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지역으로 눈을 돌리다
노조, 지역으로 눈을 돌리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4.03.3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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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4개 노조, 지역에서의 역할 고민
사회적 지지·연대 없이 노조운동 발전도 없다
[현장 1] 지역과 노동

ⓒ 금속노조 기아자동차광주지회
지난 3월 13일 저녁, 광주 지역의 4개 대기업노조 간부들이 내방동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대회의실에 모였다. 이날 모임은 이문호 워크인조직연구소 소장의 기조강연과 참석자들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노동계가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이날 모임의 주제였다.

노조, 지역에서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대기업노조들인 광주은행지부(위원장 강대옥), 금호타이어지회(대표지회장 허용대), 기아자동차광주지회(지회장 이기곤), KT노조 전남지방본부(위원장 정광우) 대표자들은 지난 2월 몇 차례 모임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노동계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지역과 노동을 위한 모임’을 구성했다.

지역과 노동을 위한 모임의 첫 번째 활동은 지역사회를 고민해온 학자들을 초청해 고민을 나누는 것이었다. 지난 2월 27일부터 3주에 걸쳐 박광서 전남대 명예교수, 홍성우 전남대 교수, 이문호 워크인조직연구소 소장으로부터 기조강연을 듣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2월 27일 첫 강의에 앞서 지역과 노동을 위한 모임은 광주 지역 기자들을 초청해 기자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지역의 4개 대기업노조들이 모인 이유를 설명했다.

그간 광주 지역에서 4개 대기업노조들은 나름대로 지역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활동을 음으로 양으로 꾸준히 진행해 왔다. 하지만 노동조합들의 이런 활동은 지역사회의 한 주체로서 지역경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봉사활동 차원의 사회공헌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기업노조들도 이러할진대, 사정이 보다 열악한 중소기업 노조들이 지역사회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4개 대기업노조 대표자들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노동계의 사회적 참여가 가능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며, 노동계를 대표하는 대기업노조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고민의 축이었다.

노동조합의 1차적인 과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에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은 기업단위 노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느 한 기업 노사만의 힘으로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출근해서는 기업의 직원이지만 퇴근하고 나면 지역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가 함께 발전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삶의 질도 향상되기 어려운 조건이다.

ⓒ 금속노조 기아자동차광주지회
지역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중 기초가 되는 것은 지역경제의 활성화다. 하지만 지역경제에 노동계가 주체적으로 참여해 본 경험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 미국발 금융위기를 즈음해 각 지역에 구성된 지역 노사민정협의체의 사례다. 지난 2012년 12월 고용노동부의 의뢰를 받아 노사발전재단이 지역 노사민정협의체들의 실적을 연구한 자료를 보면 광주 지역의 경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가 노동계의 참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광주광역시 노사민정협의회는 모두 2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그중 노동계를 대표한 위원은 단 한 명에 그치고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노사민정협의회에도 14명의 위원 중 노동계 위원은 2명에 불과하며, 광산구 노사민정협의회의 경우에도 역시 17명의 위원 중 2명만이 노동계 위원이었다. 이러한 인적 구성에서의 문제는 그대로 운영에도 이어져, 광주광역시 노사민정협의회의 사무국을 운영하는 것은 전적으로 지역 경총의 자발적 협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동계 대표자들의 고민은 노동계의 사회적 참여가 가능하도록 대기업노조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삶의 질 향상으로 모아보자는 것이었다. 또 거대한 담론이나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지역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드는 것이 과제로 제기됐다. 요컨대 지역사회와 지역경제에 노동계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가 대표자들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이 갈은 고민에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따로일 수 없었다. 지역 노동계에서 이러저러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대기업노조 대표자들이 한데 모인 것은 이 같은 취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 박광서 전남대 교수의 첫 번째 강의 ⓒ 금속노조 기아자동차광주지회
전문가의 지혜를 빌리다

하지만 대기업노조 대표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데 모였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대기업노조 대표자들이 모임으로써 이제 막 첫 걸음을 뗐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점을 확인한 지역과 노동을 위한 모임이 과연 현재의 상태는 어떠하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려고 해도 구체적인 자료는 많지 않았다. 지역과 노동을 위한 모임은 이에 따라 아직은 진행과정이 초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첫 걸음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 문제를 고민해온 전문가들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다. 그 위에서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아이디어를 모아보자는 취지로 전문가 초청 강의를 준비한 것이다.

2월 27일 진행된 첫 강의는 전남대에서 지역 문제를 연구한 박광서 명예교수로부터 광주·전남 지역의 경제현황과 지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듣는 것이었다. 박광서 교수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자기반성을 통해 지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이를 기반으로 교류와 소통을 통해 지역을 활성화하고 지역혁신체계를 구축해 내발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발적 발전이란 발전의 동기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부에서 찾자는 것이다.

▲ 홍성우 전남대 교수의 두 번째 강의 ⓒ 금속노조 기아자동차광주지회
3월 6일 진행된 두 번째 강의는 지역의 노동 문제를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홍성우 전남대 교수는 이 강의에서 “중앙정부의 일률적인 고용정책의 효과가 감소한 만큼 그동안 산업정책만 시행해 왔던 지방정부가 이제는 직접 일자리 창출이나 고용안정 사업과 같은 고용정책을 별도로 추진해야 한다”면서 “지역의 노동조합운동도 지역경제 활성화의 주역으로서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조, 지역민과 동행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생산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앞의 두 차례 강의가 이론적인 측면에서 지역경제와 지역 노동조합운동의 역할을 모색한 것이었다면, 3월 13일 진행된 세 번째 강의는 지역사회에 개입한 독일 노동조합의 사례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이문호 워크인조직연구소 소장은 슈투트가르트와 볼프스부르크의 사례를 설명했다. 1990년대에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한 슈투트가르트 지역의 노조들은 지역에서 임금문제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1994년 슈투트가르트 지역협의회를 발족하고 지역단체들과 공동출자로 슈투트가르트 경제활성화 회사를 설립했다. 슈투트가르트 지역협의회는 지역의 협력적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경제의 재도약을 도모했다.

볼프스부르크는 폭스바겐의 본사가 위치해 있는 도시다. 볼프스부르크의 일자리 중 60%는 폭스바겐이 제공한 일자리였다. 그런 폭스바겐이 1990년대 초반 경영위기에 처하자 3만여 명의 여유 인력이 발생했다. 폭스바겐이 이를 극복한 것은 정리해고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정책을 통해서였다. 여기에 세계 최대의 자동차 테마파크인 아우토슈타트(Autostadt)를 건설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사례를 소개한 이후 이문호 소장은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삶의 질 향상은 노사민정의 협력적 네트워크가 발전된 곳에서 일어난다”며 “앞의 사례에서 지역의 네트워크 구성에는 노조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이문호 소장은 이어 “노조의 독자적 영역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며 “따라서 노사관계를 넘어 삶의 현장까지 시각을 넓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지역사회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는 것은 노조가 지역사회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높이는 기회”라고 덧붙였다.

▲ 이문호 워크인조직연구소 소장의 세 번째 강의 ⓒ 금융노조 광주은행지부
아직은 첫 걸음 뗀 수준이지만

그렇다면 지역과 노동을 위한 모임이 속해 있는 광주는 어떤 모습일까?

박광서 교수는 수도권과 경부선 축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장의 결과 비수도권, 특히 비경부선 축의 낙후가 심화되고 지역경제의 공동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또 낙후지역일수록 일자리 부족에 의한 청년층의 유출이 심화되고 저출산과 고령화의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이제는 지역의 존립 자체가 문제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단은 홍성우 교수 역시 다르지 않다. 직업에 대한 평가와 임금수준, 노동시간, 고용안정성 등을 종합해 지수화한 고용의 질 지수가 전국 평균인 70.0에 미치지 못하는 68.9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위1분위의 비중이 전국 평균인 25.8%보다 높은 28.0%를 기록한 반면, 상위4분위의 비중은 전국 평균인 24.2%에 못 미치는 20.7%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실제 산업의 측면에서 보자면 광주 지역경제에서 자동차산업은 생산과 수출, 고용의 비중이 크게 높아져 지역 내의 최대 주력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광주 지역 자동산업의 수출액은 2000년 3.7억 달러에서 2012년 49.8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전국 수출액 대비 비중도 2.4%에서 6.9%로 높아졌다. 종사자 수도 2000년 141개 업체 0.8만 명에서 2011년 229개 업체 1.3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중 완성차업체인 기아자동차의 부가가치 생산 및 종사자 수가 전국의 8~10%로 지역의 경제규모에 비해 높은 수준을 기록한 반면, 광주 지역 부품업체의 부가가치 생산 및 종사자 수는 전국의 3~4% 수준에 불과하다. 수출 규모에 있어서도 기아자동차는 2012년 47.6억 달러를 수출해 전국의 10.1%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부품업체의 수출은 1% 내외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 같은 광주 지역경제의 현실에서 광주 지역 대기업노조들이 지역경제 활성화와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어, 앞의 독일의 사례에서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활동방향을 정립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그동안 기업을 중심으로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져 왔고,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라는 조건 외에도, 아직까지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한 정책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들이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자신들만의 이해를 위한 울타리를 넘어 지역의 현안과 경제에 대한 고민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은 새로운 전환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또 그동안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라는 이념적 틀을 넘어 지역과 노동자를 중심에 두자는 지향점을 명확히 하고 연대의 힘으로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 역시 진일보한 점이다.

특히 지역과 함께 호흡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노동조합운동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건강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이자 사회인으로서 노조 조합원의 참여와 역할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개별사업장의 어떠한 요구사항도 사회적인 지지와 연대가 없다면 얻기 어려운 때다. 자본과 여론은 그들만의 리그, 귀족노조 등의 표현을 동원해 노동조합의 요구가 사회와는 무관하고 자신들만의 이기주의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를 외면하거나 무시한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의 모델을 만들 때 이런 시각에 대한 극복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 지역에서 시작된 노동조합의 지역사회에의 개입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 수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