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속의 질서 ‘스머프 마을’
‘다양성’ 속의 질서 ‘스머프 마을’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8.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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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50주년 맞은 개구쟁이 스머프 이야기

욕심이 똘똘이 게으름이
나는 개구쟁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말씀대로 좋은 일 하지요
이웃에 사는 가가멜 못된 일만 저지르는
나쁜 마법사 눈은 둥글
코도 귀도 길쭉 마귀 마법사
스머프의 힘을 모아서
가가멜 무리를 혼내줘야지
좋은 일에 앞장 잘 서는
나는 개구쟁이 스머프

 


우리는 푸른색 피부를 갖고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오늘의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딸기를 따러 매일 함께 산에 갑니다. 맛있는 산딸기는 어느 곳에나 있어요. 단지 누군가 그것을 모두 가지려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키가 아주 작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밟히지 않도록 조심해야지요.


모두 힘을 내 일을 하기 위해서 “랄랄라랄랄라 랄랄랄라라~”하는 경쾌한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게으름이’나 ‘투덜이’도 모두 즐거워집니다.


이렇게 모두 함께 일을 하고 함께 나눠 갖는 우리의 규칙에 대해 사람들은 ‘공산주의’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하던데요.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어울리는 생각이긴 하지만 글쎄요. 다른 방식의 삶을 누군가가 자신이 아는 만큼으로 ‘그건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어리석은 말 아닐까요?

 


스머프, 탄생하다

1958년 ‘페요’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벨기에의 만화가 피에르 컬리포드(Pierre Culiford aka Peyo· 1928~1992)가 창조한 <스머프(The Smurf)>.


처음 이 만화가 세상에 나온 것은 <Le Journal de Spirou>이라는 잡지에 실리게 되면서 부터다. 그저 조연이었던 이 당차고 영리한 생명체는 전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81년에 <톰과 제리>를 만든 ‘Hanna & Barbera’라는 곳에서 TV시리즈로 제작, 행복한 스머프 마을에서 일어난 256개의 에피소드는 30개국에 방영됐다. 이제 어른이 된 전 세계의 어린이는 이 만화를 변함없이 기억한다.


스머프 탄생 50주년. 스머프의 판권을 관리하는 벨기에 IMPS 그룹은 올해 중으로 ‘스머프’를 3D CGI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밝혔다. <샬롯의 거미줄> 프로듀서 조던 커너의 손에서 기억속의 스머프가 다시 탄생할 예정이다.


‘스머프’의 이름은 친구 앙드레 프랭퀸과 점심을 먹던 도중 페요가 “소금 좀 밀어줘”라고 말하려던 것을 ‘소금(salt)’ 대신 ‘슈트롬프’라고 잘못 말해버렸는데, 이 기괴한 단어가 결국 <개구쟁이 스머프>의 원이름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페요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공산주의’설에서는 ‘아버지 밑의 공산주의자들(Socialist Men Under Red Father)’의 약자라는 말도 있고, ‘파파 스머프’는 칼 마르크스를, ‘똘똘이 스머프’는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스머프의 세상. 가난도 없고 부자도 없는 그들의 사회. 현대 사회의 모습 속에서 다시 그들을 본다. 어떤 모습일까?


‘나’를 표현하라

“이건 간단해, 똘똘이 스머프께서 쓰신 책을 보면 말이지”로 말을 시작하는 ‘똘똘이’(Brainy) 스머프와 “귀찮아” ‘게으름이’(Lazy) 스머프. “오 얘들아, 내가 도와 줄 것은 없니?”라고 말하는 ‘파파’(Papa) 스머프와 ‘편리’(Handy) 스머프, ‘덩치’(Hefty) 스머프, ‘허영이’(Vanity) 스머프, ‘익살이’(Jokey) 스머프와 ‘스머페트’(Smurfette).

그들의 캐릭터는 항상 자신의 이름에 충실하다.
개구쟁이 스머프의 ‘싫증난 장난상자’ 편에서는 익살이 스머프의 폭탄 장난상자로 모든 스머프들이 골탕을 먹는다. ‘이제 그만하라’며 그의 소중한 장난 비법이 담긴 책을 모두 없애버린 스머프들을 뒤로 하고 익살이 스머프는 슬프게 울며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악당 가가멜에게 잡힌 스머프들은 위기에 처하고 이를 본 익살이 스머프는 자신의 장난상자와 그동안 스머프들에게 썼던 여러 방법들로 친구들을 구한다. 그리고 해피엔딩. 평화가 찾아온 스머프 마을에는 다시 익살이 스머프의 장난으로 소란스럽다.

이렇게 스머프 마을에서는 각각의 이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때로는 자신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갖기도 하고 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또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임무에 항상 적극적이며 충실하다.
‘요리사’(Cook) 스머프는 항상 자신만의 요리를 개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편리’ 스머프는 버섯 모양의 집을 고쳐주기도 하고 때론 스머프 마을에 ‘아파트’를 지어 보이는 소동을 통해 새로운 것을 개발하기도 한다. ‘화가’(Painter) 스머프와 ‘시인’(Poet) 스머프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거나 혹은 웃음이 나올만큼 실력이 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예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개구쟁이 스머프>는 모든 만화가 갖고 있는 ‘권선징악’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실수에 너그럽고 개성에 관대하다. 일반적으로 만화의 주인공 캐릭터가 갖는 착하고 똑똑하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완벽한 캐릭터는 이 만화에 찾아볼 수 없다.

 


‘개성’은 나쁜 게 아냐

100여명의 스머프들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성격이 같고 하는 일이 같은 스머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귀찮아”를 연발하는 ‘게으름이’ 스머프나 “난 싫어”라며 모든 일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투덜이’(Grouchy) 스머프’, 그리고 늘 거울을 보며 자신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는 ‘허영이’ 스머프도 스머프 마을에서는 그저 하나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같은 옷을 입고 경제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황금’이 무가치하고 함께 일을 하며 산딸기 케이크를 나눠먹기에 이상화 되어있는 ‘공산주의 사회’라는 의심을 받기도 하는 스머프마을. 과연,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세상일까?


어린 시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악당’은 게으르고 항상 부정적이며 허영을 일삼지 않았던가. 하지만 스머프 마을에서는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항상 잠만 자더라도, 투덜거리더라도, 허영을 부리더라도 함께 일하고 파파 스머프의 조언을 구하며 때론 뉘우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본 모습’을 잃지 않는다.


만화는 그들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스스로 깨달으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면 된다고. 못한다고 다른 것을 하도록 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역할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스머프를 바라보는 그 누구도 ‘나쁜 스머프’라고 말하지 않았다.


페요는 다양한 스머프들를 탄생시키면서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늘상 바꿔야 한다고 여기는 다양성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누더기를 입은 ‘악당’

‘가가멜’(Gargamel)과 ‘아즈라엘’(Azrael). 끊임없이 스머프와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다. 상대적인 크기로 보이는 힘의 우위를 제외하고 보면 가가멜은 진정한 ‘악당’이라고 보기에 다소 허약하다. 만화가 끝날 때까지 가가멜은 ‘물’만 끓인다. 그토록 일관되게 원했던 스머프 스프 맛도 못 보고 검정색 누더기와 허름한 성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악당치곤 너무 초라해 보이는 가가멜은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유일한 관심사는 스머프를 잡아먹거나 황금으로 만들려는 일념밖에 없어 보인다.


이 단순하고 어리석은 악당의 충복 아즈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이 즐거워 할 때는 함께 키득대며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지만 항상 주인보다 먼저 얻어맞고 당한 후 질책을 받곤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이 당하는 모습을 즐거워하기도 한다.


가가멜의 과거에서 마법학교 학생이던 젊은 가가멜이 스머프를 처음 만나 마법서적을 보고 스머프를 재료로 쓰면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와 스머프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개구쟁이 스머프에서 ‘악당’, 즉 ‘나쁜 것’은 어리석음과 탐욕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누더기를 입은 탐욕스러운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황금’과 ‘특별한 먹이’만으로 다른 종족을 바라보며 그것만이 가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악당은 늘 선한 편에 서 있는 존재보다 힘이 세고 더 화려하며 치밀하지 않던가. 개구쟁이 스머프에서는 게으르고 허영심이 많은 것보다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것이 ‘진짜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사회, 스머프를 상상하다

식사 시간, ‘소금 좀 밀어 줄래’라는 말에서 태어난 스머프. 소유구조가 없는 공동체 사회 스머프 마을. 각각 개성을 가진 캐릭터와 누더기를 입은 악당.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스머프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던 파파 스머프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었다. ‘스머프 아파트 짓기 편’을 보면 파파 스머프는 스머프 마을의 버섯 집을 ‘아파트 모양’으로 만들어 보자는 ‘편리 스머프’의 제안에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단다”라고 대답한다.


만화에서는 결국 아파트에서 사는 것에 실패한다. 각각의 개성을 지켜주기에 하나의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불탔고, 대신 그 곳에는 새들이 집을 지었다. 그리고 편리 스머프는 “누군가에게든 자신에게 맞는 공간이 있는 거구나”라고 결론을 짓는다.


또 ‘파파 스머프의 휴일’ 편에서는 모두가 “힘든 파파 스머프에게 하루 휴가를 주자”고 말하고 뭔가 도와 줄 것을 찾는 그에게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실망한다.


‘파파 스머프’에게는 정형화된 ‘방법’이 있었고 오랜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가 있었지만 새로운 변화와 시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못했고, 자신의 역할을 중요시하기도 했다. 이제 ‘아파트’는 더 이상 새로운 공간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저 일반적인 ‘집’의 한 모양새일 뿐이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스머프 마을’에는 어떨까.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었을까? 만약 스머프 마을이 자동차를 타고 아파트에 살며 휴대폰을 지니고 다니는 곳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스머프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내가 갖고자 하는 것들, 지위와 돈, 남을 누르고서라도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없는 아이 같은 세계와 조금 못나고 덜 똑똑하더라도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천진난만한 본성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 ‘주의’로 표현되는 사상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에 말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도 ‘허영이’와 ‘게으름이’, 그리고 ‘똘똘이’는 존재한다. ‘농부’와 ‘편리’, ‘요리사’도 있다. ‘화가’와 ‘시인’도 마찬가지.


인간 사회라면 허영이는 “저는 부족한 게 많은 평범한 존재예요”라고 말해야 하며 똘똘이는 “교과서 중심으로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말해야 착한 사람이 될 것이다. ‘농부’는 FTA 투쟁에 고난의 눈물을 흘리고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인정받기 위해 학력 위조라도 했을까.


그 곳과 다르게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은 눈물을 흘린다.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스머프들은 어느 새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는가.


내 주변의 투덜이와 허영이를 존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게으름이 스머프를 이해해 주고 똘똘이 스머프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자. 우리 모두 스머프를 사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