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책임 간 데 없는 최고의 ‘꿀보직’
역할과 책임 간 데 없는 최고의 ‘꿀보직’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4.05.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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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도입 취지 무관하게 거수기 행태만 반복
금융위, “개별 기업 알아서 할 바”…최소 원칙만 권고
[분석 3] 금융위, “개별 기업 알아서 할 바”…최소 원칙만 권고

ⓒ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고액의 보수를 받는 대기업 임원들에게 흔히 질시 섞인 비난을 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고민하는 사안들, 활동 폭, 맡고 있는 책임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매도를 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실질적으로 책임을 질 사안도 없고, 음지에서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드러나기엔 딱히 하는 일도 없어 보인다. 어지간해선 퇴출의 우려도 없다. 그럼에도 높은 보수를 받고 있고 대우도 좋다. ‘참 좋은 자리’가 아닌가 싶다. 금융권 사외이사를 두고 할 수 있는 얘기들이다.

단단하고 양 많은 ‘철밥통’

사외이사 제도는 경영진과 관련 없는 외부 인사를 이사회에 참가시켜 대주주의 독단 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는 장치이다. 우리나라에는 지난 1998년 상장회사에 한해 의무적으로 사외이사를 두도록 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제도 도입 초기에만 하더라도 학계나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사외이사 제도는 영미권의 그것과 같다. 영국의 경우 사외이사에게 경영진의 보수에 대한 권리를 전적으로 맡기는 등, 제도 자체가 주주의 권익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독일의 경우 영미권과는 다르게 이원적인 이사회 제도를 활용하고 있는데, 경영 이사회와 감사 이사회로 나뉘어 있다. 감사 이사회의 반은 근로자대표의 추천으로 뽑힌다. 주주의 권익뿐만 아니라, 근로자와 채권자 등 기업을 둘러싼 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성격이다.

지난 2010년 전국은행연합회가 제정한 은행 등 사외이사 모범규준에 따르면 은행이나 금융지주사는 매년 20% 안팎의 사외이사를 새로 선임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범규준’에 명시된 내용이기 때문에 강제성이 없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금융권 사외이사들은 1년씩 연장되는 임기까지 5년을 꽉 채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사외이사는 이사회 안에 구성된 다양한 위원회의 멤버로 참여하게 된다. 특히 사외이사를 새로 뽑는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에서도 사외이사들의 힘이 막강하다. 위원의 절반 이상이 사외이사들로 구성돼 있다. 사외이사가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안정적인’ 모습이 항상 반복된다. 5년이라는 기한 안에서 사외이사는 꽤 단단한 ‘철밥통’인 셈이다.

사외이사들의 철밥통은 단단할 뿐만 아니라 양도 많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내용을 확인해 보면 신한, 우리, 하나, KB 등 4대 금융지주회사 사외이사들의 연봉은 평균 7,150만 원이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거마비 등을 감안하면 대부분 1억 원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1년에 12번 내외의 이사회가 열리는 점을 감안하면, 순전히 평균 연봉만 놓고 봤을 때 사외이사의 일당은 500만 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이들 사외이사는 은행이나 금융지주회사의 임원으로 포함돼 있으며, 실제 대우도 그에 준한다. 해외 연수라든지 세미나, 출장비 등의 지원이 빵빵하다. 과거에는 유상증자 시 소액주주들이 권리를 포기해 생기는 실권주를 사외이사들에게 배정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거수기, 방패막이…상상하는 그대로

막중한 책임과 역할이 따르는 자리라고 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게 어려울 것이다. 앞서 언급된 사외이사 본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사외이사가 하는 일은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흔히 사외이사의 역할을 ‘거수기’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그렇다. 지난해 4대 금융지주회사의 이사회에서는 모두 224건의 안건을 의결했는데, 부결된 안건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는 점도 놀랍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사회에 불참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면 투표가 요식행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압도적인 찬성표만 나온다”고 밝혔다. 2012년의 경우에도 116건의 안건 중 부결된 것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또한 사외이사들은 기업의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전직 관료나 현직 법조인 등이 대거 포진돼 있는 점을 봤을 때,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보험용’이거나 ‘로비용’으로 활용한다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평이다.

KB금융지주의 고승의 사외이사는 공정거래 경쟁정책 자문위원을 2009년부터 맡고 있다. 김영과 사외이사는 과거 재정경제부 경제협력국장을 지냈고,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리금융지주의 박영수 사외이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과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으며 법무법인 강남의 대표 변호사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들 사외이사들의 면면은 전문성을 중시한 포진이라고 한다. 금융회사의 특성 상 업무 이해도가 높아야 하기 때문에, 정관계와 밀접하고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은 인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외이사들이 “기업의 로비 활동을 위한 인력 풀로서만 가치가 있다”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토로다.

최근의 추세는 권력기관 출신 인사에서 학계의 전문가 그룹으로 사외이사 선정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말 4대 금융지주는 주주총회를 통해 약 40% 선인 13명의 신임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신임 사외이사들 대부분이 유학파 출신 서울대 교수들이다. 금융권에서는 “경제정책에서 금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전문가 그룹의 부상은 긍정적”이라고 자평한다.

ⓒ 금융위원회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과거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특정 학연과 인맥을 중심으로 경영진이나 금융당국과 매우 밀접한 인사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견제와 감시, 비판, 대안 제시 등의 역할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조직 발전 고민할 진짜 인물을 데려오자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위원장 성낙조)는 새로 선임되는 3명의 사외이사를 포함해 전체 9명의 사외이사 중 5인이 윤리성, 전문성, 독립성 등 크게 세 가지 대분류 항목에서 부적격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조재호 사외이사는 금융위원회 소속의 자본시장 개선 민관합동위원회 자본시장분과 위원장이며,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 이건호 KB국민은행 행장과 서울대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대정부 및 경영진과의 독립성 부문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김명직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는 금융감독원 거시감독국 자문위원, 금융위원회 시장효율화위원회 위원장이며, 임영록 회장이 2012년 한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해당 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신성환 홍익대 경제학 교수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힘찬경제추진단 추진위원, 금융감독원 자문위원, 금융위원회 시장효율화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한국금융연구원에서 이건호 행장과 함께 연구원으로 근무한 바 있다.

KB국민은행지부 관계자는 “이사회 내에서 지주회장과 행장 등 경영진의 친위 세력 구성을 위한 것이라는 게 확연히 보인다”며 “KB금융그룹의 발전 방향이라든지, 주요 사안에 대한 견제 역할에 대해 과연 소신 있게 고민하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들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 정기 주주총회 소집, 배당과 재무제표, 영업보고서의 승인 등 통상적인 안건 외에도,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지분 추가 인수 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은행장 직무대행 선임의 건 등 금융지주회사와 은행의 핵심 안건들을 처리하게 된다.

은행의 감사위원회 역시 상근 감사보다는 사외이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운영된다. 최근 은행 내부비리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점 등을 보아도 사고를 사전 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후 진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감사위원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감사위원회의 회의 개최 역시 자주 있어봐야 한 달에 한 번 수준이다. 결국 효력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은행 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의 실제 본업이 따로 있는데, 한 달에 한 번 남의 회사의 내부 문제를 들여다보며 감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사외이사들이 주로 경영진들과 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점도 공정한 감사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한다.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도 경영진이 직접 참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유명무실한 대안, 최소 기본원칙만 고수

ⓒ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금융위원회는 지난 6월 금융회사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이사회를 바로잡고, 사외이사들이 스스로를 권력집단화하는 것을 방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경영진과 이사회 간 견제를 통한 균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회가 매년 사외이사에 대한 신임 평가를 실시하고, 2년에 한 번씩은 외부 평가를 하도록 ‘권고’했다. 사외이사들의 활동 내역과 책임에 따라 보수도 차별화되며 그 내용을 공시하도록 했다.

문제는 사외이사의 임기를 제한한다거나, 예금자대표 등을 이른바 ‘공익이사’로 선임하는 등의 강력한 규제 방안이 없는 가운데, 과연 실효성이 발휘될 지는 의문스럽다. 금융위원회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문제는 정답이 없고 개별 회사의 특성에 따라 다양성이 존재한다”며 “따라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범위에서 최소한의 기본 원칙만 제시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권한을 제한하는 강력한 규제 방안이 실제로 금융현장에서 더 큰 부작용을 낼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쨌든 은행 사외이사 모범규준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져가고 있는 ‘원칙준수-예외공시(comply or explain)’의 기조에서 실효성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부분에 대해선 공감하고 있다. 자율적으로 규정을 준수하고,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한다는 것은 “메아리처럼 공허하다”고 금융권 관계자들은 표현했다.

현행 사외이사 제도는 근본적인 틀에서부터 애매한 점이 많다는 부분에 대해선 많은 이해당사자들이 공감대를 갖고 있다. 성낙조 KB국민은행지부 위원장은 “사외이사의 권한을 강화할 경우 스스로가 권력집단화될 우려가 있으며, 그렇다고 권한을 축소하자니 그야말로 경영진의 거수기 역할만 하게 될 우려가 있다”면서 “조직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인사를 사외이사로 둘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현재의 모호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러 가지 해석과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구체적인 제도 운영의 실험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사외이사 제도 본연의 취지와 목적에 맞는 역할을 기대하긴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