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3.08.0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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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세상 떠난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사회적 연대 바탕으로 영화 만들다
[기획인터뷰 3] 김태윤 <또 하나의 가족> 감독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던 중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황유미 씨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딸의 억울한 죽음의 이면을 밝히기 위해 대기업과 공권력을 상대로 긴 싸움을 시작한다. 지금도 진행 중인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영화는 완성되었고, 지금 마무리 작업 중이다. 이 영화를 통해 김태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김태윤 감독은 어려서부터 영화나 문학작품들을 즐겨 봤다. 좋아하는 감독은 폴 토마스 앤더슨과 켄 로치 감독이다. 그도 대학을 나와 남들처럼 취직하려 애쓴 적이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전했다. 그때부터 원하는 삶에 대한 설계도를 그렸고 28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했다. 2006년 이선균, 김수로 주연의 <잔혹한 출근>을 연출했고 지금은 <또 하나의 가족> 개봉을 앞두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영화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 없다

삼성 백혈병 문제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일단 백혈병 관련 이야기는 기사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2007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씨의 산업재해신청을 근로복지공단은 불승인했다.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2011년 6월 23일 1차 공판이 있었다. 승소 소식을 듣고 나서 취재를 시작했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 인권 모임)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에게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고, 황상기 아버님의 연락처를 받아 속초에서 만났다.

별다른 계기나 의무감, 사회적인 분노 이런 것에서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운동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다.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거창한 의미를 추가하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의미를 둘까 많은 생각을 했는데, 결론은 이야기 자체가 감동스럽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하면서 황상기 아버님의 기사와 그 동안 싸워온 과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분노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겼다. 이번 영화는 그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거 같다.

취재를 하면서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 사랑하는 딸을 택시 안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슬픔, 대기업을 상대로 한 길고 힘든 재판에서 승소하는 부분.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큰 영감을 얻은 부분이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갈등이나 고민은 없었나?

“처음에는 고민 많이 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데 누가 투자를 하겠냐, 영화제작을 시작해도 완성하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사실은 없는 거다.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극화된 영화를 만드는 데 소재의 제한이 있는 건 말이 안 된다.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일 년 정도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제안했는데 그 분들이 선뜻 나셔주셨다. 덕분에 영화 제작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팩트에 근거해도 영화는 허구

영화에서 김태윤 감독만이 삼성 백혈병 문제에 대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려운 질문인 거 같다. 희정 작가님 책(<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도 진짜 재미있게 읽었고, 굉장히 치밀하게 취재하신 것 같았다. 여러 책이나 만화책에서 영감을 얻은 부분도 있고, 만화 그리신 분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결국은 그 차이인 거 같다. 그 만화나 르포들은 극화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분들처럼 치밀한 취재를 하거나 인터뷰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영화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극화의 과정이 기승전결을 이루고 클라이맥스를 만든다. 극화라는 것은 팩트를 가지고 거짓말도 해야 하고 가공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은 그 분들이 할 수 없는 부분 같다.”

<또 하나의 가족>처럼 기업을 다룬 이런 영화는 없었나?

“<에린 브로코비치>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의 대기업에서 중금속이 유출돼 주민들이 암에 걸렸다. 변호사 사무실에 일하는 여주인공이 주민들과 합심하여 대기업에 소송을 걸고 승리하는 이야기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도움을 얻고자 그 영화를 다시 봤는데 내가 예전에 본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다. 마을 주민들은 내 아들 딸은 이미 죽었으니 합의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한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소송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설득했고, 결국은 대기업과의 합의로 이 영화는 끝난다. 내가 만들 영화와 가야 할 길이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사실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를 극화해야 하는지 고민은 없었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사회고발성 영화라는 주제 하에 많은 영화들이 나왔는데, 몇 작품 빼고는 작품성이 좋지 않았다. 나는 절대 그 분들에게(삼성 반도체 관련된 노동자들)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또 하나의 가족>은 극화된 영화이고 영화는 허구이다. 아무리 팩트가 있다고 해도 그 팩트를 영화 속에서 진실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황상기 아버님이 거쳐 온 과정은 사실이지만, 극화를 하다보면 실제와 어긋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가 나오면 어디까지가 사실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실 거 같다. ‘영화는 허구’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황상기 아버님이 ‘딸을 택시 안에서 보냈다’는 부분은 사실이니 팩트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 전체가 팩트는 아니다.”

▲ 김태윤 감독(사진 가운데)이 촬영도중 배우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영화 찍으며 스태프 변했다

‘제작두레’는 사회적 의미나 가치를 담고 있지만 투자나 제작이 어려운 영화들을 후원하는 단체이다. 2013년 7월 23일 현재 4,280명이 145,270,000원을 후원하고 있다.

영화 제작을 위해 제작두레에 참여했다. 제작비, 사회적 환경 등의 문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했거나 아쉬움으로 남는 게 있나?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제작비 문제가 가장 컸다.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좋은 배우들, 스태프들과 일을 했고 영화 작품성에 대해서도 만족한다. 박철민 씨나 다른 배우들도 시나리오가 좋아서 하게 됐다고 말한다. 삼성 관련된 이야기라서 더 고민했을 거 같다.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그 분들의 용기는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왔다고 본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좋은 스태프들이 도와줬다. 단순히 시나리오가 좋아서는 아닐 거다. 영화 배경이 되는 사건의 무게감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스태프들이 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변했다. 충무로의 촬영현장은 굉장히 힘들다. 짜증과 신경질, 몸에 밴 피로감이 굉장히 많은데 촬영감독, 다른 스태프들도 이 현장에서는 화 내지 말자는 생각을 한 거 같다. 스태프들도 다 노동자들이다. 노동조합, 노동자의 인권에 관련된 영화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걱정과 달리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다.

10억 원 정도의 제작비가 들었다. 과연 이 영화를 완성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우리 같은 경우는 언론에 크게 발표된 적도 없고 영화 <26년>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투자하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돈이 모였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영화가 완성되면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고 수입도 생길 것이다. 제작비가 부족하다고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 영화 만드는 건 모순인 거 같다. 이게 이 영화를 만드는 자세이고 방법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흥행만 강조하면 불행해져

개봉 예정일과 기대하는 관객 수가 궁금하다.

“이 영화를 감상하고 평가하고 것은 대중들의 몫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지 예상할 수는 없다. 근데 이 영화를 만들면서 바뀐 게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내 자신이다. 과거에 노동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참여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이 영화를 하면서 내가 가야할 길을 찾은 느낌이다.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은 내 자신이 아닐까 싶다.

촬영은 끝났고 편집도 거의 끝났다. 음악작업과 색 보정작업을 하고 있다. 아직 개봉일자는 잡히지 않았지만 아마 10월 중순 이후 아니면 12월 초반으로 예상한다. 제작에 도움을 주신 분들도 많으니 시사회는 많이 할 거다.

요즘 영화계에서 너무 흥행만 강조하다보니 다들 불행해 보인다. 지금은 통합전산망이 있어서 매일 몇 명의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흥행만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 감독들이 매몰되기 시작하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불행해지는 거 같다. 나도 이 영화를 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백만 명만 들어도 좋다. 요즘 사람들은 천만이라는 말 때문에 숫자에 대한 감각이 없다. 상암동 축구경기장 수용인원이 5만 명이다. 그 경기장을 열 번 채워야 50만 명이 된다. 사실 50만 명도 굉장히 큰 숫자이다. 만약 백만 명의 사람들이 우리가 만든 영화를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은 집이나 회사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영화를 만드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김태윤 감독은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을 통해서 확실히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다. 제작에 도움을 준 사람들,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앞으로 만날 관객들까지.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이 가진 진정한 힘은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