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백화점, 방송계는 사람을 헐값에 쓰고 있다
비정규직 백화점, 방송계는 사람을 헐값에 쓰고 있다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0.06.14 00:00
  • 수정 2020.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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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모델' 없는 방송계 비정규직, 표준근로계약서와 표준제작비 기준 필요

[인터뷰] 김기영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

"함부로 스케줄을 잡지 못하는 삶"이 있다.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 얘기다. EBS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숨진 고 박환성PD와 고 김광일PD,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구MBC 비정규직노조 다온분회를 통해 방송계 비정규직의 현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론‧방송사가 내부 문제에 입을 닫은 사이,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면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다 부조리에 지친 노동자들이 '방송계갑질119'로 모였다. 업무도, 일하는 시간과 장소도 달랐던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란 이름 아래 닮아있는 서로를 마주했다. 공감 속에서 연대가 싹텄다. 잘 시간도 부족한 그들은 일상을 비집고 방송계 비정규직 노조를 출범시켰다. 비정규직 헐값에 부리는 방송계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다. 김기영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을 찾아가 '톱니바퀴' 같은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들어보았다.

프리랜서PD 출신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이 13일 ‘고 이재학PD 100일 추모문화제’를 카메라로 담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프리랜서PD 출신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지부장이 5월 13일 ‘고 이재학PD 100일 추모문화제’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방송스태프 노조인데 전국언론노조가 아닌 희망연대노조 산하 조직으로 출범했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노조가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신경을 써줄지. 정규직 중심인 언론노조 조합원과 갑을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방송계 정규직은 우리에게 갑질하는 당사자들이다. 경영진에서 왜곡된 구조의 틀은 잡아줬을지 모르지만, 세부적인 프레임은 정규직 노동자가 만들었다. 사람 편하게 쓰고, 제작비와 임금을 적게 주고, 책임을 줄이기 위한 시스템이다.

방송사야말로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할 정도로 비정규직을 많이 쓰고, 함부로 대한다. 노조 출범 전, 준비위에 참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언론노조에게 외면 받아왔다고 느꼈다. 비정규직을 가장 이해하고, 비정규직을 위하고, 또 모든 비정규직이 연대할 수 있는 노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희망연대노조를 선택했고, 노조도 우리를 받아주었다.


현재 언론노조는 여러 면에서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1~2년 사이 변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지금은 언론노조와 부딪히기보다, 여러 부분에서 협력하고 있다. 드라마4자협의체에서는 언론노조, 지상파 방송3사, 드라마 제작사협회와 드라마 현장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위해 협의하고 있다.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 활동도 함께한다. 언론노조나 우리 지부나 결국 큰 틀은 같다. 방송계 노동자의 정당한 대우와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언론노조가 힘을 합쳐 싸우고자 한다면 언제든 함께 할 것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있음에도 방송작가를 조합원으로 받고 있다.

방송계 비정규직이라면 직군을 가리지 않고 조합원으로 모집한다. 지부 전신인 '방송계갑질119'부터 방송작가, 프리랜서PD, 종편실 감독 등 다양한 직군의 스태프가 모여 있었다. 자연스레 노조 준비위 때도 작가들이 있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방송스태프지부 출범도 다양한 직군이 모였다는 점에서 탄력을 받았다.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는 여러 직군이 모여야 풀어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이나 우리 지부나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이 목적이다. 추구하는 건 비슷하다. 다만, 우리 지부는 방송사 외부에서 일하는 작가의 권익에 더 집중한다. 외주 제작사 작가, 개인적으로 일하는 작가 등 방송사와 직접 계약하지 않은 작가가 해당한다.


'드라마4자협의체' 등 드라마 스태프를 위한 활동과 성과가 있었지만, 다른 직군을 위한 활동은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그간 여력이 부족해서 조직화가 수월한 드라마 스태프에 집중한 면이 있다. 드라마 스태프는 촬영 장소에 30~70명까지 모인다. 반면 작가나 PD 등은 2~3명 정도 소수가 팀으로 활동해서 조직화가 어렵다. 그렇다고 작가나 PD를 홀대하는 건 아니다. 드라마4자협의체를 통해서 드라마 스태프 사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렸으니, 올 해는 작가와 PD 직군 조직화에 힘쓰고 있다. 2월부터 4월까지 실시한 '독립PD‧작가 노동실태' 설문조사가 대표적이다.


방송스태프지부 가입서를 보면 크게 4가지로 고용형태를 분류했다. ① 방송사(자회사) 계약직·파견계약직, ② 제작사 정규직·계약직, ③ 방송사(자회사)‧제작사 프리랜서이면서 사업자등록을 한 경우, ④ 방송사(자회사)·제작사 프리랜서이면서 사업자등록 안 한 경우 등이다. 차이점을 알려 달라.

①은 방송사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프리랜서PD나 작가가 방송사 보도국이나 교양국, 예능국과 프리랜서·용역·파견직 등 형태로 직접 계약을 맺고 방송사 내부에서 일한다. 보도국 촬영팀에 속한 VJ, 내부 편집 담당자 등도 해당한다.

②는 흔히 말하는 외주 제작사 PD나 작가다. 2016년 즈음 방송계에 포괄임금제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당시 많은 제작사가 기존 정규 직원들을 퇴직시킨 후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했다. 현재는 회계직군이나 팀장급 빼고 대부분 계약직이다.

③과 ④는 사업자등록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정부 기관이나 방송사 사업 중에는 사업자 신분으로 계약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③은 그래서 사업자등록을 한 거지, 정말로 회사를 운영하는 건 아니다. 프리랜서는 계약 없이 대부분프로젝트별로 구두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 출근하라. 임금은 얼마다" 등 말로 시작하고 말로 끝난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 하면 가방 싸는 거다. ②로 일하다가 계약 기간이 끝나면 프리랜서가 되기도 한다.

방송스태프지부 가입원서에 적힌 고용형태와 비정규직 직군. ⓒ 방송스태프지부
방송스태프지부 가입원서에 적힌 고용형태와 비정규직 직군. ⓒ 방송스태프지부

방송계에서 '프리랜서'란 어떤 존재인가?

마치 톱니바퀴 같다. 어디에나 필요하고 없으면 안 굴러가는 부품. 동시에 고장 나면 버리고 갈아 끼울 수 있는, 쓰다가 버릴 수 있는 부품이다. 비정규직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긴 한데, 프리랜서는 갈아 끼우기가 더 쉽다.


지부장은 외주 제작사나 프리랜서PD가 받은 협찬금의 상당 부분을 방송사가 가져가는 걸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구조가 어떤 문제를 만드나?

제작 환경이 열악해진다. 제작사나 프리랜서PD는 프로그램 제작을 의뢰한 기업, 단체 등에게 협찬금, 즉 제작비를 받는다. 그런데 협찬금은 따온 당사자가 아닌 방송사가 가져간다. 법은 아니고 방송사가 만든 규칙이다. 프로그램 틀어주는 대가를 비롯해 여러 명목으로 협찬금의 50%, 많으면 70%까지 떼 간다. 이후 제작사가 영업이익, 인건비를 가져가고 남는 액수가 실제 제작에 쓰인다. 방송사가 협찬금을 가져가는 만큼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

201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EBS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고 박환성PD, 고 김광일PD가 그런 경우다. 정부지원금을 받았는데 EBS에서 협찬금이라며 가져갔다. 제작비가 부족해 운전기사를 섭외하지 못했고, 과업에 시달린 두 PD가 졸음운전으로 사망했다.


방송사에서 책정한 제작비가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줄 듯하다.

방송사가 제작비를 적게 책정하면 당연히 외주 제작사도 프로그램 제작비를 줄여야한다. 제작사가 가장 줄이기 쉬운 게 인건비다. 월 320만원 받는 8년~10년차 PD보다 260~270만 원 받는 4~5년차 PD를 쓰는 식이다. 이 경우, 경력과 실력이 부족해서 날림으로 찍을 수밖에 없다. 대개 결과물이 좋지 못하다. 촬영일수를 줄이는 것도 잘 쓰는 방법이다. 촬영일수 줄이면 그만큼 숙박비, 식비 등이 줄어드니까. 시간에 쫓기며 만드니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물론이다. 그런 가운데 방송사는 초유의 위기, 파업 등을 내세워 한 번씩 제작비를 일괄 삭감한다. 어지간한 제작사는 망하거나, 망하지 않으려고 인원을 더 줄이거나, 연차가 더 낮은 인력으로 바꾼다. 제작사들이 그렇게 버텨온 거다.


2019년 11월부터 이어온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설문조사를 보면, 드라마 스태프가 지적한 문제 중 하나가 '안전'이다. 현장 스태프의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 핵심 원인이 뭔가?

결국 제작비다. 방송계의 수많은 문제가 제작비 부족에서 비롯한다. 돈 아끼려고 지켜야 할 절차를 무시한다. 안전장비를 지급하지 않고. 해야 할 교육을 안 한다. 신규 스태프는 어깨너머로 일을 배워야 한다. 체계가 없으니 사고가 많을 수밖에 없다. 공정한 제작비 지급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2018년 7월 4일 열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창립총회. ⓒ 방송스태프지부
2018년 7월 4일 열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창립총회. ⓒ 방송스태프지부

제작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없나?

제작사에서도 비정규직에게 갑질 한 건 분명히 있다. 돈도 떼먹고, 폭언과 인격모독 등이 굉장히 만연했다. 지금도 남아있다. 그 부분은 책임을 져야 한다. 제작사들이 지난 일을 사과하고 직원에게 정당한 권리보장을 약속해야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표준제작비 기준 마련은, 제작사에도 도움이 된다. 제작사는 우리와 함께 힘을 합쳐서 왜곡된 방송계 구조를 바꿔야 한다.


방송 스태프의 처우개선을 위해 정부가 가장 힘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노동자성 인정과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다. 방송사 비정규직이든 제작사 비정규직이든 표준근로계약서가 있어야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정당한 권리와 대가를 요구할 안전장치다. 지금은 비정규직 대부분이 언제 잘릴지 몰라서 눈치나 보며 일한다.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 달라'는 비굴한 태도로 일하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서 없는 나머지 대책은 단기적 시혜에 불과하다.

동시에 표준제작비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임금은 제작비에 포함돼있다. 제작비가 줄면 임금도 줄어든다. 1시간 프로그램, 7분짜리 꼭지 하나에도 공정한 제작비 기준이 필요하다. 지금은 왜 그 액수가 책정됐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관행대로 주는 거다.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환경이 열악한데, 과거에 비해 업계 인력 유입이 어떤지 궁금하다.

10년 전에도 조연출, 막내작가 등 하위직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더 힘들다. 젊은 세대도 아는 거다. 방송에 뜻 있는 사람도 버티기 힘든 환경이란 걸. 단적으로 '롤모델'이 없다. 개인적으로도 나름 멋있다고 생각한 선배 중 잘 풀린 사례가 전무하다. 20년 경력에도 월 300~400만 원 대 받으니,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40대, 50대 중 버티다 그만둔 분들이 태반이다.

업계에 남더라도 조금이나마 돈을 더 받는 제작사 관리직을 하려고 현장을 떠난다. 관리직 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인건비 줄이기다. 후배 등골에 빨대 꽂아야 버틴다는 얘기다. 만만한 후배들 불러서 헐값에 일 시킨다. 구두계약으로 "이것만 하면 돼"하고 불러서 온갖 일 다 시킨다. 정당하게 사람 부르고, 정당하게 일 시킬 수 있으면 제대로 계약 맺고 작업할 수 있다. 방송사에서 그럴 수 없는 액수를 주니까 제작사 노동 환경도 열악해지는 거다. 인맥과 친분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일시키고 뻔뻔하게 돈 떼먹는다.


지상파 방송사가 '초유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에 지부장은 공감하는지?

방송사가 연이어 위기를 겪은 건 사실이다. 종편 채널, OTT, 요즘의 코로나19까지. 살아남으려면 개편해야 한다. 콘텐츠는 사람 중심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제작사를 적으로 만들지 말고 함께 고민하고 논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게 현명하리라 본다. 방송사는 늘 위기를 말해왔고, 그 때마다 사람을 갈아 넣으며 지탱했다. 그 부조리를 고치지 않고 미래나 희망을 얘기하는 건, 마치 커다란 난로를 껴안은 채 덥다며 에어컨을 트는 것과 같다. 그때그때 앞가림에 급급할 게 아니라, 근본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 노조의 중점 사업은?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백승수 단장(남궁민 분)이 그런 얘기를 했다. "해왔던 것들을 하면서 안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우리도 똑같다. 하던 드라마4자협의체 계속 진행하고, 그동안 미흡했던 PD와 작가 조직화에 힘쓰겠다.

전근대적인 도체시스템에 말도 안 되는 장시간 노동, 헐값 취급까지. 방송계가 비정규직을 대하는 모습에서 제대로 된 걸 찾기 힘들다. 지금까지의 관행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리고, 인식시켜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언제까지 사람을 이렇게 쓸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면 안 된다. 방송계 비정규직들이 변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