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우리 집의 역사
국수, 우리 집의 역사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2.12.0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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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에 걸쳐 60년 전통 이은 재래식 국수의 명인
“편법 쓰지 않고 정직하게 만드니까 길이 열렸다”
[삶의 현장] 손국수 공장

“국숫집 쥔장은 묵묵하다 익반죽만 한다/ 아내의 새색시 적 부끄러운 속살을 넣고 치대도/ 옛날은 옛날이라 호시절은 잘 뽑아지지 않는다/ 국숫집 주인은 잘 마른 국수 다발에/ 드륵드륵 칼을 들이댄다// 그예 소식이 없던 당신도/ 부여 국숫집 문간에/ 옛날 돈을 들고 서 있다” (유종인의 시 ‘부여 옛날국수집’ 중에서)

문간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국숫집 쥔장은 국수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반죽을 확인하고, 기계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자 알은체를 하고는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널려있는 면들을 지나쳤더니 겨우 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일정한 길이의 칼국수 생면을 마는 손놀림이 날랬다. 60여 년 전, ‘부여상회’라는 국숫집을 차린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쫄깃한 재래식 국수의 비결

“떡(넙적한 반죽)이 겹쳐지는 거 보이죠? 이게 바로 재래식 국수와 일반 국수의 차이예요.” 인천 용현시장의 귀퉁이, ‘권오성 손국수’에 들어섰을 땐 이미 칼국수 생면을 뽑는 과정이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13년째 국수를 만들고 있는 권오성(50) 씨는 재래식을 고집한다. 재래식 국수는 ‘떡’을 마주보는 두 개의 방망이에 말아서 여러 번 겹친다. 컨베이어를 타고 반죽통에서 바로 면이 나오는 시중의 일반 국수와는 다르다.

“재래식 국수는 이런 압연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일반 국수와 달리 쫄깃하니 차지고 쉬 불지가 않지. 옛날 어른들은 이걸 ‘방망이 국수’라고 그랬어요.”

그는 중학생 때부터 국수 만드는 일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해방 직후, 열일곱의 나이에 부여에서 국수 만드는 일을 시작한 그의 아버지는 1960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영등포구 신길동의 ‘쌍우물’이란 동네에 국수공장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마을마다 면을 뽑아서 널어놓은 조그만 국숫집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가게는 유명했다. 지금의 보라매공원 자리에 있던 공군본부, 진해로 옮겨간 해군본부는 물론이고, 구로공단에도 아버지가 만든 국수가 납품됐다. 영등포의 수많은 포장마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학원을 가겠어요, 과외를 하겠어요? 학교에서 오면 아버지 옆에 있다가 같이 국수 만들곤 했죠.” 지금처럼 체인으로 돌아가는 기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피대가 끊어지면 이어 붙이면서 철커덕철커덕 소리와 함께 나오는 국수를 지켜봤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망가지던 삶을 구원한 국수

“아침에 벌써 다 나가고 이게 마지막 국수에요. 우린 배달을 안 해줘서 새벽부터 인천 전 지역에서 차 끌고 면을 가지러 와요.” 마지막 국수 상자의 포장이 끝났다. 아침 7시부터 시작한 칼국수 생면 작업을 마치자 11시가 가까웠다. 오후에 건면을 만들기 전까지 한숨을 돌리고, 늦은 아침식사를 한다. 이날 오전에는 그가 운영하는 공장 옆의 식당 주인이 일을 거들었지만 보통 국수를 만드는 일은 혼자의 몫이다. “재래식 국수 만드는 게 얼핏 보면 단조로워 보여도 사람 손이 많이 가요. 자동화가 아니니까 사고의 위험성도 있고요.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면 도움은커녕 걸리적거려요.”

처음부터 국수로 먹고살 생각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료업계에 몸을 담았다. 남부럽지 않던 때였다. “좋은 차 끌고 다니면서 좋은 집에서 잘살았어요.” 하지만 차츰 삶에 회의가 들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미치겠더라고요. 술, 담배는 물론이고, 노름에도 손을 댈 정도였으니까. 망가지고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며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IMF 외환위기를 겪을 무렵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대로 평생을 갈 수는 없다고 느꼈다.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국수를 떠올렸다.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 모든 걸 정리하고 국수공장을 차렸다. 주변에선 이상하게 쳐다봤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국수를 그렇게 많이 먹는다고 젊은 사람이 국수공장을 시작하느냐’며 걱정 어린 시선도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 일을 이어서 맛있는 국수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거래처를 늘리러 다닐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제자리에서 국수만 뽑았다. 용감했지만 무모했다. 처음에는 칼국수 한 포대를 뽑으면 3분의 1 정도만 나갔다. “다음날에는 팔릴까 기다려도 그대로예요. 그럼 버려야 하잖아요. 1년은 엄청 고생했어요.” 그래도 장기 보존을 위한 주정 처리만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원칙 때문이었다. “식약청에서 허가 내준 만큼만 하면 불법이 아니에요. 근데 아버지는 ‘먹는 음식에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조금 힘들더라도 매일 새벽에 나와서 그날 팔 만큼을 새로 만들었다. 진심이 통한 걸까. 단골손님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차츰 식당들에 입소문도 났다. “정직하니까 길이 열리더라고요. 마음이 급해서 원칙을 지키지 않거나 편법을 쓰면 당장은 길이 보이는 거 같지만 아니에요. 내가 나이를 많이 먹진 않았지만 살아온 경험을 보면 그래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말리는 게 아니라 숙성이다”

건면은 소면과 중면 두 가지다. 물을 흡수하는 면의 특성상 중면은 잔치국수에, 가는 소면은 비빔국수에 어울린다. 건면도 칼국수 생면을 뽑는 기계에서 나온다. 이빨을 바꿔 끼우고 굵기를 조절하면 된다. 건면은 특히 말리는 과정이 중요하다. 면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제조 50%, 건조 50%’라고 할 정도다. 건조에도 면을 빼는 과정 못지않은 기술과 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곳의 건조장은 전체 면적의 절반을 차지한다. 전날 만든 소면과 중면이 나무막대에 빼곡히 널려 있었다. 천장에선 선풍기가 돌아갔다.

재래식 국수는 말리는 과정을 통해서도 일반 국수와 맛이 달라진다. 그냥 널어놓는 게 아니다. 밤새 면들을 한 곳으로 오므리고 아침이면 다시 펴놓는다. 이런 과정을 두세 번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재래식 국수가 나온다.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3일이 걸린다. 반면 자동화가 된 곳은 건조장에서 인위적으로 열을 가해 말리는 식이다. “그렇게 건조하면 국수가 금방 푸석하게 말라버려요. 여기선 단순히 말리는 게 아니라 숙성을 시키는 거예요.” 그가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옛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다.

국숫집을 차린 지 13년, 국수를 만든 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는 6개월 전에야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다. ‘부여옛날국수공장’이던 간판도 ‘권오성 손국수’로 바꿨다. 부여가 고유지명이라 상표 등록이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이 찍힌 국수를 선보이고 싶었다. 자부심이었다.

사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의 가족은 국수로 일가를 이뤘다. 아버지의 국숫집을 이어받은 형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제면의 명인으로 나왔고, 여동생도 인천에서 국수공장을 크게 운영하고 있다. 재래식 국수의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국수공장을 차린 사람들도 20명이 넘는다. 하지만 요즘엔 선뜻 알려주지 않는다. 돈 벌어서 공장을 팔거나 없애는 사람이 생기면서였다. 대를 이은 장인 정신을 훼손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고집’이다.

국수 만들던 아버지의 흑백사진

“이제 예쁜 국수 보러 가볼까?” 그가 국수공장 앞에 차려진 판매대로 이끌었다. 소면, 중면뿐만 아니라 여러 빛깔의 면들이 놓여 있었다. 쑥, 메밀, 백년초, 감자, 파프리카, 흑미, 녹차 등 천연 재료로만 만든, 이 집의 자랑 ‘웰빙 국수’다. 2000년대 중반 SBS-TV <슬픔이여 안녕>이란 드라마에 나오면서 유명세를 탔다. 색깔 국수가 알려지면서 너도 나도 색을 입혀서 국수를 팔았다. 하지만 이곳은 단 1%의 색소도 섞지 않는다. 역시 아버지의 원칙 때문이다. “맛도 완전히 다르지. 이 국수는 먹어본 사람들만 찾아와서 먹어요.”

국수를 만들면서 입에 달고 살던 술, 담배도 완전히 끊었다. 주문받아서 면을 뽑고, 말리고, 재단해서 포장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의 반복이지만 하루하루가 즐겁다.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가업을 잇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규모를 늘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원칙을 어겨가며 주정 처리를 해서 대량으로 납품할 필요 없이 혼자서도 너끈히 꾸려갈 수 있는 지금에 만족한다.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게 절대 아니에요. 즐겁게 일하면서 애들 커가는 거 지켜보는 게 행복이지.”

그의 아버지는 58세가 되던 해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며 제면을 그만뒀다. 지금 그의 나이로 치면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힘드니까 애들한테 물려주고 싶지는 않죠. 우리 부모님도 나한테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2대에 걸쳐 60년 전통을 이어온 국수의 맛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그럴 듯한 직함 달고 큰 기업체 이어받으면 좋겠지만 이 일은 그렇지 않잖아요. 소신 없이는 감히 시작하긴 힘들 거예요. 자기들 삶이 있으니까 내가 강요할 수도 없고.” 하지만 먼 훗날 자식들이 국수를 만들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만큼 배웠는데 힘들게 가루 뒤집어쓰면서 뭐 하러 하느냐’는 말은 하지 않을 거란다. 한 번 가면 없는 삶인데 평생 하나만 하는 건 재미없겠다는 생각에서다. 자신이 그래왔듯이 다른 일을 하다가도 마음속 고향과도 같은 국수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방송에 출연하거나 책에 실리는 자료들은 일일이 모아둔다. 나중에 가업을 이으면 좀 쉽게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신 흑백사진이 한 장 있어요.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을 때, 마흔 정도 나이에 국수를 걸던 사진이에요.” 먼 길을 돌아 그는 사진 속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 가업을 100년 전통으로 잇고 싶은 마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국수는 아무나 못 만들어요. …열의가 없으면 할 수 없어요.”
- 만화 <식객> 중에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전날 저녁부터 들어온 주문을 정리하고, 애들을 학교에 보낸 뒤에 국수공장에 들어선다. 오전 내내 면을 뽑아서 물량을 맞추고 12시가 다 되어서야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건면은 면을 뽑고 말린 후에도 자르고 포장해야 하니까 24시간 자체가 일이나 마찬가지예요. 주문량이 많을 때면 죽기 살기로 할 때도 있죠.”

칼국수를 가장 좋아하지만 자주 먹긴 힘들다. 일하다 보면 하루에 많이 먹어야 두 끼다. “다른 일 안 해봤으면 회의를 느꼈을지도 몰라. 나라고 가루 묻히면서 일하는 게 좋기만 하겠어요.(웃음)” 일에는 정직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평온하고,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는 얼굴이 좋아만 보였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국수 맛보고 가야지.” 칼국수 한 상이 차려졌다. 쫄깃한 면발을 씹으며 흑백사진을 떠올렸다. 국수는 후루룩 먹는 게 아니었다. 꼭꼭 씹어 먹는 거였다. 그날 그 국수를 먹고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