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고생하면서 이뤄낸 것들 모여 큰 강 됐다
당신들이 고생하면서 이뤄낸 것들 모여 큰 강 됐다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06.13 00:00
  • 수정 2020.06.12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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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인물, 전태일과 같다
여성사업장 투쟁 속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책에서 만난 노동] <달뜨기 마을> 저자 안재성 

“쉼도 없이 거칠고 사납게 휘몰아쳤던 한국 현대사 100년의 무대 위에 던져져 단지 온몸 맨몸으로 긴긴 수난의 시대와 인생을 헤쳐나간, 내 아버지와 어머니 같고 내 형제와 누이 같은 나의 혈육들이여. 벗들 이웃들이여. 그리고 마침내 동지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오직 뜨겁게 고동치는 가슴에 기대어 질곡의 역사, 질곡의 노동을 겪어내고 이겨낸 무대의 참 주인공이나니.”

안재성 작가의 새 소설집 <달뜨기 마을>은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출판됐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아홉 명의 사람이 아홉 개의 단편에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가 묻어나는 ‘이천의 모스크바’, 5월 18일 광주를 풀어낸 ‘팬데믹의 날’, 골프장 캐디 노동조합 이야기인 ‘캐디라 불러주세요’ 등 단편들이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서울시청 근처에서 안재성 작가를 만났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희망이라는 건 정말 가질 수 있는 건지. 글을 쓰면서 마음이 아플 땐 어떻게 하는지. “세상에 슬픔이 너무 많아 아프다”고 투덜대는 기자에게 안재성 작가는 “소설로 전향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래도 기자 해볼 거다”라고 대답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안재성 작가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안재성 작가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달뜨기 마을은 어떤 책인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문학을 좋아했으니까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됐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스무 살 즈음이었어요. 79년도 여름에 가발공장 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켰는데 농성을 하다가 무참히 진압을 당하고 한 명이 사망했어요. (이른바 YH여공 사건이다) 지금의 민주당사에서요. 아, 그 당시에는 신민당사라고 불렸어요. 아침에 농성진압으로 끌려 나오는 장면을 잠깐 방송에서 본 후 버스를 타고 바로 쫓아갔는데 상황이 정리돼 있었어요. 저 혼자밖에 없더라고요. 겁이 나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냥 나왔어요. 나중에 그 노동자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려고 싸우는 여성들에게 굉장한 감동을 받았어요. 최순영, 권순갑 누나···. 그리고는 현장 노동운동을 많이 써 왔어요. <달뜨기 마을>은 제가 거의 삼십 년 가량 모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았어요.

<달뜨기 마을>은 20세기 초반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 21세기 초반까지 다뤘어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가 쓴 단편소설 중에서 시기별로 아홉 편을 꼽아봤어요. 꼭 노동운동과 상관없이 뽑았던 건데, 하나 생각하고 있었던 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제적으로 약자의 상황이 정말 어렵다는 거에요. 그걸 극복하는 길은 딱 하나 본인이 싸우는 거죠. 어려운 시기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애를 썼는지 소설이 보여주는 거죠.

저는 책을 읽고 “전태일 100주기가 되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어요. <달뜨기 마을>과 전태일 정신이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소외된 사람들이 자기의 인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전태일은 귀한 투쟁이에요. 그러나 전태일과 같이 자신을 희생해서 목숨까지 바치지는 않았을지라도 싸운 사람들은 많아요. 전태일은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이죠. 기계문명은 빠르게 진보하지만 인문학적인 고민은 50년 후에도 같을 거에요.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평등할 것이냐, 얼마나 자유로울 것이냐, 싸움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같은 것들이요. 이 고민이 모든 인류의 숙제죠. 전태일 100년 뒤에도 그런 숙제들은 똑같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게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싸운 결과로 인해서 훨씬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은 가져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겠죠. <달뜨기 마을>에 등장하는 하나하나 인물들이 모두 전태일과 같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면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주인공들이 모두 제가 상상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당사자나 유족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녔어요. 최근 싸움들은 직접 취재를 했고, 읽기 좋게 손을 본 정도죠. 여러 사람들의 경험을 한 사람당 보통 한 달 주기로 썼어요. ‘스무 명의 성난 여자들’ 단편 같은 경우는 그 분들이 매일같이 현장에서 싸우다가 이천으로 놀러온 적이 있어요. 같이 절 구경도 가고. 그 날은 싸움 이야기를 하나도 안 했어요. 그게 생각이 나네요. 또 ‘달뜨기 마을’의 주인공이었던 어르신은 살아생전 아주 외롭게 계셨거든요. 근데 아주 우아한 분이셨어요. 90세 노인인데 엄청 까다롭지만 우아했던 그 모습이 기억나요. ‘팬데믹의 날’ 주인공은 광주에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는 여성 운동가이신데 자상하고 강력한 카리스마에 감탄했어요.

역사적 사건들을 어떻게 선정하게 되셨어요?

식민지 시대, 70~80년대, 그리고 최근 21세기 이렇게 세 개로 나눠봤죠.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약자다보니까 많이 쓰게 됐어요. 사실 안 쓴 것들, 예를 들어 제주 4.3 사태는 너무 끔찍해서 쓸 수가 없었어요. 여순사건도 도저히 잔인함 때문에···. 그걸 쓰는 순간 인간에 대한 모든 걸 잃어버릴 것 같았어요. 신뢰 같은 거요. 읽는 사람과 나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쓸 수 있겠는데, 차마 못 쓴 거죠. 어떤 문학 쪽 사람들은 상황을 비참하게 그리는 걸 좋아해요. 세상이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싸우는 게 허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비록 실패하더라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희망을 가진 것을 그려보려고 애를 써요. 우울함을 이기는 방법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보거나 딴 짓을 해야지. 산책하면 더 생각나니까. 가장 좋은 것은 글을 쓰는 거에요.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겠죠.

책의 주인공들이 된 아홉 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당신들이 고생하면서 이뤄낸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강이 되듯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는 거요. 앞으로 우리 후손들도 그렇게 할 것이니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또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 시대에서도 극소수잖아요. 특히 여성의 몸으로 싸우신 분들이 존경스러워요.

그럼 책을 읽을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으신가요?

세상이 당신을 위해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 내 스스로 권리를 찾지 않으면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 그 권리를 찾는 것이 동지적 애정에 기반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열 명이 모이면 다 다르죠. 대동단결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정의가 과한 것보다는 관용이 강한 게 낫다고 생각해요.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달뜨기 마을 표지 ⓒ 도서출판목선재
<달뜨기 마을> 표지 ⓒ 도서출판목선재

<달뜨기 마을> 중 가장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엉뚱하게 나는 달뜨기 마을 풍경 구절이 제일 생각나요. 인간이 지향하고 싶은, 원초적인 평화로운 모습이요. 실제로 가보면 책에 나온 그림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마을이 산으로 둘러 싸여서, 집은 열 채도 안 돼요. 달이 뜨는 게 너무 아름답고.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갔던 마을이잖아요. 제목을 <달뜨기 마을>로 한 이유도 소설에서는 서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깨졌나를 보여줘요. 다시 그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어요.

안재성 작가가 말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달뜨기는 나룻배 모양의 타원형 분지에 십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작고 아늑한 마을이었다. 봄날 맑은 밤이면 찰랑찰랑한 논물 위로 두둥실 떠가는 달이 꿈같이 아름답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그곳을 달뜨기 마을이라 부르고 한자로는 개월(開月)이라 썼다.”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많이 다루셨어요. 특별히 많이 쓴 이유가 있으신가요?

일부러 다룬 건 진짜 아니고요. 지금 비정규직사업장 중 투쟁사업장의 다수가 여성이기도 해요. 70년대도 여성사업장들이 더 많았어요. 경성에 유명한 싸움들, 평양 고무공장, 광직 다 여성들이에요. 남성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건 87년 때고 그 전에는 다 여성들이었어요. 물론 조합장은 다 남자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죠. 여성사업장의 경우는 서로 굉장히 화기애애하고 평등한 분위기에서 같이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게 있어요. 그런 점에서 여성사업장이 매력적이기도 해요. 소설가로서도 그렇고 운동가로서도 그래요. 저는 여성사업장 투쟁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홉 개의 단편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우리는 점점 좋은 결과를 볼 거에요. 그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처신에 맞춰서 조금씩 싸운 것이 오늘의 한국을 이루고 있었다는 메시지가 저도 모르게 소설에 나와 있어요. 소설에는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요. 때로는 잠깐 싸운 게 전부인 사람들도 있어요. 그 뒤로는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요. 사회의 모순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고, 근본적인 모순까지 뜯어고치는 건 어렵겠지만 기본적인 생존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거예요. 어떤 관점에서는 지금 세상이 더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세상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향후 출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내용인가요?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들을 많이 썼는데, 할 수 있다면 하나의 대하장편소설을 쓰고 싶어요. 우리나라의 대하장편이라고 하면 주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내용이 중심이었어요. 제가 쓴다면 계급문제와 노동문제가 중심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처음부터 제가 창작하는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큰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에요. 당분간 여유를 가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