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 위험 발견해도 말 못한다 … 노동자 눈 가리는 산업기술보호법
작업장 위험 발견해도 말 못한다 … 노동자 눈 가리는 산업기술보호법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1.07 14:52
  • 수정 2020.01.07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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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조항임에도 광범위하고 모호한 규정 … 처벌 감수하고 작업장 위험 알려야
면밀 검토 없이 9개월 만에 ‘일사천리’ 국회통과 … 2월 중 헌법소원 예고
1월 7일 오전 11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노동자의 생명, 안전, 알권리 침해하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악을 규탄한다' 기자회견 현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올 2월 21일 시행될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이 작업장 안전에 대한 노동자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적법하게 취득했고, 공익적 목적을 위하더라도 정보 공개시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하 반올림) 및 노동·인권·시민단체는 7일 오전 11시 광화문 광장에서 ‘노동자의 생명·안전·알권리 침해하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악을 규탄한다’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기술유출 방지 위한 법 개정 맞나?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산업기술보호법)은 2006년 10월 27일 산업기술의 불법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제정됐다. 하지만 기자회견에 모인 이들은 2019년 8월 13일 개정된 산업기술보호법은 본디 취지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모호하고 포괄적인 규정으로 생명-안전과 관련한 노동자의 알권리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먼저 산업기술보호법 제9조의2(국가핵심기술의 정보 비공개)의 포괄적 규정을 지적했다. 산업기술보호법 제9조의2는 국가기관 및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은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구절은 “국가핵심기술에 관한 정보”이다. 국가핵심기술은 산업통상자원부가 고시한 69개 기술에 해당되지만, 국가핵심기술과 ‘관련된’ 정보는 그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실제로 지난 2017~2018년 반올림과 삼성이 진행한 ‘삼성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에 관한 <안전보건진단보고서>, <특별감독보고서>, <작업환경보고서> 정보공개청구소송’에서 삼성과 고용노동부는 ‘국가핵심기술과 관련된 정보’라며 공개 거부를 주장했다. 국가핵심기술이 사용되는 삼성반도체 공장에 관한 모든 보고서는 ‘국가핵심기술과 관련된 정보’라는 것이다. 당시 반올림은 사람의 “생명·건강 보호를 위해 공개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기업의 영업비밀이라도 공개해야 한다”는 정보공개법을 근거로 맞섰다.

법원은 반올림의 손을 들어줬다. 2017년 10월 서울고등법원과 2018년 2월 대전고등법원에서 반올림이 승소하여 <안전보건진단보고서>와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판결 받았다. 반올림은 이 판결을 근거로 삼성에 추가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산업기술보호법이 시행되는 올 2월 21일 이후에는 앞선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산업기술보호법 제14조의8은 적법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획득하고, 적법한 목적을 위해 정보를 사용해도 처벌받도록 했다. 공익적인 문제제기에도 정보를 제공한 제보자뿐만 아니라 문제제기한 주체도 함께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제14조의8을 위반할 경우 ▲산업통상자원부 및 정보수사시관의 조사 및 조치 ▲징벌적 손해배상 ▲형사처벌 ▲관련자와 단체에 대한 양벌 등을 받을 수 있다.

오민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변호사는 “원래 산업기술보호법은 산업기술의 유출에 있어서 목적이나 방법이 부정한 경우 처벌하기로 돼있다. 처벌과 연결되기 때문에 해외에 보낸다거나 경쟁업체에 넘긴다는 등 목적이 한정돼있는 것”이라며, “그런데 이번 개정 당시 삽입된 조항은 목적이 분명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든 취득을 하고 나면 알릴 수 없다. 사실상 산업재해 요인이나 작업 현장의 위험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일사천리 통과 배경엔 삼성의 청부입법?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은 2018년 12월 최종 발의돼 2019년 8월 2일 임시국회에서 통과됐다. 불과 9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이다. 반올림은 이러한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을 “삼성의 청부입법”이라고 주장했다.

반올림은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해왔다. 그런데 소송 진행 중인 이 정보공개청구를 명확히 겨냥하여 법이 개악됐다”며, “심지어 개정이유에 이러한 청부입법임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2018년 11월 23일 윤영석 자유한국당 의원의 대표발의안 개정이유에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관련 자료 정보공개청구 소송에서 국가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반올림은 법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원과 정부도 비판했다. 일본과 무역분쟁을 이유로 개정법안의 우려지점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올림은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은 일본과 무역분쟁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급진전됐다. 그런데 국회의원이나 정부든 통과시키기에만 바빴고 우려지점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며, “정부는 보도자료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은 쏙 빼놓고 발표한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사회적으로 논란 될 줄 알았기에 은폐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2019년 8월 13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누리집에 산업기술보호법 개정 요지를 알렸다. 그러나 여기에는 포괄적 금지로 인한 공익제보 축소 등 우려지점은 찾아 볼 수 없다. ⓒ 산업통상자원부

이상수 반올림 활동가는 “반도체를 만드는 사람에게 가장 일반적인 공정과 기술이 바로 노동부가 말하는 산업기술”이라며, “자동차, 조선, 전력, 의료 등 33개 산업분야에서 3,000여 개에 달하는 산업기술이 있다. 광범위한 산업기술들에 대해서 앞으로 위험을 알리는 활동을 단속하겠다는 것이 산업기술보호법”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이들은 산업기술보호법이 시행되는 2월 21일에 맞춰 헌법소원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