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지켜온 영사기사의 꿈
40년 넘게 지켜온 영사기사의 꿈
  • 박상재 기자
  • 승인 2014.05.0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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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위해 섬으로 찾아간 봉사활동 단장
35년 일한 미림극장도 시대의 뒤안길로
[사람향기]조점용 영사기사

촤르르륵~.
특유의 소음을 내며 영사기가 돌아간다. 전면의 스크린에는 ‘비 내린’ 영상이 재생된다. 영화에 푹 빠진 관객들로 들어찬 객석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극장 풍경이다. 관객들을 울리고 웃겼던 필름도 영사기도 이젠 디지털 기기에 밀려 박물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영사기를 돌리며 관객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순 없겠지만, 그래서 조점용 씨에게는 더욱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캄보밴드를 꿈꾸다

조점용(70) 씨는 열 살 무렵에 처음 영화를 접했다. 영화관도 별로 없었던 때라 동네에서 한 번씩 무료로 영화를 상영할 때 신기해하기는 했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취미는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5인조 캄보밴드였다. 캄보밴드는 소규모로 편성된 재즈 밴드를 말하는데, 그 곳에서 그는 색소폰을 불고 싶었다.

그가 이러한 꿈을 갖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6.25가 발발하기 전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중앙극장을 설립했다. 무대에는 유명 가수 한 명이 간판 격으로 나오고, 작은 무명 밴드들이 뒤이어 나왔다. 유년시절부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다 보니 캄보밴드를 하고 싶은 꿈이 생긴 것이다.

비록 전쟁을 피해 충청도로 내려가면서 중앙극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음악은 계속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서울 서라벌 고등학교로 올라가 뜻 맞는 친구들과 팀을 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가격으로 환산하면 500만 원가량인 색소폰을 살만한 돈은 없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캄보밴드는 포기하고, 관심을 돌린 곳이 영화관이었다.

당시 극장 직원들은 미성년자라서 볼 수 없던 영화들은 영사실 앞에 가서 몰래 보도록 했다. 그러다간 단속이 나오면 영사실 인터폰으로 연락을 해서 학생들을 영사실 안으로 숨기도록 했다. 조점용 씨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당시 영사기를 처음 보고 느꼈던 감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영사실 가서 영사기를 보니 대단하더라고. 그 때는 기계란 것이 흔하지 않았거든. 마차나 굴러다니고, 폐차된 차량의 부품을 조립해서 만든 차들이 돌아다녔어. 그런 시절에 거대한 영사기를 통해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일이더라고.”

TV나 비디오가 없던 그 시절, 거대한 기계에서 영화를 뿜어대는 영사기를 보곤 곧바로 영사기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그 꿈을 갖고서 가족들이 있는 충청북도 음성으로 다시 내려갔다.

1964년도엔 처음 영사기사 자격증이란 것이 도입돼서 곧장 시험을 보러 갔지만, 지원을 하고보니 22살 이하로는 시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음성의 영화관에서 영사기사 보조 일을 하며 2년을 준비했다. 당시엔 마을에 장이 서는 날이 아니면 낮에는 영화 상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해 공부를 했다. 요즘처럼 시험과목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3권짜리 책을 놓고 공부를 하다가 밤이 되면 일을 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1966년에 시험에 붙어 영사기사로의 삶을 시작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영화관도 드물고, 영사기사란 직업도 생소했기에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그는 ‘1호’ 영사기사였다.

청춘을 바친 미림극장

군대를 전역하고 1년 뒤에 그가 일하기로 마음먹은 곳은 인천의 미림극장. 처음엔 허름한 건물이었지만, 그가 일을 시작한지 3년 만에 극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건물도 새롭게 증축 했고, 놀 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영화관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의 내용보단 스크린에 영상이 나오는 것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아 어느 영화든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사기에서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그렇게 10년, 20년이 흐르니 손님들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관에 찾아오는 소매치기 ‘쓰리꾼’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특히 이소룡 주연의 영화를 상영할 때처럼 사람들이 많아지는 날이면 인천의 모든 극장에는 쓰리꾼이 숨어있었다.

ⓒ 박상재 기자 sjpark@laborplus.co.kr
“예전에 화장실을 보면 위에 물이 담겨있는 통이 있잖아. 물이 넘친다고 연락이 와서 거기 가보면 그 안에 지갑이 있었어. 돈만 빼고 거기다 버린 거지. 그런 일이 허다했어.”

그 때 조점용 씨는 방송을 이용해 계속해서 소지품 주의 방송을 했다. 영화 도중에도 몇 차례씩 방송을 하면 쓰리꾼은 그를 한 번 쳐다보곤 나갔다고 한다. 영화관을 찾아준 손님들에게 베푼 일종의 서비스였다.

미림극장에서 일한 35년 동안 단 한 번의 환불 사고도 없었고, 손님들과도 슬슬 정을 쌓다보니,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동년배 친구들보다 6배나 높은 월급을 받았다. 그 때 받은 월급을 모아 결혼을 했고, 자식 셋을 낳아 모두 대학에 보냈다. 그리고 첫째, 둘째의 결혼 자금을 보태주는 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셋째가 대학 졸업을 1년 앞둔 상황에서 미림극장은 문을 닫았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을 때는 너무 아쉬웠지. 그 곳에서 내 청춘을 다 보냈는데. 총각 때 들어가서 거기서 장가들고 아이들까지 낳고. 내 가족을 먹여 살린 터전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아쉽지 않겠어.”

대체할 수 없는 필름의 매력

미림극장이 문을 닫던 시기는 대부분의 개인 극장들이 문을 닫던 때였다. 대기업의 자본 공세를 견뎌낼 극장은 없었다.

“대기업은 자본력으로 영화제작도 참여했어. 그리고 그 영화를 소규모 극장에는 주지도 않아. 흥행성이 떨어지는 영화들만 조금씩 줬지. 게다가 대형 극장은 상영관이 많은 만큼 영화 선택권이 많잖아. 나 같아도 그 쪽으로 갔을 거야. 그런 식으로 대부분 소규모 극장들은 문을 닫았고.”

동시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예전엔 한 상영관에 네 명의 영사기사가 함께 짧은 필름을 두 대의 영사기에 번갈아가며 이어붙이고, 교대로 쉬어가며 일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덟 개의 상영관이 있어도 기사 두 명가량이 버튼 클릭만으로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더 이상 필름을 고집하는 영화감독은 찾아보기 힘들고, 올해 1월엔 국내에 마지막으로 남은 영화 필름 현상소인 ‘서울필름현상소’도 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대규모 멀티플렉스는 물론 소규모 독립 영화 상영관도 필름 영화는 상영하지 않거나, 디지털로 전환해 상영하고 있다. 필름만을 작업해 온 조점용 씨라면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만 했다.

대신 이제는 “기술이 발달하고, 화질은 점점 좋아지고 있지만 필름의 ‘자연미’만큼은 디지털이 따라올 수 없다”며 사용하지 않는 필름을 직접 수집하고 있다. 필름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인천에서 광주, 대전, 서울, 청주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야 하지만 힘든 줄 모르고 찾아간다고 한다. 요즘은 영화 <해바라기>를 구하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혹시 DVD라도 갖고 싶은 마음에 각지를 돌아다녀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관이 드물고, 변변찮은 영화 보기도 힘들던 고등학교 시절.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계속 봐야만 했던 이유는 친구들 때문이었다. 영화를 볼 돈이 없거나, 갈만한 시간이 없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본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면 다들 감탄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봐야 했고, 줄거리 중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전달하는 일은 스스로에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영화를 보고 오면 애들이 많은 기대를 해. 그럼 걔들 재밌게 해주려고 쉬는 시간에 영화 얘기를 해줘. 그 땐 친구들이 손님이야. 머릿속에서 편집을 해서 제스처를 써 가면서 재밌는 부분을 얘기해 준다고. 듣고는 애들이 ‘진짜 재밌겠다’ 하면서 감동해. 그런 애들이 날 기다리는데 나라도 계속 영화를 봐야하지 않겠어.”

봉사활동으로 이어간 영화사랑

고등학교 때부터 이야기꾼을 자처하던 그가 영화관에서 일을 하면서 시작한 일은 봉사활동이었다. 영화관에서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영화관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운 점이었다. 당시 높은 임금을 받고,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때가 아니면 다신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 박상재 기자 sjpark@laborplus.co.kr
“시내에 있는 복지관 같은 건 그래도 자체적으로 버스를 타고 영화 보러 오는데, 섬에 있는 애들은 배를 타고 나와야지. 그게 돈이 엄청 많이 들면서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잘못 헛디뎌서 바다로 빠진다든지. 그래서 우리가 가서 영화 보여주면 진짜 좋아해. 가려고 하면 ‘아저씨, 언제 또 와요’ 하고 붙잡고 늘어져. 그 얼굴이 자꾸 떠올라 또 갈 수밖에 없었지.”

고아원, 복지원, 재활원 등 각 기관을 방문할 때마다 먹을 것과 생필품을 사들고 갔고,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에는 아이들 모두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곳은 인천 장봉도의 ‘혜림원’이다. 정신발달지체아들을 대상으로 직업훈련도 하고, 생활지도도 하는 곳이었다.

혜림원 옆에는 해수욕장이 있었는데 봉사단은 그 곳에 스크린을 설치했다. 그리곤 인근 상인회로 연락을 해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오라고 공지를 했다. 그러면 해수욕장에 놀러온 인파들과 그 지역 주민들, 혜림원 식구들까지 300명이 넘게 모여 다 같이 영화를 봤다.

“봤던 영화라도 해수욕장에서 영화를 본 사람은 없잖아. 해수욕장에서 보는 감동이 또 다르잖아. 그러니 상인회, 해수욕장 놀러온 사람들 모두 몰려와. 그러면 극장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봐. 영화를 보는 관객도 감동, 그런 관객들을 보는 나도 감동이지.”

그렇게 봉사활동 단장으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갔다. 때로는 성장한 아이들에게 먼저 연락이 올 때면 뿌듯하기도 하고, 나눔의 과정이 누구보다 자신에게 더 보람차고 뜻 깊은 일이었기에 5년을 이어갔다. 하지만 미림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봉사활동도 더는 할 수 없었다. 함께 하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옮겨가는 영화관마다 문을 닫았다. 게다가 월급도 이전의 1/5밖에 안 됐다.

아직도 놓지 않는 꿈

조점용 씨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인천 부평의 ‘시니어키노’. 시니어키노 사업은 노인들의 문화생활을 돕기 위해 인천시가 추진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지난 4월 남동구 노인종합문화회관에 제1관을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부평구 민방위교육장, 중구 차이나타운 내 한중문화관까지 확장했다. 노인들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영화를 틀고자 하니 필요한 것이 필름 영사기사였는데, 인천시가 떠올린 사람이 조점용 씨였다.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그게 소문이 퍼져 지금 여기에서 일을 하게 된 거야. 이걸 떠맡다시피 했어. 그리고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 젊은 사람들이 돈 조금 받고 하면 누가 하려고 하나.”

하지만 이내 “대한민국에 이런 노인 정책이 없으면 노인들이 영화 볼 곳이 없지. 대형 극장을 가면 젊은 애들 보기 민망해서 못 앉아있는데, 인천에서는 이런 것들이 확대가 돼서 좋아. 내일도 영화 필름 가지고 다른 데로 가야지. 세 군데를 하는데 전부 내가 하고 있어”라며 바쁘게 영사실로 들어간다.

요즘 그는 공연실황 영상을 돌려보며 고등학교 때 가졌던 캄보밴드의 꿈을 되새긴다. 일흔의 나이에도 캄보밴드에 대한 열망은 계속되고,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를 전달하던 즐거움도 계속되고 있다. 이룬 것이 많아서가 아닌, 이룰 것이 많은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