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이 인정하는 BEST가 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 BEST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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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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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위원장에서 영업본부장이 되기까지

소아마비 장애를 넘어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행진

신한은행 전병학 영업본부장

 

“학창시절 당시 잘 나가던 은행원이 장래희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살에 장래희망을 이뤘죠. 장래희망에는 도달했지만 아직 해 보지 않은 일도, 부족한 점도 너무나 많은 제 자신이 여전히 불만족스럽더라고요. 그래서 20살에 다시 3가지 꿈을 키웠습니다. 첫째, 대학교에서 남은 공부를 마치겠다는 것과 둘째로 폭넓게 친구를 사귀어 보자는 것, 그리고 셋째는 남들 앞에서 앞장서는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죠. 어린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절뚝거리는 다리를 창피해 하던 것이 어느새 아주 내성적인 성격으로 굳어져 있더라고요. 그런 제 자신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런 저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지난 4월 1일 출범한 통합신한은행의 영업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병학 본부장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87년부터 89년까지 조흥은행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다는 것.

 

#1. 꿈을 위해 성격을 바꾸다
학창시절 그는 장애 때문에 남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친구도 많지 않았고, 소아마비를 앓은 다리를 보여주기 싫어 친한 친구와도 함께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20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그런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을 바꿔보기로 뜻을 세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이 군대에서 휴가 나와 찾아오면 술과 밥을 대접했으며, 입행 첫 야유회 때는 레크리에이션 책 2권을 외워 난생 처음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 결과, 지금 그는 어느 누구보다 친구가 많고,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됐다. 그가 결혼식 사회를 봐준 사람만도 200명이 넘을 정도.


노동조합 위원장도 그러한 젊은 날의 노력들이 밑바탕이 되고, 남들 앞에서 리더가 되어 보겠다는 마음이 합해졌기에 가능했다고 전 본부장은 말한다.
 
#2. 비 맞으며 은행장을 기다리다
전 본부장이 노조위원장을 하던 1987년~89년은 그야말로 한국노동운동의 격동기였다. 더구나 조흥은행은 당시 6개 시중은행 중 산업은행과 더불어 형편이 가장 좋지 않았다.


전 본부장은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모든 부분을 오픈했고, 함께 고민해서 조합원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냈다. 그는 작은 일이라도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라 판단되면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풀어냈다. 한번은 여직원에 관한 조그마한 안건 하나를 풀기 위해 은행장 집 앞에서 4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좌절도 있었다. 위원장 임기를 불과 몇 달 앞두고 이뤄진 임금협상에서 약 20% 인상에 노사가 합의했음에도 찬반투표 결과 조흥은행과 산업은행을 제외한 은행에서 부결되어 합의는 원천무효가 되고, 결국 정부의 개입으로 9.9% 인상에 강제로 합의해야만 했다.


“복직을 하면서 정말 한때는 죽고 싶었습니다. 창피해서 직원들을 볼 수 없더라고요. 그때는 더 이상 은행을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그만 두려고도 했어요.”

 

#3. 노조위원장에서 다시 영업현장으로
수석부위원장으로 2년, 위원장으로 2년을 지내고 전 본부장은 노동조합을 떠났다. 임기를 마친 후 4년을 기업분석부에서 4급 조사역으로 근무했다. 상급승진 할 때가 다 되어가자 영업점으로 갈 것이냐, 기업분석부의 전공을 살릴 것이냐는 기로에 서서 전 본부장은 고민했다.


“그땐 9년 정도 영업점을 비웠기에 ‘노조위원장까지 지낸 사람이 저런 것도 못 해’란 말을 듣는 게 가장 두려웠죠. 하지만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영업점을 떠난 직원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백이 더 늘어나는 것일 뿐이죠.”


전 본부장은 매를 먼저 맞기로 하고 자청해서 영업점으로 돌아가 대부, 당좌, 외환파트를 두루 살펴본 뒤 차장으로 승진했다.
문제를 피해 돌아가지 않고 정면승부를 했던 그때의 선택은 전 본부장의 현재에  큰 밑바탕이 됐다.


#4. 내부고객을 모시는 사람
현재 전 본부장은 36개 지점을 책임지고 있다. 8000명의 조합원을 대표로서 이끈 경험이 있지만 사람을 이끄는 일은 시간이 가고 더 알수록 더 어렵고 힘들다고 한다.


“고객서비스는 시킨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고객이 만족해야만 그 만족이 승화해서 외부고객도 만족시킬 수 있는 거죠. 선후를 택해야 한다면 내부고객만족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본부장은 자신의 역할은 ‘관리자’나 ‘조언자’가 아닌 36개 지점의 직원들을 ‘모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소속직원들을 잘 모셔서 자신이 지점에 방문했을 때 직원들이 항상 따뜻하게 반겨주고, 저 밑에 있는 직원들 마음에까지 ‘우리’라는 개념이 투입되도록 하고 싶은 것이 그의 현재 꿈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서슴없이 물어본다. 어떤 본부장을 원하느냐고.


직원들을 잘 모시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의사소통.
그래서 그는 직급별로 소모임을 운영 중이며, ‘호프데이’ 등의 행사를 통해 전체 소속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를 자주 만든다. 조흥은행과 신한은행 구성원들 간의 스킨십을 높여 두 조직의 감성통합에 일조하려는 것이다.

 

#5. ‘노조위원장 출신’ 꼬리표는 중요하지 않다
전 본부장에겐 늘 ‘노조위원장’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노조위원장으로 지낸 시간들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인드를 심어줬고, 꼭 해야 하는 일은 끈을 놓지 말라는 근성을 길러줘 전 본부장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하지만 그 꼬리표는 살아가는 데 마이너스가 될 때가 더 많았다. 잘못하면 “노조위원장 출신이 저러냐”는 비난을, 잘하면 “노조출신이라 특혜를 본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그는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박수를 받을 수는 없다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면,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서 박수를 받을 수 있으면 된다고.
과거 성공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늘 처음 같은 마음으로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경쾌한 행진곡에 맞춰 지금도 행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