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양심 벗은 벌거숭이 박사님
지식과 양심 벗은 벌거숭이 박사님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7.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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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학력 일파만파, 진정성 없는 유명세에 일침
고졸·대졸· 졸졸졸 따라다니는 학력, 현실은…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거 왜 이래?”
영화 <타짜>에서 도박계의 큰 손이자 설계자로 분했던 배우 김혜수의 카랑카랑한 대사. 그 의미가 새삼 실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에 때 아닌 학력 검증 바람이 거세다. 광주 비엔날레의 총 책임자로 내정됐던 신정아 전 동국대학교 교수 사건을 필두로 예술계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허위학력 논란은 문화계, 기업, 연예계에 이어 해외로까지 그 파장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학력’은 어떤 의미인가. 이제 학력 위조와 검증, 불명확한 평가 기준과 학력과 관련한 패거리 문화, 그리고 무조건적인 학력 신봉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한 논의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학력’은 능력과 실력을 대변하고 지위와 지식의 척도로 여겨졌다. ‘학력’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검증’을 통해 선명성을 확보하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학력 위조, 숨겨져 있던 빙산 드러나다


미국 캔자스대학 학·석사 과정과 예일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재원으로 알려졌던 전 동국대학교 신정아 교수(35)는 이 모든 학위가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임용 당시 검증 절차가 전혀 없었다는 것과 더불어 비호세력에 대한 논란까지 ‘제 2의 황우석’으로 불릴 만큼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논란이 가라앉을 즈음 미국 퍼시픽 웨스턴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뒤 이를 근거로 성균관대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받고 단국대 교수로 임용됐던 김옥랑(62) 동숭아트센터 대표, 연극인 윤석화, ‘굿모닝팝스’ 진행자인 유명 영어강사 이지영, 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이창하 김천과학대학교 교수, 방송인 오미희, 장미희, 강석, 최근 논란이 된 최수종과 주영훈까지 이 여파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존경을 받거나 인정을 받고 있거나 기대를 모으고 있거나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경악과 배신감은 더욱 거세다. 그간 격려를 보내왔던 그들의 노력, 그리고 다른 이들을 노력하게 만들었던 화려한 경력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 여파로 학원가 역시 비상이 걸렸다.


유명 강사들의 프로필이 알게 모르게 계속 수정되고 있으며 학력 인증과 법적 절차가 논의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는 강사도 늘고 있다.

이와 함께 포털사이트, 홈페이지, 각종 저서 등의 프로필 수정 요청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으며 대학교육협의회에서는 학력 검증 시스템 마련을 천명했고 거짓 학위 교수들이 무더기로 적발됐으며 검찰에는 하루에도 몇십 건씩 수사 요청이 쏟아진다. 모 기업은 전 직원 학력 검증까지 실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속였건 그렇지 않건 대한민국의 ‘고학력자’들이 모두 바싹 긴장하고 있다.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았던 한 사람의 학력 위조로 드러나기 시작한 아이러니한 거짓말 파장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더욱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쟁이인가, 학력 만능주의의 피해자인가


유명 인사들의 거짓학력이 속속 드러나면서 학력과 실력의 상관관계,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도덕성,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하는 현실이라는 논의를 둘러싸고 온·오프라인에서 찬반 논란이 팽팽하다.

학력을 ‘위조’한 이들 또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왔던 것이 실력과 무관하게 학력을 ‘잘못 기재’했거나 ‘고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매도되고 있다는 것.


문화 예술계 및 연예계는 애초에 학력이 중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다양한 것을 하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규정과 자격 요건에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는 옹호 입장과 화려한 학력으로 이슈가 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실력이 있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며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은 ‘사기범’이라는 반대 입장이 맞서고 있다.


또한 모두가 학력, 학벌을 중요시하며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현대 사회에서의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남들이 피눈물을 흘릴 때 거짓말로 쉽게 부와 명성을 가지려 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다.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하재근 사무처장은 이에 대해 “현재 대입 이후의 학벌을 좌우하는 모든 기준은 고등학교 입시 성적 하나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며 “도덕성과 거짓말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그들을 당당하지 못하게 했던 사회풍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력 위조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고졸 혹은 중졸 유명인사들 역시 “처음에는 힘들었다”는 말과 함께 “콤플렉스에 시달린 적이 있으나 나는 그것을 이겨냈다”고 고백한다.


취업부터 퇴직까지, 졸졸 따라붙는 ‘학력’


8월 26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고졸 실업률은 4.1%로 전체 실업률(3.5%)과 대졸 실업률(3.4%)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실업자도 평균 42만 명으로 전체 실업자(82만 7000명)의 절반을 웃돈다. 대졸 실업자(27만2000명)에 비하면 1.55배나 많은 수치이다.

취업 후에는 어떨까. 노동부의 2005년 임금구조기본통계에 따르면 고졸 임금을 100으로 볼 때 대졸 이상 학력자는 154.9를 기록했다. 대졸 임금이 고졸보다 1.5배 이상 많은 셈이다.


2006년 정규직 취업을 기준으로 한 교육인적자원부 발표를 보면 고졸의 월 평균 급여(상여금 제외)는 161만8091원, 전문대졸은 167만5027원으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4년제 대학 졸업자는 250만5661원으로 고졸에 비해 약 90만원이나 많이 받는다.


‘학벌 없는 사회’ 하재근 사무처장은 “권력화 된 대학 서열 체제 속에서 인재 순위 및 평가가 ‘대학’에만 미뤄지고 있다”며 “일류학벌이 아닌 사람들은 아무리 교육을 올바르게 받고 직무 훈련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고 해도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낙오자 집단’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중고등학교 입시제도 안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했고, 그래서 일류학벌이 될 수 없었던 사람은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고의로 학력을 누락했다는 이유로 최근 직원 5명을 해고했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고졸자’로 지원을 했다는 것이 이유다.


들썩이고 있는 인터넷 안에서도 한탄은 여전하다.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고 더 오래 공부해 높은 학력을 얻은 사람도, ‘그저 그런 대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취업 전선에 나온 사람도,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에 나온 사람도, 모두 학력으로 인한 벽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확산되는 논란 속 대책마련은?


이렇듯 논란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국의 학벌 위주 풍토 속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 소홀히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짓학벌 논란에 대한 대응 방식 역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거짓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학력 검증 인프라를 마련하고 비인가 외국 대학 및 위조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 나가는 것에 대한 논의이다. 또한 이러한 학력을 갖추고도 사회에 적응할 수 없으며 ‘인재’로 평가받지 못하도록 하는 교육 현실에 대한 문제와 학력과 관계없이 ‘실력’과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교육 시스템 마련의 문제가 중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실력’에 대한 검증과 이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 마련에 대한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박천수 박사는 “우리나라는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해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을 요구했고 기업들 역시 그러한 방식을 추구해 왔다”며 “하지만 가장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기준 마련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회사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입증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학력’이 인재 평가의 기준이 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현재까지 사회 전반에 ‘평가’라는 제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통해 객관성을 부여받으려고 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 안정적인 수준에서만 평가를 해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입사 후 사원들의 평가와 인사고과는 원활하게 이뤄지나 어느 정도 지위를 갖추고 나서는 사람을 ‘자르는’ 수단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기준과 원칙이 사라지고 이 과정 속에서 회사에 기여하고 그 회사에 맞는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자신의 학력이나 개인적인 능력향상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것.


박천수 박사는 “입사 날짜를 기점으로 월급을 주는 것, 학력과 근속연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 자체는 모두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합리적 평가에 대한 심정적인 거부는 누구나 갖고 있다”며 “활용과 개선, 합리성을 추구할 수 있는 직무 평가와 기업별로 필요한 직무에 맞는 인재를 뽑고 키워낼 수 있는 다양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재근 사무처장은 “대학을 평준화하고 학벌을 없애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전제한 뒤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실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학 진학률이 82%에 달하는 고학력 사회에서 학벌 만능주의, 혹은 그것이 가능하게 해 온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거센 비판과 냉소.


줄줄이 터져 나오는 유명 인사들의 고개 숙인 눈물과 후회, 한탄, 그리고 잠적을 바라보며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자신의 몇 줄 안 되는 학력란을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을 피워 올리는 사람들의 눈물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험난한 길을 묵묵히 실력으로 걸어왔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실력을 포장하고 그럴듯한 직함과 명성을 위해 ‘학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옷을 걸친 벌거벗은 박사님들이 이 사회의 지식층을 활보해 왔다. ‘벌거벗은 박사님’을 질책해 줄 수 있는 이 시대의 ‘정직한 눈’은 실종되었고 박사님에게 ‘찬사’를 보냈던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그 어느 때보다 원색적인 비난과 통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허영에 들뜬 벌거벗은 박사님을 가려내기 위한 ‘학력 검증’이 아닌 ‘실력 검증’의 원칙과 잣대 마련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