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 이름 내건 구조조정 백태
‘희망퇴직’ 이름 내건 구조조정 백태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4.09.0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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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에선 이미 일상화 … 개별 대응 어려워
성과관리·신 마케팅 전략, 구조조정 기법 진화 중
[분석 2] 금융권 구조조정

증권사와 보험사를 시작으로 금융권의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고용 상황은 한여름 더위가 무색하게 얼어붙고 있다. 8월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7월 금융·보험업 취업자 수는 84만5천여 명으로 나타났다. 2013년 7월에는 89만4천여 명이었다. 1년 사이 금융·보험업 취업자 수는 5만 명이 줄어들었다.

ⓒ 사무금융서비스노조

금융·보험업종 종사자 1년 만에 5만 명 감소

증권사에서 시작된 금융권 구조조정의 한파는 보험사는 물론 은행권의 목전에 와 있다. 이미 상반기에만 매각을 앞둔 동양증권이 전 직원의 1/4 규모인 650명 이상을, 3월에는 부국증권이 전 직원의 1/3 규모인 45명을 희망퇴직 형태로 내보냈다.

이후로도 삼성증권에서 300명 가량이, 하나대투증권에서도 145명이 희망퇴직으로 일터를 떠났다. 우리금융 민영화와 맞물린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에서도 합병을 앞두고 각기 412명, 196명이 희망퇴직으로 내몰렸다. 대신증권 역시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실시해 350여 명을 떠나보냈으며, 최근엔 현대증권과 HMC투자증권에서도 200여 명, 250여 명씩 희망퇴직을 받았다.

보험업계 역시 구조조정 한파를 비껴가지 못했다. 삼성생명에서는 희망퇴직, 자회사 이동 등으로 1000여 명의 인력이 구조조정 됐다. 한화생명 역시 희망퇴직, 전직지원 등으로 300여 명을 줄였다. 교보생명은 지난 6월 명예퇴직과 창업휴직 등으로 590여 명을 정리했다.

ING생명은 40여 명의 임원 중 부사장 2명을 포함해 18명을, 본사 부장 70여 명 가운데 35명을, 평직원은 전체 인원의 1/5인 150여 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냈다. 우리투자증권과 마찬가지로 우리금융 민영화 이슈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아비바생명도 NH농협생명과 합병을 앞두고 입사 1년차 이상 직원 105명이 일터를 떠났다.

앞서 언급했던 금융, 보험업 취업자 수 감소폭은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불어 닥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극심했던 2009년 이후 가장 크다. 특히 유심히 살펴볼 지점은 전년 동월 대비 감소폭이 4월에는 1만 명, 5월에는 2만9천 명, 6월에는 4만8천 명으로 점점 확대되는 추세란 점이다.

ⓒ 사무금융서비스노조

희망퇴직 대상자는 미리 정해져 있다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위원장 김현정)는 증권·보험업계를 포함한 금융권의 최근 구조조정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사측이 일방적인 희망퇴직 인원을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추진해 나간다는 점이다.

미리 목표 인원은 물론, 대상자를 선정해 두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집요한 회유와 강요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희망퇴직’이라는 제도를 통해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만큼, 전체 직원을 대상으로 한 안내와 개별 면담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데,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 직원에게는 대상자가 아니면 희망퇴직에 응하지 말라고 공지하고, 대상자에게는 희망퇴직에 응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구조조정의 목표 대상자에게는 인격적인 모멸감과 압박을 가하는 방식으로 ‘희망’하지 않아도 퇴직을 선택하게끔 만든다는 의미다. 원격지 발령이나 급여 삭감 등 회사에 남아 있더라도 처우나 환경이 심각하게 저해될 수 있다는 협박도 은연중에 가해진다고 노조는 증언하고 있다. 구조조정 목표 대상자가 희망퇴직 의사가 없음을 밝히더라도 8~9차례까지 집중 면담을 실시하면서 직장 내에서 대상자를 위축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한다.

또 구체적으로 영업점이나 부서 통폐합을 이유로 목표 대상자를 실제 원격지 발령을 내리거나 대기발령을 내겠다고 압력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저성과자 관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새로 부서를 신설해 인사발령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와 같은 인사발령은 업무 상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목표 대상자가 된 개별 노동자에게는 심각한 불이익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근로조건을 개별 목표 대상자들에게 불이익하도록 변경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노사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절차는 무시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근로기준법에서 취업규칙을 작성하거나 변경하기 위해 근로자의 의사 반영과 같은 일정한 절차를 필요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반영되지 않는다.

우리투자증권에서는 저성과자 관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새 부서를 신설하는 것 자체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사례라며 노동조합이 고용노동부에 해당 사안을 고발한 상황이다. 취업규칙을 새로 작성하거나 그 내용을 불이익하게 변경할 경우에는 노동조합이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피해 당사자가 구제신청을 한 이후에야 해당 사안이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 사무금융서비스노조

ODS, 구조조정의 새로운 창구?

증권사와 보험사에 몸담은 이들에게 희망퇴직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희망퇴직이 진행됐던 경험도 있다. 노동계는 이미 희망퇴직이란 이름을 빌어 구조조정이 일상화, 상시화 되었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금융권의 구조조정과 관련해 새로운 단어가 대두되고 있다. ‘ODS(Outdoor Sales)’가 바로 그것이다.

극심한 업황의 부진으로 고전하고 있는 증권사들이 새로운 영업 활로로 모색 중인 ODS가 구조조정의 최첨단 기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ODS는 말 그대로 증권사 영업 직원이 고객을 찾아다니며 발로 뛰는 영업을 가리킨다. 영업지점을 찾는 투자자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가운데 고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증권사들이 활로로 마련한 마케팅 전략이다. 최근 태블릿PC 등의 휴대용 디바이스가 발달하면서 ODS는 더욱 매력적인 영업 방식으로 일견 읽힌다.

남들이 하는 것을 뒤따라가는 것만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첨단을 달리는 증권업계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이미 대다수 증권사들이 스마트폰 등의 기기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2011년 즈음부터 수십억 원의 비용을 들어 ODS를 위한 시스템 구축에 들어갔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이런 휴대기기를 통해 계좌 개설이나 금융상품 판매 등의 ODS를 하기 위한 법적 기반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현 법률상 고객은 2주 내 환불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2주 사이 펀드의 수익률이 하락한 경우를 보아 가며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처럼 실질적으로 ODS가 활용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필요가 있는데,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은 1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비용을 들여 신설한 ODS 부서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우리투자증권의 경우 희망퇴직 신청을 한창 진행하던 도중 ODS 부서를 신설했다. 그리고 60여 명을 해당 부서로 발령 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노동조합이 ODS를 구조조정의 새로운 창구라고 부르는 이유다.

ⓒ 사무금융서비스노조

회유와 협박, 조합원은 흔들린다

희망퇴직을 빌미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에 개별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매우 힘겨운 상황이다. 집중 면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상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약간의 물질적 보상으로 결정타를 날린다. 조직 안에서 불필요한 인간 취급을 받는 데서 오는 모멸감과 회의로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지금 기회가 아니면 이마저도 챙길 수 없다는 회유가 밀려오면 이를 거부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희망퇴직을 고객에게 상품 팔 듯 유혹하는 것이 최근 금융권 구조조정의 백태다. 7월 18일부터 29일까지 약 30% 인원 감축을 목표로 희망퇴직을 실시한 ING생명보험에서는 노동조합이 해당 사안에 대한 협의를 거부하자 희망퇴직의 조건을 높였다. ‘과장은 1개월, 차장은 3개월, 근속 10년 이하는 1개월, 10~15년 근속은 2개월, 15년 이상 근속은 3개월분의 급여를 추가로 지급하겠다.’ ‘근속년수의 1.25배에다가 10개월분의 급여를 더해, 최대 36개월분의 급여를 주겠다.’ 희망퇴직 신청자를 늘리기 위해 회사가 내민 조건들이다. 7월 18일에는 전 직원 면담에 들어가면서 “23일까지 희망퇴직을 신청하면 여행자금 500만 원을 추가로 주겠다”고 제시하기도 했다.

교보생명보험 역시 일정 기간분의 급여로 계산한 보상금과 학자금, 3~5년 간의 연금지원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씨티은행 역시 최대 60개월분의 급여를 보상금으로 내건 ‘파격적인’ 조건으로 당초 목표로 했던 희망퇴직 인원을 채울 수 있었다. 이런 조건 외에도 3일 내 희망퇴직을 신청하면 200만 원 상당의 여행상품권을 추가로 지급하는 등 ‘희망퇴직 마케팅’에 나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금융노조 씨티은행지부(위원장 김영준)는 쟁의행위 절차에 돌입하는 등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막을 수 없었다.

‘찍퇴’라는 표현처럼 퇴출 대상자를 지속적으로 면담, 회유 등의 압박을 가하는 부분 역시 노동조합의 입장에선 강하게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기가 어렵다. 금융권 노동계의 한 인사는 “개인적인 성향이 짙은 조합원들의 마음을 한 곳에 모을 만큼 노동조합의 역량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노사관계에 있어서 힘의 균형추가 사측으로 급격히 쏠리는 분위기를 진즉 읽은 조합원들은 노조가 버팀목이 될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면서 제 살 길을 찾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도 산하 지부들 중 신생 노동조합이거나 규모가 작은 곳들 중 노동조합이 사측의 전면적인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고 밝혔다.

희망퇴직을 통해 구조조정이 휩쓸고 간 증권, 보험업계에서는 노동조합의 힘만으로 이를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고 있다. 이들이 산별노조나 연맹 차원에서 국회나 시민사회단체, 언론 등 대외 활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다.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는 지난 8월 7일 국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우원식 의원(환노위), 은수미 의원(환노위), 김기준 의원(정무위)과 투쟁사업장 현안해결을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간담회에는 특히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ING생명보험, AXA손해보험, 하나SK카드, HMC투자증권, 대신증권 등의 노조 대표자들도 자리했다.

이는 결국 금융권의 일상적인 구조조정에 대해 법, 제도적 방지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김현정 위원장은 “상시적 구조조정을 막아낼 법과 제도가 없다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회유와 협박, 원거리 발령 압박에 버틸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사측의 구조조정 압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취업규칙의 변경, 부당한 인사조치 등을 관리, 규제할 감독기관의 책임에 대해서도 공감대를 이뤘다. 특히 AXA손해보험지부(지부장 정태수), 하나SK카드지부(지부장 김동훈), HMC투자증권지부(지부장 노명래), 대신증권지부(지부장 이남현) 등지에서는 노조의 쟁의행위를 막기 위한 부당노동행위가 의심된다는 점 등은 향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