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우유 노동조합 유태희 위원장
서울우유 노동조합 유태희 위원장
  • 참여와혁신
  • 승인 2006.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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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합원 앞에 다시 선 것만도 천운 ”

조합원 믿음 찾아 삼만리

김경아 기자 kakim@laborplus.co.kr

 

“사실 노총에서 상을 받을 만큼 열심히 한 일이 없어요. 우리가 협동조합 내 노동조합이라 다른 노조와는 또 다른 어려움을 안고 있어요. 그래서 안살림 챙기느라 대외활동은 잘 못했죠.”


지난 2월 한국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모범조합원 표창을 받은 서울우유 노동조합 유태희 위원장은 스스로를 한국노총의 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한 ‘불량조합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유 위원장은 서울우유에서만큼은 모범위원장이다.

 

조합 안의 조합, 이중의 어려움
서울우유는 일반기업이 아닌 조합장을 선거로 뽑는 협동조합이다. 이런 특징은 조합활동뿐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낳는다.

 

협동조합에서 일반 기업의 주주에 해당하는 것은 낙농조합원들인데 이들은 주주들처럼 기업수익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산을 책정해서 낙농지원금, 축산보조금 등의 명목으로 ‘사전배당’을 받는다. 원래 이 제도는 영세한 수준을 면치 못하던 낙농업계를 지원하고자 시작됐지만 목장들이 상당 수준에 올라선 지금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기업수익에 관계없이 배당금이 정해져 있으니 주주들이 경영 개선에는 신경 쓰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조합장은 다음 선거 때문에 조합원 눈치 보기 바빴고 경영의 전문성은 떨어졌다.


우유시장에서 확고하게 1위를 지키던 서울우유가 경쟁사들에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유 위원장은 기업경영을 바꿔야 한다고 절감했다. 기업 수익보다 배당금과 지원금을 챙기기 바쁜 낙농조합원들을 보며 기업을 살리는 일은 결국 ‘노동자’의 몫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오래 전부터 ‘사전배당’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우유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전배당’이라는 ‘당근’을 버리고, 경영개선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주장이다.


유 위원장은 노사가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서울우유가 시장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노사 모두 살 수 있는 길이라 믿고 싸운다.

 

뼈아픈 심판, 복귀한 현장에서의 1년 + 2년
유 위원장이 노동조합에 발 딛은 것은 14년 전. 당시 서울우유 노동조합에는 쉰을 넘긴 지부장이 대부분이었다. 90년대 초반, 젊은 피가 절실했던 양주지부는 이제 입사한 지 2년이 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성큼 노동조합에 발을 들여놓은 후 IMF 경제위기 여파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던 1999년 서울우유 노동조합 위원장이 됐다.


IMF 태풍이 서울우유를 지나칠 리 없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서울우유에 퇴직금 100%를 적립하지 못하면 특별감사에 들어가겠다고 통보했다.
유 위원장은 직원들의 상여금 300%, 금액으로 약 60억원을 삭감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놓으며 낙농조합원들의 축산지원금 중 227억원 삭감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노사 양측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서로 한발씩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노사 양측이 내놓은 비용으로 퇴직금을 적립했고 특별감사를 막았다. 그리고 회사는 IMF 태풍을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더 거센 조합원들의 비난이라는 태풍에 맞닥뜨렸다. ‘노조위원장이 뒷돈을 챙기고 상여금을 삭감했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결국 그는 다음 위원장 선거에서 낙선한다. 회사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아야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 내린 결단이 조합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유 위원장은 그렇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작업장에서 그는 혼자였다. 그가 하던 우유팩을 수령하고 관리하는 업무가 단독작업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조합원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출근하면 작업장에 틀어박혀 식사도 거른 채 일만 했다. 노동조합에 열정을 바쳤던 만큼 패배감도 짙었다. 그렇게 1년.


“대인기피증까지 생기는 것 같았어요. 정말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힘든 부서라도 좋으니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냉장고 작업장으로 옮긴 그는 조심스럽게 조합원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지부장이었던 시절부터 그를 믿어준 조합원들이었기에 힘을 얻었다. 다시 조합원의 곁으로 돌아간 유 위원장은 2년 동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다가가 설득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다시 위원장으로 조합원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의 진심이 통했다는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고 말한다.

 

비정규직 함께 안고 가야
다시는 조합원들 앞에 설 수 없을 줄 알았던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비정규직을 없애기로 회사와 합의한 것이다. 지난해 임금단체협상에서 6개월 이상의 임시직을 채용할 수 없게 해서 비정규직 신규 채용을 없애고, 대신 6개월의 수습기간 후 정규직을 채용하기로 한 것.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비정규직은 계약이 만료되는 대로 정규직으로 다시 채용하기로 했다. 회사는 수습기간을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다시 1년짜리 비정규직을 양산할 수 있다고 판단,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위화감을 해소하고 식품을 만드는 기업으로서의 책임감과 신뢰를 위해서도 비정규직은 없어야 한다고 회사를, 또 조합원을 설득했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다른 대우를 받는 것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일하다가 해고당하면 서울우유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하더랍니다. 또 먹는 걸 만드는 회산데 만드는 사람들이 거기에 책임도 가져야 믿을 수 있는 우유가 나올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올해부터 매분기마다 노사협의회를 거쳐 계약만료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 전환이 시작된다. 우선 올 3월 노사협의회에서 5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서로 믿고 한 목소리 내는 것이 노동조합
노동조합에 몸담으면서 꼭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노동조합은 위에서 눌러서 되는 조직이 아니라 구성원을 끌어안고 가는 조직 아닙니까? 그러니 더욱 서로 믿는 것이 중요한 거죠. 노동자가 한목소리를 내도 어려운데 서로 믿지 못해 흩어지면 안 되죠. 낙선 이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절감했습니다.”


내년 5월 조합장 선거가 있어 올해 임금협상은 어느 해보다도 힘들 것이라 예상되지만 이번에도 유 위원장은 서울우유를 살리고 노동자가 마음 놓고 출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