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기억을 걷는 시간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3.05.0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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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집 사이를 가로지른 녹슨 철길과 골목의 풍경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은 멀어져도 놓지 못한 기억
[골목예찬]
인천 숭의동 철길마을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기차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수원으로, 주안으로, 인천항으로 향하던 철길은 끊기고 말았다. 변하는 게 당연했다. 기차를 품지 못한 철길은 더 이상 철길이 아니었다. 녹이 슬고, 잡초가 자라나고, 보도블록으로 메워졌다. 그래도 철길은 여전히 마을을 가로질렀다.

이제는 끊겨버린 세 갈래의 철길

찻길 옆 철망 사이의 쪽문에 들어선다. 양쪽으로 뻗은 철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철길 너머엔 단층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위로 고층 아파트가 우뚝 솟았다. 레일을 가로질러 걷는다. 다섯 걸음의 텃밭과 다섯 걸음의 인도 끝에 있는 집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인천 숭의동 철길마을에는 남부역이 있었다. 서너 갈래로 뻗은 철길은 열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들던 기억을 말했다. 그곳에선 주인선과 축항선이 만났었다. 마을 뒤로 난 철길에서는 수인선이 오갔다. 지금으로 치면 역세권이었다. 다만 철길과 집이 너무 가까웠을 뿐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축항선에서는 지난해 11월까지 화물열차가 다녔다. 마을의 집들 사이로 열차가 오가며 진풍경을 연출하던 노선이다. 인천역과 인천항에서 출발한 열차는 남부역에서 방향을 바꿔 반대로 향했다.

주인선은 1959년 주한미군의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놓였다. 남부역과 주안역 사이를 다녔다. 남부역은 인천항에서 가까웠다. 주변에 미군기지도 있었다. 열차는 주안역에서 경인선에 합류해 미군부대가 있는 부평을 오갔지만 1992년 운행을 멈췄다.

마을 중간에선 남부역의 철길이 수인선과 만난다. 그 사이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다 지난 일이다. 기차는 달리지 않는다. 보도블록과 잡초, 흙이 뒤엉켜 기찻길의 기억을 덮었다. 철길과 철길 사이의 골목은 텅 비었다. 봄바람마저 을씨년스러웠다. 담벼락은 하늘색, 노란색, 하얀색 페인트 옷을 벗고 회색빛 시멘트 속살을 드러냈다. 거기엔 주거환경개선사업 주민총회 공고가 붙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200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용마루 주거환경개선사업은 보상 단계에 접어들었다. 내년부터 공사가 시작돼 2017년이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철길의 끝, 정자에서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과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며 방역하는 보건소 차량이 눈에 띄었지만 주민들은 이미 대부분 이주한 상태였다. ‘3천만 원대로 내집 마련’이라는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골목 끝에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꼬마가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왼팔이 불편한 할머니는 오른팔로 공을 주워 다시 손자에게 던져줬다. 옛 인천야구장 자리가 지척이었다.

그곳에 남은 열차와 사람의 흔적

철길마을은 인천 남구 숭의동과 중구 신흥동에 걸쳐 약 1㎞에 이른다. 지난 가을까지만 해도 다니던 화물열차 철길은 중간에 끊겼다.그 자리에선 새로 연결되는 수인선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장을 지나 교차로를 건너면 신흥동의 철길이 이어진다. ‘공사 중 우회하시오’라고 적힌 안내판을 뒤로 하고 다시 철길 위로 올랐다. 좌우로 늘어선 보신탕집들이 낯선 발걸음을 맞는다. 단층집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길이라기보다는 틈이란 말이 더 어울릴 만한 공간이다. 텃밭과 화분에선 대파와 상추가 자라고, 손바닥만 한 생선들은 빨래집게에 걸려 햇볕을 쬔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철길마을의 끝은 수인곡물시장이다. 기름집에서 흘러나온 고소한 냄새가 길가에 번진다. 전국 유일의 곡물시장으로 알려지며 성업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의 종점, 남인천역이 바로 옆이었다. 기차를 타고 인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곡물을 사고팔면서 시장의 모습을 갖췄다. 1973년에 남인천역 구간이 폐지된 후에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이 지역이 점차 구도심으로 밀려나면서 발길이 뜸해졌다. 예전의 활기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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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고, 끊기고, 초라해졌지만 철길은 철길이고 싶었다. 길게 꼬리를 문 열차와 사람들의 부산한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얼마 후면 사라질 철길은 여전히 기억을 붙잡았다. 보낼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익숙한 흔적 안에 살았다. 아직 이별하기엔 일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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