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에게 노동이란 희망이다
60대에게 노동이란 희망이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5.07.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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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층은 어둡고, 중장년층은 그래도 희망이라고 말한다
노동은 눈꺼풀·미련함 ·도전·○○·희망의 디딤돌이었다
[호모파베르 VS 호모루덴스 4편] (1)노동, 톡! 톡! 말하기

“여기가 내 평생직장이다. 잘해야겠다. 다짐했죠. 일에 대한 보람도 그때부터 느꼈고요.”

모처럼 비 소식이 있는 날이다. 이 고마운 비를 우산으로 가려야 되겠나 싶어 우산을 책상 위에 놔둔 채 녹음기와 카메라를 챙겨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이라지만 공항철도 덕에 서울 여느 곳 취재 가는 길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인터뷰가 끝난 뒤, 갑작스레 이십대 취재가 잡힌 덕에 이날 부산 가는 시간보다 더 긴 이동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비를 머금고만 있지 쏟아내지 않으니 후텁지근했다. 다행히 약속 장소는 에어컨 덕에 뽀송뽀송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육십대(62, 택시기사)는 공직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데, 오늘이 비번이다. 출발 전, 전화를 했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십대도 전화를 받지 않아 다급했는데, 육십대마저 전화가 불통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육십대를 소개해 준 이에게 SOS를 보냈더니 걱정 말란다.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니고, 지금 산에 가서 전화가 터지지 않을 수 있으니.

ⓒ 오도엽 객원기자 dyoh@laborplus.co.kr
첫 월급 1,000원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육십대가 도착했다. 질문지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혹시…”

“아, 육십대님.”


커피전문점에는 처음 오신 듯하다. 뭘 드시겠냐고 물으니, “(주문받으러)오면 주문하죠” 한다.

“주스가 좋으세요, 커피가 좋으세요.”

“커피요. 냉커피.”

육십대는 아이스, 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좀 쓰실 수도 있는데, 시럽을 타 드릴까요? 한번 드셔보세요.”

한 모금 마신다. 쓸 것 같은데 괜찮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단 게 당길 텐데 말이다. 산골에 살 때에 마을 어르신들은 봉지커피에다 설탕을 한두 스푼 더해서 타드려야 커피 맛나게 탄다고 칭찬을 했는데.

“제가 학벌이 없어가지고.”

육십대는 서울 방화동이 고향이다. 부모님은 친척 논 열 마지기를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도지를 주고나면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엎친 데 덮친 꼴로 육십대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열네 살 육십대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형님이 사는 망원동으로 와서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육십대의 첫 직장은 앨범공장이었다. 한 달 월급이 1,000원이었는데, 당시 소두로 쌀 한 말 사면 끝이었다. 육십대는 월급을 받으면 쌀을 사서 형수에게 주었다.

“앨범공장에서 심부름부터 했지. 조각한 나무로 테두리를 만들어 거울을 끼우는 곳도 댕기고. 별놈의 곳 다 댕겼어요. 아들한테는 무슨 일 했는지 이야기 안했어요. 내가 중학교 못 간 것은 알지만 내가 무슨 일하며 살았는지는 (자식들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어요. 하다못해 농구공 만드는 데도 댕기고, 공사장에서 들통도 져보고, 가구공장에도 댕겼어요.”

가구공장에서는 도장반 작업반장을 했다. 하지만 시너와 같은 유기용제를 다루고, 힘든 노동이 끝나면 술로 피로를 푸는 생활의 연속이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20대 중반인 1978년에 운전면허를 땄다. 그렇게 운전을 시작했는데 이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총무과장을 태우고 다녔는데, 멀쩡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뒤에서 욕에 손찌검을 해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만 두고 젖소도 키우고 용달차를 사서 몰기도 했다.

5년만 더, 5년만 더

그러다 친척의 도움으로 1986년 상수도를 관리하는 곳의 고용직으로 취업해 운전을 했다.

“당시 고용직 공무원 급여가 박봉이었을 텐데요? 고용직에 대한 차별도 심하고.”

“그래도 딴 일 할 때보다 차이가 많더라고요. 좋더라고요. 일단 뭐라고 그래야 하나. 사람이 대우가 달라지더라고요. 신분이 달라지고. 아무튼 좋더라고요.”


서른 살이 넘어 기능직 공무원이 됐더니 초등학교 학벌로 공장에서 일할 때하고는 ‘신분’이 달라졌다. 당시 공무원 급여가 박봉이라 살림을 꾸리기 힘들었다. 아내가 방 한 칸에 점포가 달린 곳으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문방구를 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육십대는 2014년 6월 정년퇴직을 했다. 28년 근무를 해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30년을 채웠으면 대통령 표창을 받았을 건데, 2년이 부족했다.

“6월 달에 정년퇴직을 하고 한 달 반을 쉬었어요. 죽것더라고요. 내가 산을 좋아해 매일 산에 다녀왔어요. 갔다 오면 정오나 한 시쯤 되걸랑요. 점심 먹고 차 한 잔 마시고 졸리면 잠 한 숨 자고. 그럼 또 저녁 먹잖아요. 아이쿠, 이거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차(개인택시)를 사버렸어요.”

“평생 운전을 했는데, 정년퇴직 뒤에도 운전을 하는 게 지겹지는 않으세요.”

“지겹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재밌어요. 체력이 되면 계속 하려고 그래요.”

“직장생활 할 때, 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하잖아요.”

“그런 생각 들었죠. 막상 (퇴직 시기가) 되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퇴직이 점점 다가오니까, 일을 더하고 싶더라고. 쉰일곱일 때는 예순 두 살까지만 일했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예순이 되니까 예순다섯까지만 했으면 좋겠다 하더라고.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잖아요. 한 5년만 더. 5년만 더 직장에 다녔어도 택시를 안했을 것 같아요.”


육십대가 예순다섯에 퇴직하면 그냥 집에서 쉬었을까?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육십대가 현재 운전대를 잡는 까닭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딸아들, 두 자식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한다. 공무원연금이 있으니 노후 걱정도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체력이 더 할 수 있으니까, 아직은 더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더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지. 개인택시가 힘들긴 해요. 직장생활보다 더 힘들어요. 쉬는 날 내가 좋아하는 산에 가기도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니까 좋아요.”

육십대는 하루 10시간 정도 운전을 한다.

“어릴 적에 꿈은 없었어요?”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있죠. 가수요. 제가 잘은 못 부르는데, 꿈은 가수였어요. 20살 때인가, 총각 때 작곡가도 찾아갔어요. 양복도 구두 같은 것도 없어 고무신 신고 갔더니 작곡가가 ‘돈이 없어서 구두도 못 사 신었네’ 그러더라고요. 작곡가가 가수되고 싶으면 돈 좀 가져오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섰죠.”

가수가 못 된 게 한으로 남았냐고 물었다.

“한까지는 아니고 꿈을 못 이뤘으니까. 다시 태어나면 가수 꼭 해야지요. 다시 태어나면 가수 할 거예요.”

“가수 못된 게 많이 억울하신가 보네요.”

“많이 억울해요. 아니 제가 의지가 약했다고 봐야죠. 그래서 생각중이에요. 지금이라도 악기를 배워야겠다…, 색소폰을 배울 거예요.”

자랑스럽지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다

“열네 살 때 교복입고 학교 다니는 친구들 보고 그러면 가난했던 부모님 원망하고 그러셨을 텐데.”

갑자기 육십대의 눈이 붉어지고 촉촉이 젖는다.

“아 그렇죠. 어렸을 때는 원망을 많이 했어요. 중학교 못 들어가고, 원망 많이 했어요.”

“공부를 더 하시고 싶었죠?”

이 말에 육십대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만다.

“아, 죄송합니다.”

바지춤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다.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숨을 고른 육십대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 당시에는 제게 공부라는 게 없었어요. 한 끼 먹는 게 저거(목표)였으니까. 먹고 사는 게…. 지금은 부모님 원망 안 해요.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살아온 삶을 자제분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난 부끄럽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자랑스러울 것까진 없지만. 열네 살 때부터 한 십년간 제일 힘들었어요. 연탄가스에 죽을 뻔도 하고.”

“기능공무원이 될 때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여기가 내 평생직장이다. 잘해야겠다. 다짐했죠. 일에 대한 보람도 그때부터 느꼈고요.”

반백년을 일만 해온 육십대에게 요즘 청년실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제가 보기에는 못 구하는 게 아니라 안 구하는 것 같아요. 기자님 만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만. 세대도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먹고 살려면 내게 맞는 직업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좀 나한테 안 맞더라도 해야 되질 않나.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운 일은 안하려고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봐요. 그리고 어려운 일을 하는 직업이 대접받는 사회가 빨리 와야 해요.”

“직장에 자식과 같은 후배 직원들도 있었을 텐데, 이런 말 하세요? 젊은 직원들 일하는 것 보면 어떠세요?”

“이런 말 하면 젊은 친구들이 싫어하죠. 못하죠. 뭐라고 그래야 되나. 우리 세대의 경우는 이 직장이 평생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젊은 사람은 그걸 따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어쨌든 하루를 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는, 그런 저기(자세)가 많더라고요. 시간 때우기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좀 나무라시죠.”

“말을 못하죠. 저 같은 경우야 (선배한테) 맞아가면서 일했지만. 이젠(요즘시대엔) 말 못하죠.”

“그래도 젊은 친구들 보면 장점이나 부러운 점도 있잖아요.”

“있죠. 젊어서 제일 좋아요. 우리세대는 선배라고 하면 어려워했는데, 요즘은 어려워하는 것 같은데도 말을 쉽게, 할 말을 다 해요. 나는 감히 못했는데. 어떤 때는 싸가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부러워요.”

육십대의 노동은 여전히 희망이다

내 전화기가 자꾸 울었다. 연락이 되지 않던 ‘무기력한 취업준비생’한테서 전화와 문자가 오는 듯했다. 워낙 어렵게 섭외한 이십대라 육십대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려던 계획은 뒤로 미뤘다.

“다음에 꼭 막걸리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홍대 쪽으로 갈 수 있어요. 기자님 바쁘실 텐데 멀리 오지 마세요. 제가 갈 테니.”

육십대에게 노동은 희망이다.

“내 몸을 써서 돈도 만들고, 건강도 챙기고, 가족도 꾸리고, 미래도 주고, 노동은 아, 희망이죠.”

<참여와혁신> 창간 11주년 슬로건 ‘노동, 희망의 디딤돌’을 육십대에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