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로라 부활, 체념과 포기 문화의 극복
모토로라 부활, 체념과 포기 문화의 극복
  • 참여와혁신
  • 승인 2006.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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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가던 거대 공룡 반전을 노리다

문 지 원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


 2005년 출시된 모토로라의 ‘레이저 V3(Razr V3)’는 매우 얇고 우아한 디자인의 폴더형 휴대전화로 유럽과 북미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경쟁사인 노키아가 유행을 선도해왔던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레이저 V3’는 2005년 1분기 중 약 120만 대가 판매되었다.

 

가격이 350달러인 레이저 단말기는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그렇게 많은 기능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2005년 1분기 모토로라의 세계시장 점유율(17.1%)을 1.4%p 끌어올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한 레이저의 인기에 힘입어 모토로라의 매출은 1분기에 전년대비 10% 증가했다.

 

노키아라는 시장 1위 기업과 삼성, LG 등 후발기업 사이에 끼여 세계 휴대폰 시장의 2위 자리를 언제 내놓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이 레이저 휴대폰은 모토로라를 기사회생시킨 히트상품으로 강력하게 등장했다.

 

모토로라 부활의 상징, 레이저 V3
이 레이저 휴대폰이 출시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투자가들과 기업 애널리스트들, 그리고 경쟁기업들은 모토로라를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공룡으로 여겼다.

 

그러나 모토로라는 이 레이저 휴대폰 시리즈의 성공을 바탕으로 부활을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속담처럼 우연찮게 나온 제품일까? 아니면 모토로라의 부활을 상징하는 회심의 반격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모토로라가 과거의 1위라는 미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직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제품개발방식의 획기적 변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모든 혁신 작업을 진두지휘한 애드 잰더(Edward J. Zander) CEO의 역할을 빠트릴 수 없다. 그럼 모토로라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승승장구 모토로라, '성공의 함정'에 빠지다
모토로라는 1928년 형제지간인 폴 V. 갤빈과 조셉 E. 갤빈이 설립한 배터리 생산업체인 Galvin Manufacturing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30년 자동차용 라디오를 생산하면서 현재의 기업명인 ‘모토로라’를 브랜드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Motorola는 Motor(Motorcar, Motion)와 Ola(Sound)의 합성어인 셈이다. 이후 무전기 등 무선통신사업 분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해서 지구와 교신 중 사용한 무전기가 모토로라에서 개발한 것이 알려지면서 모토로라는 무선통신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모토로라 임직원들의 가슴 속에는 모토로라가 “우주에서 지구로 통신한 첫 번째 통신기기를 만든 무선통신의 선구자”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후 첨단 무선통신사업에서 최초의 상업용 무선통신 전화기 개발 등 최초라는 단어가 모토로라를 상징하는 수식어로 등장했다. 1996년에는 당시로는 불가능하게만 여겨져 왔던 휴대폰 1kg의 벽을 깬 88그램의 ‘스타택’ 모델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스타택’ 모델은 휴대폰 역사상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모델 이후 모토로라는 그 명성에 걸맞는 제품을 출시하지 못했다. 특히 2000년에서 2003년 동안에 모토로라는 세계 1위 자리를 핀란드의 노키아에게 빼앗겼고 삼성과 LG 등의 맹추격에 2등 자리도 불안한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 시기가 모토로라 기업 역사상 최악의 시기였다. 모토로라는 일등기업이 빠지기 쉬운 ‘성공의 함정’에 걸려버린 것이다.

 

성공의 함정이란 1위 기업이 과거의 성공방식을 고수하고 변화와 혁신을 외면할 때 쉽게 빠져들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다지 급격하게 수익성이 저하되지 않고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서서히 수익성이 약화되고 시장점유율이 줄어들기 때문에 당사자로 봐서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오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특히 성공의 함정에 빠졌을 때 중간관리층은 자리보전에 대한 심리로 축소보고를 하게 되고 최고 경영층은 이 보고를 근거로 모든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점이 더욱 이 함정에서 조기에 빠져나올 수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부활의 전도사, 애드 젠더의 등장
모토로라는 갤빈가에 의해 창업되고 창업자 3대가 CEO로 있던 창업자 가문에 의해 운영되어 온 회사였다. 그러나 더 이상 내부의 힘으로는 난관을 돌파할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외부에서 CEO를 영입하게 된다. 모토로라의 신임 CEO로 낙점을 받은 사람은 중소형 컴퓨터와 네트워크 전문기업인 썬마이크로시스템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역임한 애드 잰더였다.

 

애드 잰더는 2004년 1월 부임한 후 기술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나 신제품 개발력이 미흡한 모토로라의 내부를 세심히 들여다보고 새로운 비전을 공표했다. 그는 기존의 모토로라를 뛰어넘는 ‘아이코닉 디바이스(iconic device)’라고 부르는 제품을 창조하기 위한 일대 변화를 추진했다. 아이코닉 디바이스는 고객이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품으로, 강한 느낌(Feeling), 즉 감흥을 주는 제품을 의미한다. “감흥을 주는 것은 혁신적인 것이다.

 

나는 휴대전화, 셋톱박스, 공공보안시스템, 통신 인프라 장비 등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한다”고 애드 잰더는 전 임직원들에게 역설했다. 이러한 목표는 디자인, 마케팅, 경영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뤄냈기에 레이저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모토로라는 엔지니어들의 비전을 토대로 성장한 기업이었다. 애드 잰더가 취임했을 당시 이미 모토로라는 수년간의 퇴보를 겪고 있었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통신 산업의 침체는 문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아날로그 휴대전화에서 디지털로 전환이 늦어지면서, 모토로라는 세계 휴대전화 판매량 1위 자리를 노키아에게 내주었다. 2001년, 모토로라는 최초로 3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2000년, 40달러 수준이었던 모토로라의 주가는 2003년 초까지 약 7달러 수준으로 하락했다. 따라서 당시 신임 CEO인 애드 잰더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은 체념과 포기의 문화였다.

 

그의 전임자 크리스토퍼 갤빈(창업자의 손자)은 6만 명 이상의 직원을 해고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구조조정은 회사를 나간 인력에게도 아픔을 주지만 남아있는 인력들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더 준다는 사실을 애드 젠더는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애드 잰더는 “직원들에게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만 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전통적 작업 방식과  환경의 변화
그나마 애드 잰더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전임 CEO가 소비자가 열망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어느 정도 수행했다는 점이다. 수십 년 동안 모토로라의 기술진과 디자인팀은 시카고 교외의 척박한 캠퍼스에서 일해야만 했다. 갤빈은 모토로라의 인프라가 최고 수준의 기술진을 끌어들이기에 너무 낡고 척박하다고 판단하여, 모토로라 최고 디자이너의 일부를 시카고 시내,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 타워 내 세련된 사무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이 건물은 밀레니엄 파크와 접하고 있다. 밀레니엄 파크는 애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거대한 은빛 조각 작품이 위치한 곳인데, 이 작품의 외관은 레이저의 메탈릭한 외형과 유사하다. 모토로라의 창조적인 디렉터이자 레이저 디자인팀을 이끈 사람 중 한 명인 폴 피어스(Paul Pierce)는 근무 환경의 변화가 레이저폰 개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는 “놀라움과 발견. 이것이 바로 사용자와 새로운 제품의 열정을 유지시킬 수 있는 핵심 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애드 잰더는 또한 전통을 깨는 디자인 접근 방식을 과감히 도입했다. 과거에는 테스트할 상품에 대해 토의하는 소비자 그룹, 이른바 포커스 그룹이 모토로라 제품의 방향을 구체화했다. 반면, 레이저는 디자인팀이 추천한 리스트를 기초로 디자인되었다. 디자인팀을 이끄는 피어스는 “우리는 나가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레이저는 전형적인 제품 개발 소요기간보다 6개월 단축되었다. 마케팅 비용 절감은 가격 인하로 나타났다. 레이저의 소매가격은 원래 약 500달러 정도로 책정했지만 400달러 이하로 판매해도 경쟁사 대비 수익성이 더욱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애드 잰더는 화합을 중요시하는 모토로라의 문화에 실리콘 밸리의 편집증에 가까운 치밀함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주입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외부인들에게 모토로라의 성공이 식스시그마와 같은 품질관리 프로그램과 연관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고객의 기대심리를 최대화하기 위해 세부적인 레이저의 사양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제품개발 기간 동안 이러한 개념을 공유하고 있는 디자인팀 구성원과 소수 임원진들은 모든 비밀을 엄수하기로 맹세했다. 모토로라는 레이저의 각 부품을 각기 다른 업체에게 하청을 주어, 아무도 최종적인 모습을 가늠할 수 없도록 했다.

 

마케팅 조직에는 효율성보다 창의성을
애드 잰더는 제품개발 기간 중에는 거리를 두고 레이저의 성공을 지원한 반면, 마케팅은 밀착형의 강력한 캠페인을 진행했다. 나이키의 브랜드 캠페인 베테랑인 제프리 프로스트(Geoffrey Frost)를 최고 마케팅 경영자(CMO)로 승진시켰다. 프로스트는 1999년 모토로라에 들어왔을 때, 창의성이 생명인 마케팅 부서가 효율성 증진 프로그램에 과도하게 빠져 있었는데, 이는 식스시그마에 열광했던 전임 CEO 갤빈의 흔적이었다고 회상했다.

 

효율성을 중시하다 보니 그 효과를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마케팅과 프로모션 등은 종종 무시되었고 그 때문에 모토로라의 광고가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프로스트는 “당시 모토로라의 광고 캠페인인 ‘윙(Wings)’은 낯설고 잊히기 쉬운 것이며, 세련되지 못한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는 광고”라고 비판했다.

 

프로스트는 대신 나이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는 “필 나이트(Phil Knight)가 운동화의 표현 방법 이상을 보여준 것은 위대한 혁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이클 조던이 다리를 저으며 공중에 떠있는 사진들은 신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신형 휴대폰 레이저 V3의 스타일리쉬한 ‘모토(Moto)’ 캠페인은 이러한 교훈을 모토로라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모토 캠페인에서 휴대전화는 젊은이의 삶에서 패션과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역할을 했다.

 

잠재된 열정과 재빠른 실행력이 성공 키워드
하나의 괜찮은 휴대전화만으로는 성장을 지속하는 기업을 만들 수 없다. 이는 투자자들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모토로라의 주가는 애드 잰더가 CEO로 부임할 당시인 2004년 1월의 15달러 수준에서 현재는 20달러를 상회하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만 불안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애드 잰더는 ‘레이저 V3’를 시작으로 체념과 포기를 극복한 모토로라를 다시 한 번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야심찬 계획을 준비 중이다. 이 계획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MP3 플레이어 세계 1위인 애플(Apple)사와의 협력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현재 자사가 갖고 있는 장점뿐만 아니라 타사가 갖고 있는 장점까지 능동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애드 잰더의 지론이다. 애드 잰더는 “나는 아직 모토로라를 만족스러울 만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기업 경영에 있어 턴어라운드(Turnaround)의 의미는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는 기업의 회생을 의미한다. 기업의 실적변화를 추적하다 보면 한 번쯤은 실적 그래프가 상승에서 하강으로 그리고 다시 하강에서 상승으로 반전하는 현상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투자가들과 기업 분석가들은 해당 기업을 놓고 실적 회복이 얼마나 빨리 될 수 있나?

 

또는 실적 하락의 끝이 어디쯤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게 된다. 이들의 평가는 시장에서 그 기업을 바라보는 가치(Market Value)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업의 시장가치 또는 실적 그래프의 등락 이면에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당 기업 임직원의 노력과 실책이 엄연히 존재한다.

 

모토로라의 경우 CEO 애드 잰더에 의해 모토로라 임직원들 자신들만 모르고 있었고 과소평가했던 잠재된 열정이 일깨워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해소될 수 있는 방향성과 전략, 그리고 재빠른 실행력이 있었기 때문에 회생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즉 최고 경영층과 임직원의 단합된 힘이 모토로라의 부활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인 셈이다.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기업 실적의 승승장구만을 바랄 수는 없지만 사람이건 기업이건 역경을 이겨 내야만 내성이 생긴다. 외부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성이 높은 내성 강한 기업을 만드는 것이 향후 한국 기업의 과제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