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 개인이 아닌 사회적 과제
‘과로사’ 개인이 아닌 사회적 과제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7.04.1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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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사회적 논의 거쳐 예방법 만들어야
[리포트] 과로사 문제

 “과로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과제다” 최근 한국 사회 곳곳에서 정부가 과로사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회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일과 건강 등에 소속된 변호사와 노무사, 의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015년부터 과로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들의 아픔을 나누고, 유가족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과로사예방센터’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과로사의 심각성에 대한 여론을 형성해 과로사를 예방하기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해서다.

한국보다 앞서 일본은 이미 2014년에 ‘과로사 등 방지 대책 추진법 (이하 과로사방지법)’을 만들었다. 일본에서 과로사방지법이 만들어진 과정과, 법 내용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짚어본다.

한국, 과로가 일상인 ‘과로사회’

한국은 ‘과로사회’다. 경제개발협력기구(OCED)가 발표한 ‘2016 고용동향(2015년 기준)’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OECD 34개 회원국 중 장시간 노동을 하는 국가 2위로 조사됐다. 한국의 1인당 연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이다. 과로사가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은 일본(1,719시간)보다 394시간이나 더 길다. OECD 회원국의 평균 노동시간과 비교해도 347시간 더 일한다. 하루 법정 노동시간인 8시간으로 나누면 43일 정도 더 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한국 언론은 매해 끊이지 않고 과로사를 전한다.

지난 3월 근로감독을 하던 57세 고용노동부 공무원이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숨졌다. 지난 1월 세 자녀의 엄마인 35세 보건복지부 사무관이 휴일근무 중 사망했고, 작년 12월 두 달간 매일 14시간씩 AI 소독업무를 하던 성주군 농정과 9급 공무원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집배원 7명이 과로사로 추정되는 돌연사 했고, 작년 7월 사망한 게임업체 직원의 죽음도 올해 과로로 인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게임회사의 장시간 근무에 대한 문제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됐다.

‘과로사’는 이미 한국사회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다. 의학적으로 하루 13시간 이상 장시간 근무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뇌출혈의 위험이 2배 가까이 높았다. 뇌출혈 등 뇌심혈관계 질환은 과로사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이는 통계자료로도 확인된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업무상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는 최근 5년간 3,061명, 연평균 600명 이상 발생하고 있다. 또 최근 증가하고 있는 자살의 경우 업부상 과로와 스트레스에 의한 과로 자살로 추정되고 있지만, 한국은 자살을 과로사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다. 과로사와 과로자살 실태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진행된 적도 없다.

▲ 2015년 9월 19일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주최한 '과로사방지법 일본전문가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 (사)일과건강

유가족 중심이 된 일본 과로사 논의

‘과로사’는 한국과 일본에서만 특징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국가로 분류된다. 두 나라는 국민들이 성실하고,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둔다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도 분명하다. 일본은 과로사를 사회적 문제로 놓고 활발하게 논의해왔다. 논의의 중심은 과로사 유가족들의 모임이다.

‘10년 9개월’. 일본의 ‘전국 과로사를 생각하는 가족모임’의 대표 테라니시가 남편의 자살을 ‘과로’로 인한 죽음, 즉 과로사로 규명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일본도 20여 년 전에는 한국처럼 과로사에 사회가 무관심했다. 2015년 서울 변호사회가 주최한 ‘과로사방지법’ 토론회에 초청된 그는 “과로사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입는 불합리한 사건”이라며 사회적 문제인 과로사를 막는 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96년, 음식점 요리사로 일하던 테라니시의 남편은 점장이 된 지 4년 만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경기악화 등으로 손님이 줄어들자, 회사는 달성하기 어려운 단체손님 모집 할당량을 제시하며 영업을 강요했다. 점포의 관리 업무가 늘어나면서 그 무렵 남편은 연간 4000시간 이상 일을 했다. 매일 반복되는 사장의 질타, 인사 강등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테라니시의 남편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만큼 가족들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됐다. 무릎을 꿇고 사과하던 사장이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꿔 직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회사의 태도에 분노한 테라니시는 변호사들과 함께 소송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일본에도 과로로 인한 자살의 산업재해 인정 기준이 없었다.

남편이 떠난 후 2년이 지나서 퇴직자 3명이 증언에 나섰다. 테라니시는 그때 비로소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이후 법적으로 정신 장애·자살에 관한 산재 인정 기준이 정해졌고, 2001년 남편의 자살은 산재로 인정됐다. 회사의 책임을 묻는 민사 소송은 2006년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민간 연대, 과로사 문제 해결 위한 여론 형성

‘과로사 유가족 모임’과 ‘열정적인 변호인단’. 끝이 보이지 않는 10년 간의 외로운 싸움을 하는 테라니씨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유가족모임 회원들은 각자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고 지지했다. 과로사의 비극이 평범한 가정에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심에 서기를 자처했다.

일본에서 과로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일본에서 ‘전국 과로사를 생각하는 가족 모임(이하 유가족모임)’이라는 전국 단위의 과로사 유가족 조직이 결성된 것은 1991년이다. 앞서 1988년에 만들어진 ‘과로사 변호단 전국연락회의(이하 변호단)’가 유가족들이 모이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유가족 모임은 ▲사회에 과로사 문제 알리기 ▲과로사 예방을 위한 대책 마련과 실천 ▲전국 유가족 모임과 긴밀한 연대·정보교환 등을 주요 목적으로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임상혁 일과건강 소장은 “한국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이 양극화되고 저임금의 구조 속에서 불가피하게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다. 노동자들이 과로사를 주체적으로 나서 문제를 제기하긴 어렵다”며 “일본처럼 한국도 유가족들이 중심에서 과로사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지난 2월 3일 열린‘2017 노동자 건강권 포럼’에서 정병욱 법무법인 송경 변호사가 '죽도록 일하면 죽는다'는 세션에서 일본의 과로사방지법을 소개하고 있다. ⓒ (사)일과건강

 2014년 일본 과로사 방지법 제정

2014년 6월 20일 제정된 일본의 과로사방지법은 유가족모인과 그들을 돕는 변호사, 학자 등이 모여 과로사를 방지하는 입법을 촉구하는 단체를 만든 것이 계기가 돼 속도를 냈다. 이 단체는 일본의 과로로 인한 사회적 피해실태와 유족이 겪는 아픔을 알렸다. 과로사를 방지하기 위한 입법 활동을 지지하는 시민운동을 벌여 55만 명의 서명을 받고, 국회와 지방의회 등과 접촉하며 법 제정 의견서가 채택도록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또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결의에 따라 설립된 ‘사회권 규약위원회’가 일본의 장시간 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권고토록 진정을 넣기도 했다.

이 같은 활동으로 143개 지방의회은 과로사를 방지하기 위한 입법 의견서를 채택했고, 국회에서 의원들은 법 제정을 위한 연맹을 결성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과로사방지법은 일본의 중의원과 참의원 구분 없이 전 정당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유가족과 전문가들이 결합한 민간의 연대가 10년 넘게 꾸준히 ‘과로’가 개인의 문제라는 여론의 틀을 깨고 과로사방지법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간단체의 연대가 과로사방지법이라는 과실의 비옥한 토양이었던 셈이다.

日 과로사방지법, 조사와 연구가 핵심

과로사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발생 요인 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때문에 일본의 과로사방지법은 ‘과로사 등’으로 과로사에 대해 정의한다. 제2조 정의에 따르면 “‘과로사 등’이란 업무에서의 과중한 부하에 의한 뇌혈관질환 혹은 심장질환을 원인으로 하는 사망 혹은 업무에서의 강한 심리적 부하에 의한 정진장애를 원인으로 하는 자살에 의한 사망 또는 이들의 뇌혈관 질환 혹은 심장질환 혹은 정신장애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과로사방지법의 핵심은 조사연구다. 과로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로로 인한 실태 조사를 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법은 ‘과로사 등’에 관한 조사연구를 실시해 실태를 명확히 파악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과로사를 효과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적시했다. 제4조 ‘국가의 책무’에서 국가가 과로사 연차 보고를 하는 등 과로사예방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알리도록 한 것도 면밀한 조사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외에도 ▲국가 ▲지방공공단체 ▲사업주 ▲기타관계자 등이 서로 밀접하게 연계해 과로사 방지 활동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노동자의 과로를 조장한 사업주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다. 다만 ‘조사연구 결과 필요한 법제상, 재정상의 초치를 강구한다’는 정도만 정해 두고, ‘부칙 제2항’에서 3년 후 해당 법을 재검토하도록 해 법이 보완될 여지를 남겼다.

▲ ‘2017 노동자 건강권 포럼’에서 유성규 공인노무사가 한국의 과로사 발생 실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일과건강

한국, ‘사회적’으로 과로사 논의 시작해야

정병욱 법무법인 송경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부위원장)는 “과로가 중요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점을 알리고, 과로를 국가에서 관리하고 과로자살을 포함한 과로사를 낮추기 위한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정 변호사는 한국에서 과로사예방센터 설립을 위한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과로사에 대한 정의도 없다. 김영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합의할만한 과로사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돼 있지 않다”며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 때문에 과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고,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사람들은 사회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과로사를 개인적인 문제로 돌린다. 과로사를 업무와 연관성이 없고, 개인이 약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자본‧의 프레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이는 한국인들 뼈 속 깊이 규범화된 역사적 폭력이다. ‘사회적 죽음을 소비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또 그는 현재의 과로사를 ‘신자유주의적 과로사’라고 표현했다. “단순히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를 압박하던 과거의 문법으로 과로사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내몰려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평가를 받는 과정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는 신체적 문제로 이어져 과로로 인한 사망뿐만 아니라 과로자살이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을 덧붙였다.

사회적 공감대 토대로 과로사방지법 만들어야

“일본의 과로사 법은 14조로 구성된 간단하고 추상적인 법이지만 그 의의는 크다” 정병욱 변호사의 말이다. 정부는 법에 따라 과로사 현황을 조사‧연차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과로사를 줄이기 위한 예방책을 마련하고, 국민도 법을 근거로 정부나 사업주에게 노동현장의 개선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강력한 규제 조항은 없지만, 과로사방지법 제정 자체로 사업주가 노동현장의 ‘과로’ 문제를 유심히 살피게 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한국에서 만들어질 과로사방지법에는 ▲국가·지자체·사용자·노동자 책무 ▲노동시간 ▲업무형태 ▲조사·상담연구 ▲보건복지대책 ▲과로사 예방 홍보 등의 내용이 포함돼야한다”며 “다만 한국은 일본에 비해 법을 어기는 사업장이 많은 편임을 고려해, 징벌적처벌 조항을 넣어 법의 강제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의 한계도 분명히 했다. “과로사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예방법의 필요성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법은 ‘죽은 법’과 다름없다”며 “유가족들이 중심이 돼 필요한 사회적 제도를 고민하고, ‘과로사예방센터 설립 모임’과 같이 각계 전문가들이 유가족들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서면서 과로사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논의돼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일반 기업은 물론 정부기관 등에서 과로사가 잇따라 발생하는 가운데, 지난 3월 7일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35명은 ‘과로사 등 예방에 관한 법률안’을 공동 발의했다고 밝혔다. 법안에는 과로로 인한 사망을 ‘업무상 재해’가 아닌 ‘과로사’라로 정하고 과로로 인한 자살도 포함됐다. 국가의 책무를 명문화한 것이 골자다. 이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3년마다 과로사 방지대책을 수립하고 추진 성과를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 근로자 대표, 행정기관 대표, 민간 전문가 등이 참여해 고용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과로사방지협의회’ 신설을 정한 것도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