 못했다. 숙제로 남겨둔다.

지금도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며 혈연 이상의 정을 나누고 사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부럽다. 승리와 패배로 재단하거나 성과를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삶을 썼던 이들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분노와 슬픔, 또는 배신감이 쉽게 지워질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의 삶을 보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당시 한국통신 계약직 투쟁을 보며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대학생도 있다. 그 대학생은 비정규직 노조 설립 투쟁으로 실형을 살았고, 출소 뒤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결과가 아닌 삶 자체가 이미 우리시대 소중한 보물임을 잊지 않고자 기록한다. 지금도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211명의 얼굴이 담긴 액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에 참,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