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의 업적주의가 문제, 상대를 이롭게 하는 대화 필요
관료의 업적주의가 문제, 상대를 이롭게 하는 대화 필요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06.0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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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부정적이지 않다 … 예측가능하게 관리해 Win-Win 관계로
테크닉으로 관계를 푸는 건 싫다 … 결국 진정한 마음이 통한다
[호모파베르 VS 호모루덴스 3편] (2) 관계, 콕! 콕! 찌

이정식 한국노총 사무처장을 여름의 길목에서 만났다. 한국노총과 관계를 맺은 지 어언 서른 해란다. 숱한 갈등의 현장에서 단련된 그는 갈등해결전문가이기도 하다. 관계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인생은 무수한 관계 속에서 희로애락이 교차한다. 이정식 사무처장도 30년간 쉼 없이 노동과 어우러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에게 가장 풀기 힘든 관계는 가족관계다. 6월에 군입대를 한다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 자존심과 자신감으로 빈틈없을 것 같은 그의 눈에 얼핏 물기가 머물렀다. 이야기는 최근 파국을 맞은 노사정 관계까지 이어졌다. 이정식 사무처장의 목소리에는 제대로 된 노사정 관계 복원을 위한 결기가 흘렀다. 물론 시간이 필요하다. 여름 지나 가을 초입에는 아름다운 관계, 올바른 동행이 산들바람과 함께 찾아오길 바란다.

ⓒ 김효진 객원기자 kkimphoto@gmail.com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가장 억세고 질긴 관계가 한국노총이지 않는가. 처음 한국노총에 왔을 당시 뛰어난 인재가 왔다고 기대를 받았다.

“어떤 선택을 하면 그 선택은 이미 다음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학술적으로 경로의존성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인연이라고 한다. 우리 세대가 그렇지만 나 또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해서 판검사 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겠다고 생각했다. 1등만 바라보고 공부만 했는데, 내가 80년대에 대학에 합격해 서울에 올라오니 이것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학내 서클에 들어가 한국사회를 깨닫고 나서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제껏 내가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으니 이제 내가 이 사회에 무엇인가 돌려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도 여러 고민 끝에 노총을 선택했다.”

30년에 달하는 한국노총과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나.

“자신의 얼굴은 40~50대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저기 전태일 열사 사진이 있는데, 내가 힘들 때 친구가 ‘지금 네 얼굴에는 전태일이 있다’는 말을 했다. 노동운동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열정, 애정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하다보면 본말이 전도돼서 분노나 증오가 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내 친구가 내게서 그런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아차 싶었다.

사회를 바꾸자는 뜨거운 사랑, 열정이 노동운동을 하게 된 계기였는데 그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노총 간부들은 이제 나가서 큰일도 하고 그러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노총에 남아서 반듯하게 재정자립, 정치세력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내가 경기지방노동위원회도 가고 교수도 하고 장관 보좌관도 했지만 마음의 고향은 늘 노총이었다. 항상 노총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하고 노총이 건강하게 되어야 이 나라가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2004년, 잠시 노총에서 나올 때에도 노총에 누를 끼치지 않는 길은 내가 교수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가면서 노총 홈페이지에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딱 세 줄을 남겼다. 고마운 것은 내가 노총에 있어 지금까지 나름 노동운동이라는 일관성을 지키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고맙고, 사랑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일 해왔던 곳에 대한 당연한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30년 동안 전국을 돌며 노동자들한테 했던 여러분들과 함께 가겠다는 책임의식, 끝까지 함께한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디서나 ‘나는 노총 사람이다’고 말했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노동자의 입장이 공익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갈등해결전문가다. 중요한 노사갈등 사안을 슬기롭게 풀었다는 평이 있다.

“88CC 사건. 이곳은 정말로 갈등이 심한 사업장이었다. 분쟁이 오래되었는데 내가 경기지노위에 있으면서 캐디의 노동자성부터 시작해서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노동조합 등을 모두 인정했다. 그 결정이 내려지고 나서 언론부터 그 지역 공안검사까지 잘했다고 전화를 걸어 왔다.

다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기간제 노동자 차별시정법을 만들었을 때 최초로 철도공사 기간제노동자 문제가 불거졌다. 그때 중노위부터 노동부까지 차별시정법 관련 첫 번째 사건이기에 관심이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각하해야한다고 주장할 때, 이 법 취지를 이해하는 법학 교수들로 위원을 구성하고 함께 밤낮으로 연구해서 논리를 만들었다.

지노위에서 각하되지 않고 다룰 수만 있으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결국 지노위에 올렸고, 기간제 노동자가 이겼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언론, 정치권에서 난리가 났다. 난 한국노총과 노동운동을 보고 나아갔다. 고등법원에서는 패소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노동계가 승소했다. 그 당시 관계된 사람들이 나에게 메일을 다 보내줬던 것이 기억난다. 역사적인(?) 그 날을 기억하는 ‘1010’(2007년 10월 10일 판결) 모임도 있다.

처음 내가 경기지노위에 갔을 때, 민주노총 측 위원들은 위원회와 술은커녕 밥도 안 먹었다. 내가 환경을 만들어서 지금은 사이가 좋다. 그 모든 것은 내가 한국노총에서 시작해서 노동자들에게 책임지고 애정을 가지고 하겠다는 말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것은 노총 출신이기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안에 있어 노동자의 생각이나 행동이 늘 정의고 옳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이도 들고 공직도 다녀오면서 더욱 대안과 균형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최저임금위원회나 노사정위 가서도 나는 가끔 공익이라고도 말한다. 내 주장이 노동자 편향이 아니라는 역설이기도 하다. 딱히 노동자를 대변한다 말하지 않는다. 노동위원회에서도 나는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업무를 처리했다. 내가 만일 노동자에게 잘못이나 문제가 있는 사건을 부당해고나 부당노동행위라고 인정해준다면 상급심에서 깨질 경우 궁극적으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인생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을 막고자 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올리려고 하면 중소 영세기업 사용자들은 자신들이 망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최저임금은 올리면서 사용자의 문제를 같이 풀자고 말한다. ‘당신들의 문제는 최저임금을 안 올리거나 적게 올린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고 대기업의 횡포와 갑질, 임대료문제, 원·하청 문제 등 정권과 대한민국 구조의 문제다. 최저임금 올리면서 우리 모두 함께 문제를 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전에 경기지노위 면접 때 노민기 당시 노동부 차관이 말했다. ‘전문성에 대해서는 천하가 모두 이정식을 알아준다. 그러나 당신은 노동자 출신이다. 노동위원회는 공정성, 균형감각이 최고의 덕목이다. 당신이 아무리 공정하게 했다 하더라도 사용자들의 불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날카로운 말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 김효진 객원기자 kkimphoto@gmail.com

집에서는 초라해지는 갈등해결전문가

숱한 관계를 맺고 있을 텐데, 가장 풀기 힘든 관계는 누구인가.

“내가 오랜 시간 노총에 있었고,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서도 일하고, 건설교통부 장관 보좌관도 지내며, 다양한 갈등과 협상 상황을 겪었다. 선진사회는 갈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예측가능하게 관리해 서로가 윈-윈 하도록 풀어간다.

나는 이런 갈등관리 분야에 자신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노동위원회 등 갈등해결 기구가 필요 없는 사회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남의 도움 없이 갈등을 푸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차선책으로 한 번 노동위원회에 온 사람들은 다시 오지 않도록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장 고기를 잡아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고기 잡는 법 또는 그물 만드는 법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름 갈등해결전문가라고 여겼는데, 자식하고의 갈등은 답이 안 나온다. 내가 갈등해결 전문가로 제대로 살아온 것이 맞나 싶은 자괴감이 들 정도다. 자식문제는 참 어렵다.”

정부, 재계와 관계뿐 아니라 노조 내부의 관계도 쉽지 않다. 관계를 푸는 기술이 있는지.

“테크닉이라는 말을 나는 굉장히 싫어한다. 학창시절에 결혼과 연애 및 인간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연애도 기술이라고 했던 여자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난 마음이 9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해한다. 결국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전달 못하면 꽝이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는 공감이라고 하는데 마음을 가지고 대화하면 통한다. (서로 통하기까지) 더디다 빠르다 차이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상대 입장에 서보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경청하면 그게 답이다.

처음 노총에 와서, 노조 사람들에 대해 두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일단 믿는데 오랫동안 노동조합 했던 분들은 잘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언제나 비비 꼬아서 생각하고 의심부터 하는 듯하다. 하긴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것이 어른이 되었다는 증좌라는 말도 있긴 하다. 왜 그럴까, 나중에 이해하게 된 것이 현장에서 교섭할 때, 항상 어렵다고 엄살 부리며 거짓말하는 기업 측 사람들하고 상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두 번째로 (그 사람이) 자리에 없으면 심하게 욕을 하다가도 만나면 반갑게 얼싸안는 모습을 보면서 황당했다. 처음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도 이해가 된 것이 노조 안에도 이른바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란 걸 깨우치고 나서다. ‘표’와 원칙 및 일관성, 그런 문제라고나 할까.”

상대에게 도움 되는 비판과 제안

정책파트에서 오래 일했고, 여러 위원장을 보좌했다. 역대 위원장들 사업방식이나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일관성 있게 정책을 끌고 나가는 일도 쉽지 않다.

“위원장들과 관계에 있어서 젊을 때야 조급했지만, 지금은 기다리고 설득한다. 원칙을 세우고 상대가 납득할 수 있는 논리, 역지사지의 관점을 유지한다. 뭔가 요구를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상대의 관점에서 일을 풀어야 한다. 내 입장을 가지고 위원장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거다.

위원장 등 임원이 TV토론회에 나갈 때 내가 부탁 내지는 조언을 한다. 전문가들이 유식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김치 값 이야기, 교통비 이야기, 현장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또, 언제나 사안에 대해 거꾸로 뒤집어서 봐야 한다고. 사용자가 임금이 오르면 물가가 오른다고 말하면 물가가 올랐으니 임금을 올려달라고 말하고 임금이 오르면 경쟁력이 떨어진다 말할 때, 임금이 많아지면 생활안정은 물론, 직장만족도 및 충성도 제고, 능력개발 및 향상으로 열심히 제대로 일하게 되어, 결국 경쟁력이 올라간다고(고임금의 경제학).”

이번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위한 노사정 대화가 결국 결렬됐다.

“한국에서 노사정 대타협이 힘든 까닭은 정치권의 무능, 관료의 무책임, 언론의 천박함, 기업인들의 탐욕, 지식인들의 비겁함, 노조의 단기집착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는 죄수의 딜레마처럼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구성의 오류다. 그 고리를 푸는 게 주어진 과제다.

나는 한국사회가 너무 조급하다고 생각한다. MB, 박근혜 정권 7년을 겪으며 우리가 민주화부터 천천히 쌓아왔던 가치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우리에게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생활화,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 정신이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존중과 인정, 토론과 투쟁 같은 시민의식이 배양되지 않으면 공든 탑이 무너지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이번 노사정 대화에서 ‘나는 노총한테 다줘라. 한국노총 조합원들과 국민들에게 믿음을 심어줘라, 그래야 그 신뢰를 통해서 노사정이 함께 나갈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나 사용자에게) 당했다, 이용당했다는 노총의 상처를 씻겨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를 못했다. 거의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일의 성사여부가 대통령에게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관료들이 대통령의 눈치만 보는 상황, 잘못된 정보가 VIP에게 입력된 상황에서, 노동계의 제대로 된 목소리 또는 올바른 정책대안이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것은 협상 성공에 있어 필수적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 내가 대통령과 한국노총 간의 핫라인을 개설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결렬됐다.

노사정대화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도 없고, 사회적 대화를 위해 필요한 것도 모르면서 대통령 말은 무슨 수를 써서든 해내려는 관료들의 단기 업적주의였다. 다소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현안을 풀어가야 하는데 합의가 안 되니 밀어붙이겠다는 정부의 자세는 문제다. 그러면 앞으로 사회적 대화는 영영 불가능하다. 모두가 알고 지지하도록 천천히 가더라도 제대로 가야 하는데 정부에서 길게 보지 않고 단기간의 업적만을 중시해서 안타깝다.”

ⓒ 김효진 객원기자 kkimphoto@gmail.com

공감대 만들어 진정한 대화 이어가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한국 사회 전반을 따져보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문제 즉, 현실인식 및 진단과 처방에 대한 공감대, 서로에 대한 신뢰,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공공성. 그것을 통해 타협을 도출한다면 국민들도 지지하고 잡음도 줄어들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중구조, 양극화가 심각하다면 기업 규모별, 고용 형태별, 남녀별, 모두 펼쳐서 어디가 문젠지, 원인은 뭔지, 만일 노동조합이 과보호된다면 그것도 드러내놓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반대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너무 적게 조직되어 있으니 비조합원들도 조직을 하게 만드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안정을 선호하고 불확실성을 두려워한다. 또 잘 한 것에 대한 평가엔 인색하고, 못한 것 혹은 양보에 대한 비판은 엄격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 패키지 딜은 어렵다. 즉, 현재의 조건에서 볼 때, 사회적 공감대(social consensus) 형성이 아닌, 사회적 대타협(social compromise)을 목표로 한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는 성공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정식의 ‘관계’

이정식은 자타가 공인하는 갈등해결전문가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갈등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직시한다. 이정식은 말한다. 관계에서는 갈등이 발생한다는 걸 인지하고, 그 갈등을 예측가능하게 관리해야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관계 속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느 일방이 이기는 게 아니라 서로가 발전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어야 선진화된 사회다. 그는 경기지방노동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내며 꼬일 대로 꼬인 분쟁사업장 문제를 슬기롭게 조정해 전문가다운 솜씨를 뽐냈다.

갈등해결전문가인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관계는 누굴까. 정부도, 경영계도 아니다. 바로 아들이다. 자식과 관계, 자식과 갈등해결에는 절절맨다. 올 6월, 그 갈등관계의 아들이 군에 입대를 한다. 자신이 갈등해결전문가라고 생각했는데, 집안에서 맹탕이었다고 후회한다. 그는 말한다. 이 갈등이 힘들었던 이유는 대화를 못했고, 대화를 하더라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정식의 관계에서 한국노총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어느덧 서른 해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2등은 없었다. 늘 성적은 수석이었다. 한국에서 첫째가는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의 인생은 바뀐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제껏 자신이 한국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헛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늘 1등할 때, 2등한 친구들의 심정도 그때 생각했다. 판검사가 되어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이정식의 꿈은 이제껏 내가 받은 혜택을 어떻게 사회에 돌려줄 것인가를 고민하며 바뀐다. 그 고민 끝에 맺은 관계가 한국노총이다.

이정식이 처음 한국노총과 관계를 맺은 1986년은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전이다. 민주화운동이 들끓기 시작했고, 이듬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6월 항쟁과 이어서 진행된 노동자대투쟁은 한국노총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에 이정식은 뛰어들었다.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는데 한국노총은 개점휴업상태였다. 노총의 ‘노’에 늙을 노(老)를 써야 할 판국이었다. 변화와 개혁은 젊은 피를 요구했고, 이정식은 그 새 물결을 두려움 없이 맞이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이정식은 교수로 가든, 건설교통부장관 정책보좌관을 하든, 고위 관료 녹을 먹든 ‘나는 노총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국노총과 맺은 이 억세고 질긴 관계에서 이정식은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