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이해해야 진짜 큐레이터
인간을 이해해야 진짜 큐레이터
  • 이가람 기자
  • 승인 2014.03.0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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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전시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전시!
관람객 호응해야 큐레이터도 힘 얻는다

ⓒ 경기도미술관
큐레이터는 넓게 보면 전시 기획 업무를 하는 사람이다. 세부적으로는 작품을 등록하고 관리하는 레지스트라, 작품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컨서베이터, 전시 교육을 담당하는 에듀케이터로 구분할 수 있지만, 통칭해서 큐레이터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규모가 작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는 업무 구분 없이 여러 일을 도맡아 하는 큐레이터들도 있다.

경기도 미술관에서 근무하는 황록주 큐레이터는 전시 기획을 전담하고 있다. 경기도 미술관은 규모가 큰 편이기에 큐레이터들의 업무도 나뉘어 있다.

실제로 관람객과 얼굴을 맞대고 전시관에서 작품을 소개해 주는 사람들은 도슨트라고 한다. 큐레이터가 도슨트의 역할도 할 수 있지만 대개는 자원봉사자나 단시간 근로자들이 이 역할을 맡아서 한다. 큐레이터는 도슨트에게 전시에 앞서 작품에 대해 교육을 실시한다.

ⓒ 경기도미술관
경기도만의 색깔을 입혀라

경기도 미술관. 이름 그대로 경기도를 정체성에 반영하고 있다. 황록주 큐레이터는 경기도 미술관의 주 관람객들이 경기도민들이기에 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미술관이 되도록 애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경기도 미술관은 그런 노력의 하나로 지난해에는 어린이 미술관을 설립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이곳에서 가장 고민하는 것은 경기도만의 색깔을 담아내는 것이다. 경기도는 서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지역이다. 다행인 것은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이다. 경기도 미술관은 작가들과 함께 경기도만이 가지고 있는 콘셉트로 전시를 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수원 출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미술가 나혜석을 통해 경기도의 페미니즘 예술을 살펴보는 전시를 하는 식이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도립 미술관인 만큼, 공익적이고 지역 주민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전시가 주로 이루어진다. 현학적이거나 특정 전문가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기도 미술관이 고민하는 것은 곧 경기도 미술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황록주 큐레이터는 “늘 고민하는 게 ‘우리 엄마한테 무슨 전시라고 소개하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시를 보고 나서 모든 개개인이 의미를 쉽게 찾아갈 수 있게 기획하려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길게는 일년 전부터 미리 동료 큐레이터들과 기획 회의를 여는 것으로 전시준비가 시작된다. 큐레이터들은 각자 관심 있는 주제, 최근 이슈, 관람객의 수요, 경기도 미술관의 정체성 등을 고려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 회의에서 그 아이디어들 중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미술관 예산이나 일정에 따라 전시가 진행될 수 있다. 아이디어가 정해지면 담당 큐레이터는 작가들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한다.

“오래 일하다 보니까 작가들이 기존에 했던 작품들이 대충 머리에 그려져요. 어떤 작가에게 어떻게 섭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각자 큐레이터마다 갖고 있는 자질이자 역량인 거죠. 기획을 위해서는 열심히 연구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완성된 작품을 섭외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작품을 섭외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큐레이터는 사전에 작가에게 전시 의도를 밝히고 작품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작가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작가가 큐레이터의 권유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도록 하려면 큐레이터는 작가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고 그 작가의 작품 성향을 정확하게 인지해서 작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접근해야 한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인재 넘쳐나지만 일자리 태부족

작가에게 작품을 권유할 수 있는 큐레이터라면 왠지 그림을 잘 그릴 것 같다.

“큐레이터라고 말하면 다들 그림 잘 그리느냐는 질문을 해요. 그런데 저는 그림을 잘 못 그려요. 방법론은 아는데 작품을 만들지는 못해요(웃음). 큐레이터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알아야 해요. 어떤 재료와 기술을 동원해 작품이 진행되는지 알아야 작가들과 논의할 수 있으니까요.”

황록주 큐레이터는 큐레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로 ‘인간을 이해하는 따뜻한 시선’을 꼽는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 공부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 작품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의 한계도 보고 가능성도 보면서 실제로 행하지 못한 형태의 경험을 작품으로 대신해서 표현하는 게 예술이라는 것이다. 큐레이터는 이런 것을 파악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큐레이터에게는 인간을 이해하는 자질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을 이해해야 하는 만큼 고충도 있다. ‘예술이 도대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타성에 젖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효한 예술 작품들을 던져주어야 하는 압박감, 그리고 그런 역할을 실제로 하긴 하는 건가 하는 의심을 하다 자괴감에도 빠진 이들도 있다.

작품을 구입해서 미술관에 보존해야 할 때도 책임감과 부담감을 크게 느낀다. 현재 자신이 선택한 작품이 수백 년이 지나서 후손들에게도 가치가 있을지를 당장 판단해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공공의 자산으로 그 작품을 오랫동안 공들여 보존해도 될지에 대한 윤리적인 생각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고충도 황록주 큐레이터와 같이 안정적인 일터를 가지고 있을 때나 가능하다. 큐레이터를 꿈꾸는 이들이 해당 업계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한정돼 있는 데 반해 고학력의 인재들은 넘쳐난다.

“전공자들은 많은데 자기 전공을 살려서 제대로 일할 곳은 별로 없어요. 저처럼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를 안 구해도 되지만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유능한 후배인데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단기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안타깝죠. 어떻게 보면 영화감독들도 뜬 사람은 소수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잖아요.”

이런 문제는 단지 큐레이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예술계에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기에 황록주 큐레이터는 씁쓸하게 웃음을 짓고 만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큐레이터, 교육을 고민하다


그러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닐 터.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때는 언제였을까?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고 나서 후기에 온갖 찬사를 남겨 주실 때가 있어요. ‘오고 싶어도 집과 거리가 멀어서 전시 마지막 날에야 간신히 오게 됐다. 정말 좋은 전시였다’는 등의 편지들을 보면 목이 간질간질해지죠.”

큐레이터가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호응해 줄 때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호응이 있어야 더욱 좋은 전시로 관람객들에게 보답할 수 있다.

그렇다고 큐레이터들은 직접 전시관에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술도 자주 접해야 예술적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거기에 교육이 덧붙여진다면 예술적 감수성은 활짝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큐레이터 중 일부는 에듀케이터로서 교육을 전문적으로 담당하기도 한다. 큐레이터가 대안교육자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도 청소년들이 예술적 감각에 눈을 뜰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에서 전시관을 학교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복적으로 예술을 접함으로써 청소년들은 예술과 친밀해지는 것은 물론, 관람에서 지켜야 할 예절도 깨닫게 된다.

현재 경기도 미술관에서는 ‘공간’을 주제로 한 황록주 큐레이터의 기획 전시가 한창이다. 자기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판단에서 기획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기획한 전시인 만큼 황록주 큐레이터는 전시물마다 해당 작가와 연계해 자세한 설명을 한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작가의 사상이 작품에 반영돼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느 작가는 공간의 너비와 길이를 몸으로 표현했고, 또 다른 작가는 높낮이가 다른 벽을 어두운 공간에서 빛으로써 구분하기도 했다.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모든 관람객들이 작품의 의도나 목표를 이해할 수는 없을 터이다. 큐레이터의 해설이 온전히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관람객들이 같은 큐레이터로부터 같은 설명을 들었다 할지라도 바라보는 시선은 개인마다 다룰 수도 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황록주 큐레이터가 매 전시마다 관람객들에게 던져 줄 메시지를 한 가지씩 정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공간’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 대해 되돌아보는 기회’를 주려고 한다. 그것이 이번 전시의 유일한 목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올 무렵, 때마침 전시를 관람하고 나와서 팸플릿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여고생들과 마주쳤다. 여고생들이 적는 내용을 유심히 살피던 황록주 큐레이터는 “전시 보고 나서 정말 그런 생각을 해보았느냐”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질문에 일제히 “네”라는 여고생들의 대답이 돌아온다. 여고생들의 호응에 황록주 큐레이터의 얼굴에 금세 엷은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