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캔버스와 수다 떠는 여자
붓으로 캔버스와 수다 떠는 여자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4.02.0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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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실패와 위기를 이겨내는 힘을 얻다
캔버스는 내 이야기를 정겹게 들어주는 ‘절친’
[일 . 탈_ 나만의 힐링을 공개한다] ② 그림 그리기

삶은 살아가는 이야기의 집합체이다. 하루가 많은 일로 채워지듯 나의 한 작품 한 작품도 많은 이야기들로 꾸며진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도 결국은 작업실로 향한다. 특별한 주제가 없더라도 캔버스와 대면하기가 힘들지, 붓을 들면 행복하다. 머릿속 긴 외로움과 행복감을 담아 화폭에 옮긴다.
- 화가 강사희의 <작가노트> 가운데서

하얀 천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만났다. 캔버스는 비어 있기에 무슨 말을 털어놓아도 아낌없이 받아준다. 때론 꽃이 되어 활짝 웃고, 때론 새가 되어 노래한다. 캔버스와 수다를 떨면 어느덧 내가 몰랐던 ‘나’를 찾는다.

‘나’를 잃고 전쟁터와 같은 일터에서 살아가는 당신! 잠시 하얀 도화지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일.탈’하기를.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net
꼼짝도 않던 붓이 입을 열다

길득희 씨는 어린이집 원장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어린이집을 나선다. 승용차를 타고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당고개 길을 넘어 드라이브를 한다. 그이가 찾아가는 곳은 의정부 고산동에 있는 K아트미술관이다.

미술관을 찾는 화요일은 길득희 씨가 일주일을 열심히 살 수 있는 비결이다. 그이는 일주일에 한 번 이곳을 찾아와 그림을 그린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길득희 씨는 서른 살부터 18년째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집 일은 끊임없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다. 학부모나 원생과 만날 때, 한순간도 배려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늘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에 가면 대학과 중학교를 다니는 두 아들과 남편을 위해 살림을 도맡아야 한다.

화요일은 길득희 씨의 남편이 집안일을 한다. 길득희 씨는 늦은 4시께 미술관에 와서 밤 10시까지 캔버스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한다. 벌써 8년째다.

길득희 씨가 그림을 시작한 까닭은 특이하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자신의 손을 스케치하면, ‘이게 손이야, 고무장갑이야’하는 놀림을 받은 ‘그림치’였다. 2007년 어린이집 원생들과 K아트미술관에 와서 마주한 강사희 화가의 목련 작품을 보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필’을 받았다. 곧바로 미술관을 운영하는 강사희 선생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길득희 씨가 첫 수업을 받던 날, 강사희 선생은 말없이 물감과 도화지를 그이에게 주었다. 조금은 황당했다. 줄긋기나 데생과 같은 기본 기술을 가르쳐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지금 그리고 싶은 것을 아무거나 그리라고 했다. 흰 도화지는 우주 공간과 같이 드넓었고 막막했다. 그리고 싶은 게 아주 많은 것 같았는데, 손에 든 붓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도화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net

“그릴 게 없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찍어보세요.”

선생의 말에 길득희 씨는 보랏빛 물감에 붓을 적시고 도화지에 점 하나를 찍었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해.’ 길득희 씨가 도화지와 나눈 첫 대화였다.

입시를 위한 미술과 취미를 위한 미술은 배우는 과정이 다르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은 눈앞의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몸에 그려진 이야기를 도화지에게 들려주는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도화지에 찍어둔 점 하나가 다시 길득희 씨에게 묻는다. “보라색을 마주하니 기분이 어때?” 어느덧 그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길득희 씨가 방긋이 웃는다. 어린이집에서 시달렸던 일들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가슴 깊은 곳에서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가 샘솟는다. 붓으로 도화지에게 말을 건다.

“어떤 날은 이곳에 와서 작업은 안 하고, 멍 때리고 앉아 있을 때도 많아요. 그림을 그릴 거야, 그런다고 그려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물감을 짜고 붓을 씻으며 그리기 준비를 하느라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날 때도 있어요. 그래도(그림을 그리지 못해도) 여기 와 있는 게 정말 좋아요.”

길득희 씨가 미술관을 찾는 화요일이면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하다. 일터에 있을 때는 오후에 그림을 그리러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당고개를 넘어 오는 길도 너무 예쁘다. 그림을 그리러 오는 시간이 마치 자신만의 여행과 같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net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선물

미술관 작업실에는 화목 난로가 있다. 캔버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무 타는 냄새가 머리부터 발길까지 스며든다. 난로 안에서 나무가 타는 소리도 너무 예쁘다. ‘타드락 타드락 톡톡 투드락 툭툭.’ 난로 안에서 자연이 들려주는 노래다.

길득희 씨의 그림에는 꽃이 유난히 많다. 꽃이 외로우니까 새들을 찾아오게 한다. 꽃에 앉아 노래하는 새가 쓸쓸해 보여 땅에 친구 새 한 마리를 초청한다. 땅에 앉아 나무에 있는 새를 바라보는 친구 새의 눈빛이 애절하다. ‘나 좀 봐주세요.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치 짝사랑하는 이에게 프러포즈를 하지 못해 애달픈 이와 같다.

“이 그림 제목이 뭐죠?”

질문을 던지자 길득희 씨는 웃는다.

“‘그리움’이요. 얘(땅에 있는 새)가 애절하게 쳐다보고 있잖아요.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듯한 그리움 같은 것. 그리고 멀리 집들이 보이잖아요. 자연 속에 있지만 도심의 생활을 버리지 않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그런 이야기를 캔버스에게 들려준 거죠. 제목도 느낌이 가는 대로 그때그때 마음대로 붙여요.”

그림을 좋아하지만 쉽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서기는 힘들다. 붓을 잡기가 두렵다. ‘못 그리는데 어쩌지’ 하는 걱정과 ‘잘 그려야 하는데’ 하는 욕심이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걸 힘들게 한다. ‘못 그려도 괜찮아.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일터와 가정에서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의 붓이 가는 대로 그리면 된다.

물론 혼자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집에서 그림 그릴 공간이 있다고 해서 일상에서 탈출해 오롯이 자신의 시간을 갖기는 쉽지 않다. 화실에 오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옆 사람의 그림을 보며 자신이 그려야 할 이야기를 찾을 수도 있다.

▲ K아트미술관에서는 서양화와 함께 한지조형도 배울 수 있다. 임경자 작가가 한지로 인형을 만들고 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net

강사희 화백에게 물었다.

“수강생에게 무얼 가르치는 거죠?”

화백은 자신이 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사실, 저는 지도하는 게 없어요.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다가 진도가 안 나갈 경우 말 한마디 건네고, 붓 한 번 들어주어 막힌 부분을 살짝 뚫어주는 거죠. 그 한 점이 헤쳐 나가는 길이 되는 것이죠. 그림은 캔버스에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넣는 거거든요.”

길득희 씨는 되풀이해 자신의 그림을 고치며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거기에 강사희 선생이 멘토가 되어 지켜보았다.

길득희 씨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할 때 자신의 그림을 준다. 그림을 받은 이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처럼 여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선물이자 길득희 씨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소중한 마음이지 않은가.

짧은 겨울 해가 산 너머에 붉은 수채물감을 스며들게 하며 뉘엿뉘엿 눕는다. 길득희 씨의 캔버스에도 오늘 하루의 이야기가 저문다.

“그림은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좋아요. 나만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결과물이 작품으로 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