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산업안전’은 ILO 100주년 선언에서 기본권이 되지 못했나
왜 ‘산업안전’은 ILO 100주년 선언에서 기본권이 되지 못했나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5.19 17:58
  • 수정 2020.05.19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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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ILO협회-이용득 의원, 2020 국제노동 정책토론회 개최
“선언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법률적 성격만 부각”
19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열린 '2020 국제노동 정책토론회' 현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산업안전'은 ILO가 제시하는 4가지 노동 기본권(▲결사의 자유 ▲강제노동의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금지)에 명시돼 있지 않다. 지난해 ILO 100주년을 맞아 산업안전이 5번째 '노동의 기본적 원리와 권리'로 격상될 기회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시 ILO가 가졌을 고민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ILO협회(회장 이광택)와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2020 국제노동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논의된 주제는 ‘ILO 100주년 선언’과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ILO 190호 협약)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일의 미래를 위한 ILO 100주년 선언의 함의’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ILO 100주년 선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산업안전보건’에 관련한 내용이 노동의 기본적 원리와 권리(Fundamental principle and right at work)로 승격되지 못한 점을 주목했다.

ILO 100주년 선언의 뼈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 보고서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는 2019년 6월 21일 제108차 총회에서 ‘일의 미래를 위한 ILO 100주년 선언’과 선언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100주년 선언은 지난 2013년 ‘일의 미래 이니셔티브’와 2017년 ‘일의 미래 글로벌위원회’의 논의 결과를 상당부분 참조했다.

특히 ‘일의 미래 글로벌위원회’가 2019년 1월 22일 발행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보고서는 ILO 100주년 선언에 기초가 된 자료다.

남궁준 연구위원은 “보고서는 현재 일의 세계(World of Work)가 기술진보(인공지능, 자동화 등), 환경오염, 인구구조의 변화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면서, “보고서가 보는 최선의 길은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을 되살리고 강화하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도 일의 세계에서 배제돼 자신의 몫과 권리, 보호를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일의 미래를 위한 인간 중심 의제(A Human-Centered Agenda For the Future Work)’를 제안한다. 이는 ▲인간역량에 대한 투자확대 ▲노동제도에 대한 투자확대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투자확대 등 3개 분야 10개 의제로 구성돼 있다.

불완전하게 수용된
인간 중심 의제

하지만 남궁준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제시한 ‘일의 미래를 위한 인간 중심 의제’가 ILO 전원위원회의 심사를 거치면서 개성과 의미를 상당부분 잃어 버렸다고 지적했다.

남궁준 연구위원은 “논의 대상 개념의 법적 정의와 함의에 대해 노사정 대표 간 확실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 ILO 100주년 선언 초안의 용어는 삭제되거나 익숙한 용어로 대체됐다”면서, “사회계약은 선언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생활임금은 최저임금으로 변경됐다. 초안에서 다섯 번째 ‘노동에서의 기본적 원리 및 권리’로의 승격을 감행했던 산업안전보건은 최종안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기본조건’으로 절충됐다”고 설명했다.

ILO 100주년 선언이 최종적으로 ‘절충’된 원인에 대해서 남궁준 연구위원은 “ILO 외부적으로도 선언이 더 이상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문서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또 다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21세기 이후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 중심으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과정에서 노동관련 조항이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노동조항 신설에서 참조점이 됐던 문서가 바로 ‘1998년 ILO 선언’이었다. ILO 선언과 같은 국제문서의 경우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국가 간 조약(FTA)에 인용되면서 법률문서처럼 해석되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축사 중인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노동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논의는?

1998년 ILO 선언은 현재 ILO 기본협약이라고 불리는 사안을 정리했다.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의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금지 등 네 가지 기본권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게 하는 8개 협약을 각 국가마다 비준할 것을 요청했다.

이 때 ILO는 네 가지 노동권을 실현한 의무와 기본협약 비준을 별개의 사안으로 보기로 한다. 각 국가마다 노동 권리를 존중하고 실현 시킬 의무는 부여하되 기본협약을 반드시 비준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남궁준 연구위원은 “ILO 협약 비준율은 꾸준히 감소했다. 저조한 비준율에 직면해 국제기구로서 ILO가 국제사회에서 필요한 기관으로서 다시 자리매김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결단한 것이 1998년 ILO 선언”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실용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번 ‘100주년 선언’의 상징적 의미는 다소 떨어진다는 의견이 나온다. 남궁준 연구위원은 “최종 채택된 ILO 100주년 선언은 그것이 ILO의 새로운 초석이 되길 원했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 것 같다”면서,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이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천명한 것처럼 100주년 선언이 그 뒤를 잇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이용득 의원은 “외국에서 레이버(Labor)의 의미는 노사를 의미한다. ILO에는 노사정이 들어가 있다. 2자 또는 3자라는 의미가 레이버에 담겨 있다는 것”이라면서, “우리에게 노동이라는 말의 의미는 외국에서 레이버가 가지는 의미와 차이가 크다. 인식전환이 없이는 새로운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면 이제 제대로 된 길 걸어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