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부풀리기’ 사는 ‘후려치기’
노는 ‘부풀리기’ 사는 ‘후려치기’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6.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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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 없는 임금교섭


경총·양 노총 가이드라인도 혼란만 부추겨

 

본격적인 2006년 임금협상을 앞두고 노사 모두 워밍업에 들어가면서 ‘임금 가이드라인’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요즘은 임단협이 늦어지는 추세가 생기면서 전통적인 ‘춘투’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임금협상 준비는 겨울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선 해마다 이른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노사 상급단체들이 2월 말~3월 초에 일제히 ‘임금지침’을 내놓을 예정이다. 지난해의 경우 경총은 3.9%를 기본으로 하되 1000인 이상 대기업은 동결한다는 ‘임금조정 기본방향’을 내놓은 바 있고, 민주노총은 정규직 9.3%(±2%), 비정규직 15.6%를, 한국노총은 정규직 9.4%, 비정규직 19.9%를 제시했다.


이렇게 제시된 노사 상급단체의 가이드라인을 기본축으로 개별 기업 노사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됐고, 그 결과 최종적으로는 4.7%(총액임금 기준, 노동부 자료)라는 ‘절충점’을 찾았다.

 

‘지침’에 따른 힘겨루기만 길어져
문제는 노사 상급단체의 임금 가이드라인이 임금협상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협상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경총은 너무 낮게, 양 노총은 너무 높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바람에 개별 기업의 특성에 맞는 현실적인 협상이 진행되기보다는 ‘지침’에 따른 힘겨루기가 길어진다는 것.


임금협상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주는 쪽에서는 가능하면 적게 주려고 하고, 받는 쪽에서는 최대한 많이 받으려는 것이 속성이기 때문에 일정한 밀고 당기기나 마찰은 피할 수 없지만 경직된 가이드라인의 제시가 마찰의 강도를 높이게 되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일선 노사 담당자들의 생각이다.


물론 지침을 만드는 쪽에서는 다양한 검토 끝에 내리는 결론이라고 항변한다. 실제로 경총이나 양 노총이 내놓는 ‘가이드라인’은 그해의 경제 상황, 생계비 산정 기준 등 복합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합리적 근거’를 들고 있다.


여기에다 산하 노조·기업의 규모나 사업 실적 등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균치를 제시하다 보니 현실과 다소 동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노사 양측은 서로가 제시하는 기준에 대해 믿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불신을 안고 있다.


경총의 임금조정 기본방침을 내놓는 경제조사본부 관계자는 “전반적 경제상황을 기반으로 생산성을 최우선 고려 대상으로 하고, 이와 함께 기업의 지불능력을 감안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면서 “잘 되는 기업들은 연일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일부를 제외한 기업들은 현상유지조차 쉽지 않은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한국노총 정책본부 관계자는 “경총의 가이드라인은 기본적으로 물가상승률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면서 “임금이 소비의 기반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생산성이나 지불능력만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악순환을 낳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현장이 반영되지 않은 지침이 문제
이렇게 노사 양측이 가이드라인의 결정을 놓고 대립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로 상급단체의 지침이 ‘현장’과 괴리되어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한국노총 김종각 정책본부장은 “내셔널센터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개별 기업에 적용할 때는 해당 기업 노사의 사정을 반영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임금 부문에 있어서의 상급단체의 영향력이나 지배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기업 노사의 임금교섭 관행이나 노하우가 많이 축적된 데다가 노사관계 이슈가 임금보다는 고용으로 옮아가면서 가이드라인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개별 기업 노사는 자신들의 여건에 따라 가이드라인을 아예 무시하거나 혹은 가이드라인 때문에 교섭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계속 좋은 영업실적을 기록한 한 대기업 인사노무 담당자는 “솔직히 경총 가이드라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하면 임금교섭을 빨리 끝내느냐가 최대의 관건”이라면서 “다만 이익이 많다고는 하지만 영업 이익보다는 영업외 이익의 비중이 높은 상태에서 무작정 생산성과 괴리된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우리로서도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회사의 경우 매년 경총 가이드라인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최초 제시안을 내놓았고 이에 따라 노조의 요구안과 큰 차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에다 기본급 인상분 외에도 성과급이나 특별상여금 형태로 지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임금인상률 자체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는 편이다.


이 회사 노조 관계자도 “조합원들이 임금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높기는 하지만 일정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예년에 비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 편”이라고 말하고 “오히려 고임금 노동자라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임금 자체만으로 협상을 길게 끌고 가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이 회사 노사 관계자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룰’과 ‘교섭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상급단체에서 개입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었다. 양측 모두 “솔직히 노사를 대표한 대리전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서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알고 있다
이렇게 ‘실적이 좋은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개별 기업 노사 임금협상 과정에서는 한쪽은 최대한 낮추고 한쪽은 높여서 협상을 시작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조합원 2400명에 전체 종업원 5000명 규모의 한 기업 노사의 최근 3년간 임금협상 과정을 보면 회사는 매년 동결 내지 3% 인상안을 처음 제시하고, 노조는 9%대의 인상안을 내놓았다. 이 회사의 경우 노조가 산별노조 소속 지회이기 때문에 노조의 요구안은 산별노조의 요구안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회사는 경총 가이드라인에 준하고 있다.


길고 지리한 공방을 거쳐 실제로 타결되는 수준은 3~5.5%.
이 회사 노조 관계자는 “(산별노조 차원의) 공동요구안이 현실에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전제하고 “노사 모두가 최초 요구안이나 제시안에 대해 현실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협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산별노조 소속 또다른 기업의 노무 담당자는 “우리 업종의 경우 최근 실적이 좋기 때문에 회사의 제시안이 (금액기준으로 볼 때) 산별노조의 제시안보다 높은 경우가 생긴다”면서 “결국 기업 규모나 경영실적이 고려되지 않은 상급단체의 가이드라인 자체가 거의 적용되지 않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임금협상의 제시액이나 요구액을 둘러싼 노사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최근 좋은 경영실적을 보이면서 높은 임금인상률을 나타내는 한 기업 담당자는 “지불능력의 원천은 경쟁력인데, 지금 우리의 경쟁력은 기술경쟁력이 아니라 가격경쟁력에 있다”고 고백하고 “결국 이런 구도 속에서는 가격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아웃소싱이나 비정규직 확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노조가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했으면 한다는 속내를 내비친 것.


그러나 화학업체 K사 노조 위원장의 생각은 좀 다르다. 이 위원장은 “노사 양측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결국 협상 전략 차원”이라면서 “아직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분쟁을 대비해서 후려치거나 높게 부르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임금협상을 둘러싸고 파업까지 갔던 조합원 500명 규모의 한 노조 위원장은 “노조가 요구안을 낮게 제시할 경우 회사에서 ‘노조에서 많은 고민을 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요구 수준이 낮구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렇게 불신이 팽배하면서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경우도 생긴다.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냈다는 한 회사는 지금 곤혹스러운 지경에 있다. 이 회사의 이익 중 70% 가량이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주력기업 주가 인상분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익으로 잡히지 않던 것이 지분법 개정에 따라 이익으로 계상된 것.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급격하게 이익이 늘자 이 회사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이익 분배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노조 위원장이 “실제로 이익이 나지 않은 부분과 관련해 이를 임금요구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라는 원칙을 고수해 그나마 노사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숫자에 얽매이지 않는 협상 필요
현실적이지 않은 상급단체의 가이드라인 제시나 노사의 명분쌓기용 줄다리기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해법들이 모색되고 있다. 경총 김동욱 경제조사팀장은 “우리의 가이드라인 제시가 일본의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인데, 일본은 10여년 전부터 가이드라인이 없어졌다”면서 “노사관계가 안정되면 가이드라인 제시가 필요 없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려아연노동조합 박영진 사무국장은 “가이드라인의 ‘수치’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개별 기업 사정에 따라서 협상을 진행하되, 상급단체 차원에서는 산업이나 업종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노사 공동의 조합원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올해 임금협상 과정에서 새로운 기운이 싹틀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