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 일그러진 마음
전화기 너머 일그러진 마음
  • 김현정 기자
  • 승인 2013.12.0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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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대기업 콜센터 근로감독 실시
감정노동자 정신적·신체적 건강 보호 방안 필요
[분석1] 대기업 콜센터 근로감독

ⓒ 참여와혁신 포토DB
“하루 종일 불만 가득한 전화를 상대해야 돼요.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사람도 있고, 진짜 진이 빠지는 일이에요. 솔직히 이 일이 다른 일보다 시급이 높으니까 하긴 하는데, 오래 할 일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저야 아르바이트니까 그렇다 쳐도 콜센터 정규직이라면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야 되겠던데요?”

카드사 고객 상담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유진(가명) 씨의 이야기다. 콜센터에서 감정노동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친절응대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마음은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전부터 지적된 콜센터의 감정노동 현실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근로감독을 실시했다.

대기업 콜센터는 조사했다지만

고용노동부는 지난 11월 4일부터 15일까지 대기업 콜센터에 대한 사업장 감독과 직무스트레스 예방관리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SK텔레콤과 KT등 통신분야와 대기업 자회사와 협력업체를 포함한 30곳에 대해 조사가 실시됐고, 상담원의 근로조건과 고충처리를 집중 점검했다.

고용노동부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노동관계법 위반 여부와 직무스트레스 예방관리 실태다. 노동관계법 준수와 관련해서는 ▲ 근로조건 명시 여부 ▲ 최저임금 준수여부 ▲ 금품 미지급 여부 ▲ 근로시간 및 휴일 휴게시간 준수여부 ▲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여부 ▲ 노사협의회 및 고충처리위원회 운영사항 등을 감독했다.

직무스트레스에 의한 건강장해 예방조치 실태조사를 위해서는 ▲ 충분한 휴식시간 제공 여부 ▲ 직무 자율성 부여 여부 ▲ 의사소통 창구 운영 여부 ▲ 합리적인 업무평가 여부 ▲ 언어폭력에 대한 대응체계 운영여부 ▲ 직무스트레스 극복을 위한 근로자지원 프로그램(EAP) 운영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번 사업장감독과 실태조사는 “대기업 콜센터 종사자의 근로조건을 보호하고 직무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개선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사업장감독 및 실태조사 결과에 따라 필요 시 유사한 사업장에 대한 집중감독 및 제도개선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수호 고용노동부 근로개선정책과 감독관은 “여러 분야와 지역에 걸쳐 대기업 중심으로 조사를 했는데 아직 결과 분석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서 노동관계법 위반 여부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국정감사시기에 한명숙 의원이 지적한 사실을 배경으로 근로감독이 이루어진 만큼 앞으로 더 철저한 분석과 조사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욕설·폭언에서 물리적 폭행까지

고용노동부가 대기업 콜센터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한 배경에는 지난 10월의 국정감사가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명숙 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14일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앞서 ‘민간·공공 서비스산업 감정노동 종사자 건강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콜센터, 백화점, 간호사, 카지노 딜러 등 감정노동직군 2,259명을 대상으로 약 한 달간의 기간을 두고 이뤄졌다. 조사에는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감정노동 문제해결을 위한 전국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조사 결과 감정노동직군 노동자 중 80.6%가 ‘지난 1년 사이 업무 중 고객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87.6%는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으며, ‘욕설 등 폭언을 들었다’고 답한 응답자도 81.1%에 달했다. 심지어 고객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응답한 노동자도 11.8%를 기록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한명숙 의원은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보통 주 5일 근무일 경우 인격무시 발언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듣게 되고, 고객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나 욕설 폭언은 3일에 한 번 듣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또 한 달에 두 번은 직접 폭행을 당하며 1주일에 한 번은 성희롱 또는 불필요한 신체접촉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주체는 없다. 조사 결과만을 놓고 보면 기업은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노동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고객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을 때 기업이 어떤 대책을 내놓았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23%만이 ‘휴식시간을 받았다’고 답했다. ‘심리상담’과 ‘병원상담’을 제공받은 노동자는 각각 5.7%, 4.9%에 머물렀다.

심지어 노동자 개인의 권리인 병가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아플 때 병가를 쓸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고 답한 노동자는 5%에 불과했다. 반면 ‘눈치가 보여 병가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32%였다.

수치만 살펴봐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감정노동직군 종사자들은 “고객으로부터 고도의 스트레스나 폭력이 발생할 때 회피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 과도한 업무량 감축 ▲ 기업의 강압적 친절 요구 근절 ▲ 충분한 휴게시간 보장 ▲ 위협에 대한 관리자의 적극적 방어 등을 요구했다.
한명숙 의원은 “억지웃음을 강요받는 서비스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정확히 살펴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조사”라며 “정부는 대대적인 실태조사에 나서 일회성이 아닌 실질적 종합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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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감정노동자


콜센터 노동자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직종의 노동자들이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한상근 선임연구위원이 발표한 「감정노동의 직업별 실태」에 따르면, 감정노동을 많이 수행하는 직업 30선에는 콜센터 상담 노동자를 포함해 다양한 직업들이 올라 있다.

이 자료를 보면 음식서비스 관련직을 포함해 영업 및 판매, 미용, 숙박, 여행 관련 분야도 상당한 수준의 감정노동 수행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통계적으로는 남성보다 여성이, 30대 이하의 연령대가 감정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학력으로 보면 전문대 졸업자와 고등학교 졸업자가 가장 많다.

직장 유형별로는 공공기관보다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감정노동을 더 많이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민간 기업이 시장에서 직접 소비자를 상대하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감정노동은 대인관계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과 관련이 많으며, 감정노동을 많이 수행하는 직업일수록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고 업무 자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감정노동이 특정한 직종에 요구되는 특별한 형태의 노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을 대할 일이 있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감정노동을 경험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그러진 마음을 숨기고 웃는 낯으로 일하는 것이 서비스업 종사자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갑과 을의 관계와 흡사하다. 고객이 원하는 언행과 표정만이 허용되기 때문에 감정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마음까지도 제약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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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정노동을 장기적으로 수행한 근로자들 중 상당수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을 비롯한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질병에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향후 감정노동이 요구되는 산업은 더 성장할 전망이다. 소득의 증가로 면대면 서비스를 선호하는 소비계층이 늘어나 더 세심한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일자리 창출 및 일자리 성장 변수와 감정노동은 정적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어, 감정노동 수행 일자리가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산업 구조에서 감정노동자는 그 비중이 더욱 늘어날 것이고, 감정노동이 야기하는 문제들도 사회문제화 될 소지가 많다. 감정노동을 산업재해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는 입법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심각성, 해결방안이 필요하다

감정노동 법제화에 대한 움직임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에서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감정노동 입법화를 위한 국회 차원의 움직임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한명숙 민주당 의원은 지난 5월 24일 감정노동자 보호 내용을 담은 산업안전보건법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입법발의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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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직 획기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발의된 법률도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경옥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제화를 우리의 중점 과제로 놓고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서비스연맹은 감정노동 수기공모, 치유 프로그램, 공청회 등을 통해서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콜센터가 현존하는 노동관계법을 제대로 준수했는지 여부도 매우 중요하지만, 감정노동자들을 더 견고한 법의 보호 아래 놓이도록 만드는 일도 시급하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마음까지 팔 것을 강요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99%가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시대에, ‘그들’이 ‘나’와 분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일그러지는 ‘그들’의 마음을 못 본 척 한다면 ‘나’의 마음도 시장에 내놓아야 할 날이 생각보다 가깝게 다가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