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냐 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쌀이냐 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4.06.03 17:11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른 농경전통이 문화적 차이로
‘나보다 우리’ 문화는 쌀농사 덕분
과학칼럼니스트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는 모내기철이다. 농부들은 겨우내 말랐던 논에 물을 대고, 써레로 논바닥을 고르고 흙을 부순다. 그렇게 만든 무논에는 흙도 물도 고요히 가라앉아 모 심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모내기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다. 새파랗게 자란 모판을 들어 논둑에 쌓고 줄에 맞춰 모를 논에다 꽂는다. 노래를 불러가며 구호도 외쳐가며 손발을 척척 맞춘다. 내 일 네 일이 없는 이런 농촌의 모습은 우리에게 꽤 익숙하다. 오랫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쌀을 농사지어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방식은 나보다 우리를, 부분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문화를 발달시켰다.

동서양의 다른 사고방식

기차, 버스, 철길.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셋 중 둘만 묶으라는 실험을 해보자. 그러면 흔히 동양인은 기차와 철길을, 서양인은 기차와 버스를 짝짓는다. 개와 토끼, 당근이라는 보기를 줄 때도 동양인은 토끼와 당근, 서양인은 개와 토끼를 묶는다. 동양인은 ‘철길 위에 달리는 기차’나 ‘당근을 먹는 토끼’라는 식으로 기능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반면, 서양인은 ‘교통수단’이나 ‘동물’이라는 추상적인 공통점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문화권 전체에 나타난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부분보다 전체를,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한다. 이들은 대게 협동심이 강하고 상호의존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유럽을 비롯한 서양 문화권에서는 추상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하며, 개인적인 경향이 있다.

재배작물이 동서양 갈랐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동·서양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은 ‘근대화 이론’인데, 부유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더욱 분석적이고 개인주의적이 된다는 내용이다. 동양에 비해 서양이 먼저 산업화에 성공하고 교육수준도 높다는 점에서 이런 설명이 나왔다. 전염병이 흔한 지역일수록 외부인에 배타적이고 ‘끼리끼리 문화’가 강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른바 ‘병원체 유행 이론’이다.

최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는 두 가지 가설을 물리치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했다. 동·서양 문화권이 나뉘는 이유가 재배작물의 종류에 있다는 ‘쌀 이론’이다. 미국 버지니아대와 중국 베이징사범대 등 국제 공동연구진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쌀을 길러 먹는 사회가 더 상호의존적이고, 밀농사를 짓는 사회가 더 독립적이다. 농작물이 ‘쌀이냐 밀이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도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연구진은 “쌀농사는 수 세대에 걸치면서 집단주의를 낳았고 ‘쌀 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한 데는 쌀농사에 사회적인 도움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벼는 물이 고인 논에서 자라므로 물을 끌어오고 공급하는 관개기술이 필요하다. 물을 끌어오려고 물길을 내는 일에는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하고, 끌어온 물을 여러 농가가 나눠 써야 한다.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협동과 집단을 중시하는 정서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물이 없는 맨땅에서도 잘 자라는 밀농사의 경우 쌀농사의 절반 정도 되는 노동력만 있으면 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도 충분히 경작할 수 있으므로 물을 끌어오는 수고가 필요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같이 일하거나 모여 살지 않아도 되고, 이것이 개인적인 생활 방식을 발달시키게 됐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 전라남도농업박물관
쌀농사 지역 학생, 사회관계도서 자신 작게 그려

미국 버지니아대 토마스 탈헬름(Thomas Talhelm) 연구원은 쌀 이론은 검증하기 위해 세 가지 심리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쌀과 밀을 모두 재배하는 중국을 대상 지역으로 삼았다. 역사와 기후 등을 공유하면서 재배 작물만 다른 지역을 고른 것이다. 중국에서 쌀농사는 대부분 남부지방에서 이뤄지고, 밀은 주로 북부지방에서 재배한다.

실험에 참가한 중국 대학생 1,162명은 모두 한족으로 구성됐다. 혹시라도 재배작물 외에 다른 부분에서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다. 실험참가자들은 우선 ‘기차, 버스, 철길’ 같은 세 단어 중 둘을 골라 묶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쌀농사 지역의 학생들이 밀농사 지역의 학생들보다 더 전체론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로 자신과 동료를 원으로 표시해 연결한 사회관계도를 그리는 실험도 했다. 이는 개인주의 의식을 측정하기 위한 것인데, 기존 연구에서 미국인과 유럽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각각 6mm, 3.5mm 정도 크게 그렸다. 반면 일본인은 자신을 더 작은 크기로 그렸다. 이 실험 결과에서도 쌀농사 지역에 사는 학생들이 더 작은 원으로 자신을 그렸다. 결국 쌀농사 지역 출신 학생들에게서 밀농사 지역 출신 학생들보다 동양 문화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 연구에서 1인당 GDP나 전염병 발병 규모 등의 자료도 분석했지만, 의미 있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탈헬름 연구원은 “그동안 교육 정도와 부의 차이, 질병의 창궐 등이 문화권을 나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재배작물이 문화권을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농사짓는 곡물이 ‘쌀이냐 밀이냐’는 간단히 무엇을 주식으로 삼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각 작물을 재배하는 방식이 조상은 물론 후손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많은 힘이 필요한 쌀농사는 사람들을 모아서 돕게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어가는 밀농사는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발전시켰다.

더 이상 농경이 중심이 아닌 현대를 살지만 두 작물을 기르면서 얻은 각 문화권의 장점은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밥도 빵도 주식으로 먹는 시대에 굳이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갖되,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력까지 갖춘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