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 절대로 무시하면 안 돼”
“젊은 사람들 절대로 무시하면 안 돼”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3.08.0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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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동안 한 자리 지킨 국어학도의 헌책방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을 때 의미가 있다”
[사람향기] 장세철 ‘고려당서점’ 대표

대전시 원동 42-1번지. 중앙시장 들목에 쌓인 헌책 더미가 발길을 이끌었다. 6평의 작은 공간. 5만여 권에 이르는 책들은 서점 주인마저도 길거리로 내몰았다. 들어가는 문은 책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에는 책을 거리에 펼쳐놓지만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에 처마 밑에 몰아놓았다고 했다. 정작 서점 안은 구경도 못 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세월이 바꾼 헌책방 풍경

“이 책 얼마예요?”
“투 따우전드 원.”

장세철 ‘고려당서점’ 대표(79)는 책 뭉치를 의자 삼아 앉아 있었다. 오가는 이웃들의 안부를 묻다가도 손님이 와서 책을 찾으면 곧장 본업으로 돌아간다.

“포토샵 ○○ 책? 그건 옆집으로 가보세요.”

제목만 대도 곧장 답이 나온다. 굳이 서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헌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찾는 책이 있다. “무슨 책?” 하고 물어보면 그만이다.

어느새 45년이 됐다.

“중앙시장이 아마 50년대 중반에 생겨났을 거야. 그때는 신간을 다루는 ‘원동서점’ 하나만 있었어.”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장세철 대표가 고려당서점을 시작할 무렵부터 중앙시장에 헌책방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제일 오래된 서점이 ‘박문서림’이고, 그 다음에 우리, 저쪽에 청양서점. 김 씨 저기 앉아 있구먼.”

근방만 해도 헌책방이 아직 열한 군데나 남아 있다. 대부분 30~40년씩은 족히 된 집들이다.

손님 수가 예전 같진 않다. 유독 학생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한때는 교과서만 팔아도 장사가 됐다. 모자라면 인천까지 가서 책들을 가져오기도 했다. 전국의 학생들이 모두 국정 교과서로 공부하던 때였다. 지금은 출판사별로 교과서를 따로 낸다.

“지금은 책이 완전히 바뀌어가지고 말여. 교과서를 갖다 놔도 매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종류가 많아 귀찮다고. 교과서를 취급하는 데가 몇 안 돼. 그리고 요새 학생들은 시간이 없어서 여까지 안 와.”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매상이 오르진 않는다. 푼돈에 팔리는 책들이 많아서다. 고서를 연구하는 이들은 꾸준히 온다. 헌책이라고 해서 다 같은 헌책은 아니다. 희귀한 고서들은 제법 가격이 나간다. 특히 문학이 그렇다.

“이과 계통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바뀌잖애. 요즘에는 컴퓨터 나오고 뭐 나오고 하니까 책이 자꾸 바뀌고. 그런데 문학 같은 것은 안 그래. 사상은 안 바뀌거든. 헤겔의 변증법만 봐도 그렇잖아.”

똑같은 시집이라도 해방 전후에 나온 책들은 굉장히 비싸다. 월북작가의 초판본은 10~20만 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그 책들이 귀햐. 근데 재판본은 한 권에 천 원밖에 안 해.”

그래서 책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눈이 중요하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싸구려로 팔기도 한다. 장세철 대표가 책의 가치를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흑백의 시대, 컬러의 노점

처음에는 생활비를 벌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동생들까지 챙기자니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농촌에서 올라와 학교 다니려면 어려웠어. 아르바이트 하다 보니 학교생활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동생들이 향학에 불탔으니까 말이여.”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책들로 노점을 열었다. 당시 원동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담벼락을 따라 고서를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자본이 없으니까 조그만 자리 하나 빌렸지.”

마침 대전고, 대전여고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흑백의 시대였다. 컬러로 된 잡지는 큰 구경거리였다.

“<타임>지나 <뉴스위크> 이런 거 있잖여. 그때는 컬러로 된 인쇄물이 거의 없었어. 어찌나 많이 오던지, 길가에 펼쳐 놓으면 하루에 서너 박스가 나가더라고.”

그만큼 벌이가 좋았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과 본격적으로 책을 팔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이 있을 때는 동생들에게 맡기고, 틈틈이 미군 부대를 돌며 책을 구하러 다녔다.

그에게 책은 남다른 존재다. 장세철 대표는 1958년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책이 귀하던 때였지만 도서관을 다니며 원 없이 봤다. 전공 공부를 위해 고서들도 적잖이 봤다. 교수들은 “이 책은 시골에 있는 너희들 집을 팔아도 충당 못 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연스레 책의 가치가 마음속에서 커졌다.

“그래서 이걸 하는 거여. 국어를 공부했고 적성에 맞으니까. 학생들 가르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흥미 갖고 하는 거지. 아마 내가 다른 전공을 택했으면 이걸 하지 않았을 거라(웃음).”

군대에서 전역하고 돌아오니 노점을 하던 자리는 이미 철거되고 없었다. 학교를 졸업했지만 생활이 여의치 않았다. 예전처럼 다시 책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했을 때의 노하우가 도화선이 됐다. 중앙서점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아예 서점을 열었다. 어엿하게 간판도 달았다.

“혼자서 학교생활 했으면 지낼 만했을 거야. 동생들 뒷바라지로 시작해서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 온 거지. 그래도 나는 닳게 생각지를 안 혀. 동생들도 인자 잘 풀려서 잘사니까. 동생 중 하나는 대전에서 손꼽힐 만큼 큰 서점을 하고 있어.”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책은 읽혀야 의미가 있어”

국어를 전공한 덕분에 고서를 보는 안목도 생겼다. 골동상들이 가져오는 책들 중에도 ‘흙 속의 진주’가 있기 마련이다. 희귀한 책은 단번에 눈에 띈다. ‘이거다’ 싶은 책들은 한쪽에 따로 빼놓는다.

장세철 대표는 대학생 시절부터 서지학에 관심이 많았다.

“금속활자 발달사 같은 거 있잖애. 내가 그런 걸 많이 봤거든. 문헌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책들이 많잖애.”

고서를 보고 목판본인지, 활자본인지 구별하려면 서지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전공을 깊숙이 공부하다 보면 버릴 것이 없잖애.”

그의 소문난 안목 덕분에 희귀한 고서를 수집하러 서울에서도 온다.

고려당서점에는 자료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다. 지역 연구자들에게 필요하다 싶은 책들을 있으면 따로 모아놓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와서 책들을 사가고 교환하기도 한다. 대학교 선후배들한테 제공한 자료도 많다.

“예를 들면 고대소설은 이본이 꼭 있어. 그러니까 하나만 볼 수는 없잖애. 논문을 쓰려면 여러 책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연구를 해야지. 한 사람이 책들을 한꺼번에 구하기 힘드니까 나한테 부탁해. 그러면 리스트를 갖고 서울, 대구, 인천 같은 데를 돌아다니면서 구해주는 거여.”

초판본처럼 귀한 책을 발굴한 적도 적지 않지만 일부러 소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뭐햐. 학생들한테 보여주고 ‘이것은 이렇게 돼서 금속활자다’ 하고 가르쳐줘야지.”

장세철 대표는 책이 많은 사람들한테 읽혔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고 믿는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책이 많지만 값이 나갈 만한 건 별로 없다. 역사적인 자료가 되는 책들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학자들에게 연락을 돌리기 때문이다. ‘이런 책 있으니까 필요하면 오라’고 하면 금세 동나기 일쑤다.

다른 지역에서도 ‘책이 있냐’고 물어보는 전화가 온다.

“저번에 김홍신이 쓴 <인간시장> 1~2부를 찾는 전화가 왔더라고. 그 사람이 서울 청계천에 연락하니까 옛날 것이 없더래. 그래서 우리 집에 스무 권 있다고 하니까 아주 좋아하더라고. 얼마냐고 물어보길래 천 원씩만 내라고 그랬어. 얼마나 고마워(웃음).”

사실 쌓여 있는 책들 중에는 팔리지 않을 만한 것들도 많다. 그래도 차곡차곡 묶어서 보관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시골에는 책들이 없잖애. 그래서 달라고 연락이 오면 1000부, 2000부 그냥 줘. 성당이나 교회 같은 데도 그렇고.”

돈이 부족한 손님에게는 책을 그냥 줄 때도 있다. 나중에 돈 생기면 가져오라고만 한다. 그렇게 돌아간 손님들은 시간이 지나면 돈을 들고 꼭 찾아온다. 그러면 그도 고마운 마음에 다시 책을 선물로 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고려당서점 하신 분이죠?”

한번은 장세철 대표가 청계천에 갔을 때였다. 중년의 여성이 말을 걸었다.

“아저씨, 대전에서 고려당서점 하신 분이죠?”

대전여고를 다녔을 때 고려당서점을 찾았던 손님이었다. 그녀는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장세철 대표를 한눈에 딱 알아봤다고 했다.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어. 꽤 오래 전 일인데, 나를 기억해주는 게 정말로 고맙더라고.”

고시를 준비하던 사람들도 많이 왔다. 대부분 생계가 빠듯한 이들이었다. 돈 안 받고 수험서를 건넨 적도 제법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 내가 어려웠을 때 생각하면 이 책들을 다 줘도 서운하지 않아. 그래서 나중에라도 필요한 사람 있으면 줄 생각이여.”

지금은 구청에서 일하는 사람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를 떠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적도 있다.

“돈 없고 명예가 없다고 젊은 사람들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돼.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도 돈이 없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결혼하겠나’ 하잖애. 내가 절실히 느낀 바가 있는데 항상 돈이 없는 건 아냐. 늙은 거지는 몰라도 젊은 거지한테는 그러면 안 돼(웃음). 정말이야. 뼈저리게 느껴.”

그의 젊은 시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지 중에 상거지였는데 뭐. 밥을 제대로 먹어, 뭘 혀.”

밤이 되면 매일같이 동생들과 식당에 가서 남은 밥을 얻어먹었다. 반찬들도 적잖이 타왔다.

“자취한다고 하니까 아주머니들이 막 주는 거여. 자식들 같으니까.”

대전이 장세철 대표의 고향은 아니다. 고등학교까지 전북 부안에서 나왔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대전으로 왔다.

“나는 대전 시민들에게 고마움을 느껴. 없이만 살던 내가 학교 다니고, 먹고살았으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제2의 고향인 셈이지. 대전 시민들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 수가 없었어.”

아르바이트에서 종신제로

그는 일의 첫 번째 조건으로 적성을 꼽는다. 반세기 동안 책을 만지고 살아오며 내린 결론이다.

“내가 국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거여. 그렇지 않으면 못했을 거여.”

6평 남짓한 공간이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고, 가족들의 삶을 책임져줬다. 선후배들의 연구를 돕고, 고학생들에겐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도록 해줬다.

“그래서 나는 기쁨을 생각해. 이런 업을 가져서 굉장히 기쁘고 고맙다고.”

생활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헌책방이 일생의 보람이 됐다.

그는 슬하에 딸 셋, 아들 하나를 뒀다. 딸들은 모두 선생님이고, 토목공학을 전공한 아들은 베트남의 건설 현장에 나가 있다.

“자식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저희들 기르시느라 아버지 고생 많이 하셨으니까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겠느냐’면서. 지금 내 나이에 적성에 맞는 일이 이건데 그만두면 내가 뭘 하겄어.”

경로당도, 도서관도 내키지 않는다.

“내가 그랬지. 이건 정년도 없고, 퇴출되는 것도 아니니까 건강을 유지하는 한 계속하겠다고. 종신제로 하겠다고 했어.(웃음)”

그에겐 반평생 넘는 시간을 보낸 책방이 어느 곳보다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다만 공간이 좁은 걸 안타깝게 여긴다. 손님이 오면 편안하게 둘러보도록 맞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다. 시장 상인들이 공동으로 쓰는 2층 공간에 마련한 창고도 꽉 찬 지 오래다.

“전집이나 족보처럼 권수가 많은 것은 점포에 비치를 못하잖애.”

그를 따라 오른 2층은 복도마저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영어로 할 거 같으면, 저스트 모먼트 플리즈.”

장세철 대표가 가게 앞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두 권의 책을 꺼냈다.

“중국 갈 일 없나? 이 사람이 중국에 가서 쓴 책이야. 내가 읽어봤는데 나중에 중국 가게 되면 한번 읽어봐. 그리고 이건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에 대한 얘기야.”

두 손으로 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