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모락 가마솥에서 피어나는 장인의 향기
모락모락 가마솥에서 피어나는 장인의 향기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3.01.0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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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써도 끄떡없는 전통의 뚝심
무쇠 가마솥 100년, 고집 이어나가는 사람들
[삶의 현장] 안성주물 공장

섭씨 1,150도 용광로 속에서 쇠는 녹아 물이 된다. 불길이 일렁이는 쇳물을 받아 틀에 붓고 식히면 어엿하게 모양을 갖춘 솥이 만들어진다. 고체인 금속에 열을 가해 녹이고 겉모양을 잡아주는 형틀에 부어 굳힌 이른바, 주물(鑄物) 방식은 가장 오래된 금속 가공법 중 하나다. 하지만 전통 방식의 주물 기법을 고집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던 시커먼 가마솥이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처럼, 전통 주물 역시 장인들의 고집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전통방식 주물 공장을 찾아

경기도 안성은 주물 제품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안성맞춤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유기는 최고급품으로 이름 높았다. 이곳에 4대 100년 째 무쇠 주물 제품을 고집하는 공장이 있다. 안성시 서운면 양촌리에 자리 잡은 안성주물(대표 김성태)이 바로 그곳이다.

갑자기 싸늘해진 아침 공기 속에 안성주물을 찾았던 날은 마침 쇳물 붓는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김 대표는 “여러 과정의 주물 공정에서 가장 역동적인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운을 떼었다. 예전 한창 경기가 좋았을 때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쇳물을 붓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요즘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쇳물을 붓는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쇠를 녹이는 용광로를 정비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벽돌과 점토로 세워 올린 전통 방식의 용광로는 한 번 쇠를 녹이고 나면 해체했다가 다시 세우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석탄을 연료로 불을 때고 터빈으로 공기를 불어 넣어 온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김성태 대표는 제품의 주원료인 쇠의 품질에 대해서 과대 포장을 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일부 업체에서는 ‘고급 선철’이라고 광고하면서 마치 대단한 고품질의 원료를 쓰는 것처럼 가격을 높여서 책정하기도 하는데, 선철은 그냥 선철일 뿐 별달리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게 없다는 얘기다.

선철은 용광로에 철광석과 코크스, 석회석 등을 넣고 녹여서 만든 것이다. 탄소를 비롯한 5대 원소가 많아서 단단하지만 강한 성질 때문에 깨지기 쉽다. 선철을 다시 제강로에 넣어서 탄소와 불순물을 줄이면 질기고 늘어나는 성질이 더해진 철강 제품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철제품은 단조나 압연 등의 공정이 가능한 강으로 만든 것이고, 선철은 주로 주물 제품을 만드는 데 쓰인다.

안성주물에서 쓰는 선철 역시 포스코나 광양제철소에서 구입한 것이다. 일부 악덕 업자들이 분철이나 고철을 사용해서 제품을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상 원료 차원에서 품질의 차이가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듣기만 해도 심란하지만 분철이나 고철로 만든 제품은 어떻게 다를까? 김 대표는 “쇠 기운이 빠져나간다”라는 표현을 썼다. “왜 옛날 어른들이 ‘적’이 벗겨진다는 표현을 하시잖아요. 불이 닿으면 표면이 껍데기 벗겨지듯이 떨어져 나오는 거지요.” 무쇠 주물로 만드는 제품은 가마솥을 비롯해 대부분 부엌에서 쓰이는 조리 기구이다. 음식을 만드는 데 쇠 찌꺼기가 벗겨져 나오면 당연히 몸에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과대 포장하지도 속이지도 않기

안성주물의 역사는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내수공업이 어엿한 공장으로 커지고 김성태 대표의 부친인 김종훈 옹은 지난 2006년 경기도 무형문화제 제45호로 지정됐다. 현재는 아들인 김 대표가 기능을 전수받고 있다.

100년 가업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것은 단골 고객이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한번 사간 솥은 20년이고 30년이고 계속 쓸 수 있으니 다시 사러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중국산 제품과 절대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중국산 제품은 보통 1, 2년 쓰면 구멍이 뚫리는 경우가 많아요. 무쇠 솥을 흔하게 쓰는 시대가 아니니까 소비자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쓰는 거지요. 제대로 만든 솥이라면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그래서 안타깝게도 꾸준히 우리 제품을 사 주시는 단골손님은 없습니다(웃음). 대신에 그 분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소개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김 대표의 설명이다.

또 한 가지 안성주물의 영업 방침(?)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도매업자에게 납품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에게 직접 주문을 받거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주문을 받는 직거래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이유는 품질관리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제품에 하자가 생기거나 하면 바로바로 A/S를 해 드려야 하잖아요. 우리가 만든 제품에는 안성주물이라는 마크가 새겨져 나가게 되는데, 가끔 공장으로 항의 전화가 와요. 안성주물 제품을 샀는데 금방 솥이 뚫렸다면서요. 그래서 어디서 구입하셨냐고 물어보면, 전부 상표를 도용하는 업자들에게서 산 제품인 거예요. 도매 납품을 안 한다는 원칙을 고집하는 데도 종종 이런 일이 생기는데, 여기저기 납품을 시작하게 되면 일일이 품질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다소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다.

안성주물이 다소 이문을 포기하고서라도 이런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제품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솥이란 제품은 한두 사람만을 위한 물건이 아니다. 누구나가 쓰는 물건이며 우리 생활 속의 일부인 물건인 것이다. 곱게 모셔두고 감상하기 위한 물건도 아니다. 삼시세끼 이글대는 불길을 견뎌내야 하고, 오만 것들을 뒤섞어가며 삶고 찌고 굽고 끓이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00년 가업에 단골이 없다?

쇳물 붓기 작업이 시작됐다. 용해로 주변으로 직원들이 모여든다. 주홍빛으로 달아오른 쇳물이 불꽃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다. 꼬챙이에 진흙덩이를 고깔 모양으로 빚어서 붙여 놓고, 그때그때 쇳물 구멍을 막아가며 작업을 진행한다. 진흙이 일종의 마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쇳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해서 바로 틀에다 붓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온도로 잘 녹았는지 몇 차례씩 확인한다. 펄펄 끓는 쇳물에 온도계를 들이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색과 점도로 적정 온도인지를 가늠한다. 오랜 세월 경험에서 우러난 감이 아니면 짐작하기 어렵다.

무쇠 솥을 만들 때에는 틀 작업과 쇳물 붓기, 길들이기 등 크게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자면 작업과정은 더욱 복잡하다. 거푸집을 만드는 것도 두 번 작업해야 한다. 솥의 겉모양을 찍을 거푸집과 안쪽 모양을 찍을 거푸집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내형 거푸집에는 주물사를 채워 넣어 ‘중자’를 찍어 낸다. 나중에 쇳물을 붓게 되면 외형 거푸집과 중자 사이의 빈틈에 쇳물이 들어차게 되는 것이다. 쇠가 굳으면 흙으로 빚은 중자는 긁어낸다. 솥뚜껑의 경우엔 따로 중자를 만들지 않고 거푸집에 바로 쇳물을 부어 굳힌다.

쇳물을 받은 바가지의 무게는 30kg이다. 겉으로 보기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기술과 요령이 필요한데다가 중노동이다. 보기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은 둘째 치고, 높은 온도의 쇳물을 다루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시도해 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라며 김 대표는 손사래를 친다. 공장 직원들 중에서도 쇳물을 받아 붓는 작업은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이들이 도맡고 있다.

바가지 속에 설설 끓는 쇳물에다가 간간히 흰 모래가루 같은 것들을 뿌린다. 쇠의 찌꺼기, 즉 슬러지를 제거하기 위한 처리를 하는 것이다. 천천히 쇳물을 틀에다 부어가면서 쇠막대로 찌꺼기들을 걷어내는데, ‘똥채’라는 재밌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물 작업은 수분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거푸집이나 주변에 남아 있는 수분이 높은 온도의 쇳물과 닿으면 순간적으로 증발하면서 제품에 기포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 중간 중간 가스토치를 사용해서 불필요한 수분을 날려버려야 한다. 내부에 빈틈이 없이 얼마만큼 균일한 두께로 만들 수 있느냐가 주물 제품의 품질을 좌우한다.

안성주물에서는 솥을 길들이는 과정까지 끝내고서야 완제품으로 출시한다. 무쇠에 참기름을 골고루 먹이고 열을 가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흔히 볼 수 있는 가마솥처럼 새까만 표면에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이렇게 기름을 먹여서 잘 길들인 주물 조리 기구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테플론 코팅 제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고가의 조리 기구라도 오래 사용하다보면 표면의 코팅이 벗겨지면서 수명이 다하기 때문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유행 따라 작고 간편하게 진화

세월이 흐르고 전통가옥들이 점점 없어지면서 듬직한 모습의 무쇠 가마솥 역시 추억 속에나 남는가 싶었다. 그러나 유행이 돌고 도는 것처럼 최근 다시 가마솥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웰빙 바람을 타고 화학물질이 배출되는 세련된 조리 기구보다는 투박하지만 믿음직스런 주물 조리 기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것이다.

김 대표는 “주물 제품의 경우 셀 조직 사이사이로 원적외선이 투과되기 때문에 음식을 익히거나 영양을 보존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다”라고 주물 제품의 강점을 설명했다. 특히 대표적인 무쇠 주물제품인 가마솥의 경우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네 입맛에 가장 최적으로 진화한 물건이라고 한다. 솥 바닥의 중앙 부분이 가장자리보다 두 배 가까이 두껍기 때문에 열전도성이 높고, 무엇보다 솥뚜껑의 무게가 솥 무게의 1/3에 달하기 때문에 압력솥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 인기가 높은 제품은 일반 가정에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3, 4인용 크기의 미니 가마솥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히 호평 받고 있는 주물 프라이팬도 많이 찾는다. 대형 기구에 비해 가격 부담도 낮다. 일반 가정에서 쉽게 쓸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제품들은 4, 5만 원 선에 판매되고 있다. 제품 가격과 관련해서 김 대표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무형문화재가 제작한 제품 판매전에 참여하면 무척이나 쑥스러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장인의 손길을 거친 명품이라고 하면서 보통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 제품들이 주로 전시되고 있는 풍토에 비춰보면 너무 저렴한 제품이라서 홍보용 협찬 상품으로 오해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쓰일 수 있는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 같아요”라고 김 대표는 말한다.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옛날 할머니네 부엌의 가마솥처럼 투박하게 우리네 삶과 엮이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게 보람 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 김종훈 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가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조차 서먹해지는 요즈음, 물건을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사이를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추운 겨울 저녁 뜨끈한 가마솥 밥 향기가 가슴에 들어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