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은 ‘도장’뿐?
필요한 것은 ‘도장’뿐?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6.03.22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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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설득 대신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밀어붙이기는 더 큰 반발 부를 뿐
마음을 모아야 혁신이다 ①

우리나라도 고도성장기를 지나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고도성장에 맞게 시스템화 된 경제 체질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때에는 상대적으로 묻혔던 양극화된 노동시장의 폐해를 지적하며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정부 주도로 이른바 ‘노동개혁’이 추진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개혁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당사자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노동개혁이 아니라 ‘노동개악’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노동개혁을 법제화하려는 입법발의안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개혁 또는 혁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참여와혁신>이 지난 1월호와 2월호를 통해 지역 차원의 혁신, 업종 차원의 혁신을 이야기한 데 이어, 이번호에서는 혁신의 조건을 짚어본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저성장과 저소비, 고실업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뉴노멀(new-normal)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 경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제성장률은 3%대로 떨어졌고, 일자리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 참여와혁신 DB
경제성장률 낮아져 고용도 악화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성장을 달성했던 시기도 있었다. 실질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를 기준으로 한 경제성장률 추이를 살펴보면, 1981년부터 2000년까지 20년간 우리나라는 연평균 8.48%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때때로 10%를 넘어서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해도 있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5.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는 대체로 보아 우리나라의 고도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경제성장률은 낮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2001년부터 세계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 7년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7%대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이라는 이른바 ‘747공약’을 앞세워 당선됐지만, 임기 첫 해인 2008년에 세계 금융위기를 겪은 후 더욱 낮아진 경제성장률을 받아들여야 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5년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2%에 그쳤다. 현 정부 들어서도 매년 ‘경제’를 핵심화두로 삼고 있지만,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93%에 그치고 있다.

올해 각 기관들이 내놓은 경제성장률 전망 역시 2.7~3.0% 수준이다. 기관들은 지난해 경제성장률 2.6%에 비해 다소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폭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은행의 전망에 따르면 실업률은 지난해 3.6%에서 0.1%p 낮아진 3.5%로 전망된다. 반대로 생산가능인구를 15세 이상 인구 전체로 계산한 고용률은 지난해 60.3%에서 0.1%p 오른 60.4%로 전망된다. 15~64세 인구를 생산가능인구로 보는 OECD 기준 고용률로 따지면 지난해 65.7%에서 올해 66.0%로 0.3%p 증가하는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경제성장률만 가지고 한 나라의 경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이 이전의 고도성장기에 비해 확연히 낮아지면서 고용을 늘릴 만한 여력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나, 경제상황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5월 기준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15~29세 청년의 고용률(전체 청년인구 중 취업자 수의 비중)은 41.7%에 머무르고 있고, 실업률(비경제활동인구를 제외한 경제활동인구 중 실업자 수의 비중)은 9.3%로 나타난다. 청년 10명 중 취업자 수는 겨우 4명뿐이고, 나머지는 구직을 하고 있지만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거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경제활동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비경제활동인구는 전체 청년 인구의 54%에 이른다.

2013년 5월과 2014년 5월, 지난해 5월을 비교하면 청년실업률과 고용률은 점차 높아지고 있고 비경제활동인구 비중은 반대로 줄어들고 있다. 기존에 경제활동을 포기했던 청년들이 점차 구직시장으로 나오고 있지만, 그들 중 구직에 성공하지 못해 실업자가 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현 정부의 청년일자리 정책이 비경제활동인구를 구직시장으로 유도했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보면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기가 그만큼 힘들어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2004년 5월과 비교하면 11년 만에 고용률은 3.5%p 낮아졌고 실업률은 1.2%p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년인구의 고용사정이 그만큼 악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4년의 GDP 기준 경제성장률은 4.9%였다. 경제성장률과 청년고용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2004년 이후의 통계를 보면 경제성장률 저하가 청년고용의 악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섬에 따라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지역이나 업종 차원에서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혁신을 시도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참여와혁신>이 지난 1월호에서 다뤘던 ‘광주형 일자리’나 2월호에서 다뤘던 ‘조선업종’에서의 모색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 참여와혁신 DB
개혁의 대상이 된 노동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혁신을 시도하는 곳에서 노동의 역할이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광주광역시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지역혁신 모델인 ‘광주형 일자리’를 예로 들어 보자. 1월호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광주형 일자리는 지역사회의 노·사·민·정 각 경제주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일자리이지만, 이를 내 문제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자신이 광주형 일자리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이를 광주광역시가 추진하는 정책으로만 바라보면서 비판을 자신의 역할로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광주형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아니라 평론가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만드는 데 참여할 만한 통로가 부족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광주광역시가 아직 출발선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른 경제주체들에 앞서 저만치 뛰어가고 있는 양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노동계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광주 지역의 노동조합들 중에서 기아자동차 광주지회가 광주형 일자리 사업과 관련한 논의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노동조합들이나 양대 노총 광주지역본부의 참여는 극히 미미하거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민주노총 광주지역본부의 경우, 광주형 일자리 때문에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기존 임금이 적정임금이라는 이름으로 깎이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면서 광주형 일자리에 대해 반대한 적도 있을 정도다.

이보다 더 문제인 것은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노동, 따라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혁신 과정에 참여해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주체로 보지 않고, 단지 혁신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광주형 일자리와 관련해 광주 지역의 일부 경제단체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각이다.

광주 지역의 경제단체들 중에는 “대기업의 ‘과도’한 임금과 복지에 칼을 대야 한다”고 말하는 곳이 있다. 이들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과 납품업체들을 비교하면서 임금 수준이나 노동조건에서 큰 격차가 나는 만큼, “노동을 개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경제단체들이 이야기하는 개혁이 대기업인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본다면,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을 개혁한다는 것은 곧 지금 가진 기득권을 내놓으라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가 광주형 일자리와 맞물려 나온다면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광주형 일자리의 취지와 무관하게 반대해야 하는 이유가 될 뿐이다. 그러면서 경제단체들은 기업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기업 노동자들을 향한 압박을 가하면 그것으로 자신들의 할 말은 다한 셈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찌어찌 해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현실화되면, 다시 말해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을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손해 볼 일은 없다.

 ⓒ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청년실업 해소로 포장된 노동개혁

광주형 일자리를 둘러싼 논의를 예로 들었지만, 국가 차원의 노·사·정 논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해 내내 말이 많았던 노사정 간의 논의의 주제가 바로 이른바 ‘노동개혁’이었다. 노동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를 논한 것이다. 이 과정에 참여했던 한국노총의 한 간부는 “거칠게 말하면, 정부가 노동계를 향해 기득권을 내놓고 유연화를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라는 틀만 빌린 형국”이라면서 “미리 정규직 과잉보호 해체, 노동유연화라는 답이 담긴 문서를 만들어놓고 기한 안에 거기에 도장만 찍으라고 들이민 꼴”이라고 말했다. 이 간부는 “이건 사회적 합의도 뭣도 아니다”고 덧붙이면서 “우리나라에서 과연 사회적 합의가 가능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노·사·정 간의 사회적 합의라는 형태를 갖췄으니 노동계로서는 빼도 박도 못할 처지에 놓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다. 도장을 안 찍자니 사회적 합의를 거부한다는 비난을 모두 뒤집어써야 하고, 도장을 찍자니 노동자들의 반발을 살 것은 불 보듯 훤한 상황이었다. 그런 구도에서 당초 정부가 정한 기한보다 6개월 가까이 합의를 미루며 논의를 지속했으니, 비록 사인은 했지만 노동계 입장에서는 그나마 선방한 셈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사회적 합의를 앞세워 자신들이 만든 내용을 법으로 못 박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당초 노·사·정이 합의했던 범위를 뛰어넘는 내용까지 끼워 넣었다. 기간제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이나, 55세 이상 고령자에게 파견을 전면 허용하는 것 따위가 그런 부분이다. 정부에게는 합의 내용이 아니라 합의했다는 결과가 중요했던 것이고, 결국 필요했던 것은 노동계의 도장뿐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노동개혁에 ‘청년실업 해소’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웠다. 이 포장지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청년실업 문제의 책임을 정규직에 대한 과잉보호 탓으로 돌리고, 이를 무기로 노동개혁을 압박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했다.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노동계는 졸지에 “청년문제가 절박하고 경제가 어려운데 기득권만 지키려고 한다”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노동개혁과 청년문제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그 어디에서도 증명된 바 없을뿐더러, 청년문제가 당초 노동개혁을 처음 추진할 때부터 고려된 사항도 아니었다. 노사정위원회 논의에 참가했던 한국노총이 지난해 4월 결렬을 선언하고 나온 이후에야 비로소 청년실업 해소라는 포장지가 등장했을 뿐이다.

이 포장지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청년실업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국민의 정서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취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들을 자신의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그만큼 국민들은 청년실업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지러운 곳을 건드렸던 만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개혁이 필요하다는 정부와 여당의 여론몰이가 통했던 것이다.

 ⓒ 참여와혁신 DB
노동계와 야당이 청년실업 해소와 노동개혁은 관계가 없다고 아무리 외쳐도, 한 번 형성된 여론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부와 여당이 목표로 하는 노동개혁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청년실업 문제가 해결될 리 없겠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면 어쨌든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쪽은 정부와 여당이었고 노동계와 야당은 그에 대한 반대만 하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론을 무기로 정부와 여당은 끊임없이 노동계와 야당을 압박했다. 이른바 노동개혁 5법이니 4법이니 하면서 법안 통과를 주문한 것이다. 다른 사안에 밀려 노동개혁과 관련한 법안들은 총선 이후로 넘어갈 가능성이 큰 상황이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렇게 노동개혁과 관련해 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와 여당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가 진행되면서, 올 한 해 노정간 갈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노동개혁과 관련한 논의가 처음 시작되던 때부터 논의 자체를 반대했던 민주노총은 물론, 노사정위원회 논의에 참가했던 한국노총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대 투쟁을 올해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개혁’이라는 이름 붙이기도 문제이지만, 그 과정은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을, 따라서 조직된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개혁하고자 했다면, 당사자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설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설득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문제를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밥그릇을 내놓으라고 이야기하려면 왜 그래야 하는지 설득할 일이지, 막무가내로 밥그릇 내놓는다는 문서에 도장만 찍으라고 강요할 일은 아니다. 그런 문서에 아무런 저항 없이 도장을 찍는 사람도 없거니와, 설령 힘에 부쳐 도장을 찍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에서는 더 큰 반발을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