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사회적 대화와 협약이 필요하다
올바른 사회적 대화와 협약이 필요하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4.03.06 13:29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회로 거리로… 뛰쳐나가야 해결되는 일그러진 노사관계
일시 봉합하는 사회적 합의 아닌 ‘사회적’ 대화기구 필요
[분석 1] 사회적 합의

ⓒ 참여와혁신 포토DB
갈등 당사자 사이의 대화보다는 누가 힘의 우위를 차지하느냐가 우선이다. 사용자는 공권력을 앞세우고, 노동자는 연대투쟁으로 이에 맞선다. 노사의 대화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 결국 누가 사회적 여론을 잡느냐가 관건이다. 갈등의 한계에 다다라서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는 갈등의 마침표가 아니라 일시 멈춤에 불과하다. ‘유예기간’ 동안 숨 고르기를 한 뒤 힘겨루기는 계속 된다.

사회적 합의는 유효한가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기막힌 일을 당했다. 2013년 12월 30일 오전 8시 30분께 여느 때처럼 출근하니 회사가 이사 중이었다. 대부분의 사무집기들이 다른 곳으로 이미 옮겨진 상태였다. 이전 소식을 듣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어디로 옮기냐고 물었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기륭전자 이야기를 하려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야 한다. 2005년, 당시 법정 최저임금보다 10원을 더 받으며 일했던 노동자들은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휴대전화 문자를 통해 해고통지를 받았다. 작업 시간 중 잠시 잡담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불법파견 중단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1,89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당시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분회장이었던 김소연은 거의 100일 가까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숱한 고공·단식 농성 등이 이어졌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2010년 11월 1일, 시민사회단체의 연대투쟁과 정치권의 중재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마무리된 듯했다. 기륭전자 대표이사와 금속노조 위원장이 국회에서 ‘합의서’에 서명했다. 국회에서 조인식을 가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합의서는 노사합의를 뛰어넘은 사회적 약속과 다름없었다.

노사간에 자율적으로 합의점을 찾지 못해 시민사회단체나 정치권이 나서는 경우를 한국 사회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때론 정부가 공권력을 앞세워 노사문제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연말에 있었던 철도파업의 경우에도 노사간의 대화와 타협보다는 여야 정당들의 중재가 ‘파업 철회’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때론 대화와 타협보다는 강력한 투쟁과 강경한 대응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고,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한다. 개별 사업장 문제는 어느새 사회적 갈등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사회적 이슈가 된 개별 사업장의 합의는 노사합의보다는 사회적 합의의 의미를 띤다.

사회적 효력을 상실한 사회적 합의

개별 사업장의 노사문제가 번번이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마무리되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한국의 특수한 노사관계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며 노사관계는 정권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이 과정에서 산업별노조는 무시됐다. 당연히 산업별 대화나 협약의 경험을 쌓을 기회는 사라졌다. 개별 사업장의 갈등이 첨예화됐을 때, 산별노조가 있어도 곧바로 사회적 투쟁 내지는 정부 또는 정치권을 향한 투쟁으로 이어진다.

현재 사회 문제가 되는 노사 갈등은 사실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한정해 보기 어렵다.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문제의 경우 법과 제도가 지닌 불명확성으로 인한 갈등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노사 또는 노사정 간의 산별교섭이나 사회적 대화기구를 통해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고 곧바로 사회적 투쟁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서 정치권이 나서야 해결의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한국 사회에도 사회적 대화를 위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가 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유명무실하다.

앞에서 소개한 기륭전자를 비롯해 사회적 합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노사합의는 사회적 합의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사회적 대화나 협상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최종 합의서에 함께 서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노사 양쪽만의 서명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의서가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만약 합의 사항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개별 노사간의 문제가 된다. 이 합의를 강제할 사회적 힘이 존재하지 않아 개별 노사간의 대립이나 법적 효력 다툼으로 이어진다.

특수하지 않은, 상시적인 사회적 대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별 노사간의 갈등이 사회적 합의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합의 이후 상황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노사 갈등이 마무리된 사업장은 대부분 노사간의 자율적 대화를 통한 합의가 불가능한 사업장이다. 대부분이 장기투쟁사업장이거나 대규모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문제가 불거진 사업장이다. 이들 사업장의 경우 시민사회단체가 나서고, 종교 단체, 정부와 국회, 정당이 나서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노사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합의도 충분한 사회적 대화를 통하기보다는 극한 파국을 막기 위한 봉합의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합의서들을 살펴보면, ‘유예기간’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유예기간은 대립이 끝난 게 아니라 멈춘 상태를 말한다.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정치권의 압력이 강했을 때, 일단 유예기간을 두어 압박에서 벗어난 뒤,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면 그 합의를 유야무야하는 사업주들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기륭전자의 사례가 이와 같다.

기륭전자는 2010년 합의 당시 ‘2013년 5월 1일 이내에 고용대상자 10명을 고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기륭전자는 고용대상자들에 대해 2013년 5월 1일 이후에도 업무 배치를 하지 않았고,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8개월째인 12월 30일에는 회사의 위치도 알려주지 않은 채 본사를 이전했다.

한진중공업의 2011년 11월 9일 합의서에도 유예기간이 있다. 이 합의서에서 회사는 1년 뒤에 정리해고자 94명을 재취업시키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재취업 3시간 만에 현장 복귀자들에게 강제휴업을 명령하고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노사분쟁 기간의 ‘지부와 지회 및 개인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가압류)는 최소화하기로 한다’고 합의했지만 이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최강서 조합원은 회사의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마무리된 듯했던 노사문제가 다시 불거진 경우가 많고, 다시 개별 노사의 갈등으로 이어져 ‘사회적’ 합의라는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런 경우 사회적 합의를 이끌었던 제반 단체나 정당 등은 ‘법적’ 책임이나 의무는 없다.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목숨을 건 극한투쟁으로 다시 사회적 이슈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 합의를 강제할 힘을 갖지 못한다. 이 같은 사례는 현재 한국 사회의 노사문제에서 도출된 ‘사회적 합의’가 과연 ‘사회적’인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권영숙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노동위원장은 이런 ‘사회적 합의’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타결)는 그 성격상 사건적이고 일회적이고 우발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별적이다.”

이 말은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과정과 결과가 상시적이지도 않고 지속성을 띠지도 않으며, 계획되거나 제도로 자리 잡을 성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비정규직 문제나 정리해고의 문제로 극심한 사회 갈등을 겪고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면, 이후 다른 사업장에서는 유사한 사례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특수한 사례로 한정되기 때문에 비슷한 사례가 되풀이 되는 실정이다.

또한 ‘특수’하게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가 이어지며 노사간의 자율적인 대화보다는 정부나 정치권을 향한 투쟁이 더 힘을 갖는다는 의식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대화’보다는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투쟁’을 노사 문제 해결의 지름길로 여기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독립적 민주적 권위 지닌 노사민정 대화 필요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최저임금과 같은 문제는 개별 사업장의 협상에 맡길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푸는 게 노사 갈등은 물론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방법일 수 있다. 사회의 전반적인 이해나 요구가 걸린 이슈라면 개별 사업장의 노사 당사자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사회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점을 찾는 게 더욱 효과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인 사회적 교섭기구가 필요하다. 특히 오랜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를 거치면서 노사의 교섭이 폭력적 형태로 왜곡된 한국 사회에서는 개별 노사 협상이나 법을 내세운 공권력의 강제에 앞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사회적 대화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오랜 기간 기업별 노사 교섭의 틀에 묶였던 한국 사회에서는 산별교섭과 산별협약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대화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 역할을 위한 기구로 노사정위가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노사정위는 그 틀을 새롭게 재편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사정위가 정부와 사용자의 들러리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노사정위의 틀을 강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시기는 이미 지났는지 모른다. 노동자의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교섭기구로 조직이 재편되고, 위상이 강화돼야 한다.

기존의 불신을 없애기 위해서는 노사정의 구조를 확대해 전문적인 민간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노·사·민·정 대화기구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운영에서 정권으로부터의 자주성이 확보돼야 하고 의사 결정과정에서도 민주성이 확보돼야 한다. 이와 함께 이 기구에서 결정된 사항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기구의 지위가 보장돼야 하고, 그 결정이 사회적 강제력은 물론 법적 강제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사회적 합의의 효력을 위해 ‘징벌적 배상제’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회적 합의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되풀이되는 현재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제안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듯하다. 지금껏 모든 갈등은 법이 없고 처벌 조항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이듯이 법의 결정은 노동자에게 너무도 큰 희생과 인내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나마 그런 결정도 파생된 결과에 대한 처방일 뿐, 예방의 효과를 지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선 대화와 교섭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이 힘이 사회에 정착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노·사·민·정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기구는 교섭과 합의의 사회적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산별교섭과 개별 노사협상의 롤 모델이 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개별 사업장의 노사 갈등을 줄여 사회적 비용의 손실을 막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노·사·민·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교섭기구에서 다뤄야 할 사안은 점차 줄어들고 최소화돼야 할 것이다. 법에 호소해 숱한 노사 갈등의 승부를 가리려는 것이 사회적 낭비이듯이 사사건건 사회적 교섭기구를 통해 노사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도 사회적 손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당사자들이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교섭을 통해 약속한 사항을 반드시 준수하려는 풍토를 기업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개별 사업장 문제가 거름망 없이 정부 또는 정치권을 향한 투쟁으로 곧바로 이어지고 여기에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현상은 한국 사회의 허약한 산별교섭 구조는 물론 산별협약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노사문제를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한정시키려는 정부 당국의 정책 방향이 큰 몫을 차지한다.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산별교섭과 산별협약이 전 사회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동정책의 방향도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새로운 대화기구를 만들고, 훌륭한 합의안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떤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가 약속을 약속답게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사회적 합의는 결과 도출에만 급급했는지 모른다. 올바른 합의를 위해 선행돼야 할 올바른 대화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