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신중히 세워서 끝까지 지켜라
원칙, 신중히 세워서 끝까지 지켜라
  • 최영우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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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우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노조에서 단체교섭사항으로 징계위원회 노사동수구성을 요구하였다. 이에 사측은 5:5 동수로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징계는 과반수(6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기로 하였다.’(A사의 사례).

이것은 노사 간의 단체교섭에서 ‘원칙’(principle)이 지켜지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례를 통해 교섭과정에서 ‘원칙’과 ‘양보’의 관계를 살펴보자.

 

 

노조에서 징계위원회 노사 동수 구성을 요구했을 때 사측은 처음부터 동수 구성을 수용해 주기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징계권은 인사권의 핵심이자 사측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노조의 참여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을 것이다.


계속되는 교섭진행과정에서 만약 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주기로 입장을 바꿨다면 어디까지가 사측의 양보가능한 선이 되어야 할까. 징계권한의 일부를 노조와 공유하기로 했다면 양보가능한 선은 노조가 요구하는 5:5까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찬반 결과가 가부동수일 때에는 사측이 징계결정권(casting vote)을 가지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징계권을 양보했지만 징계여부는 사측의 권한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A사는 징계위원회를 노사 동수로 구성하면서 징계의결은 과반수의 찬성으로 한다고 합의하였는데, 이것은 징계권 자체가 상대방에게 넘어간 것으로 ‘원칙’이 무시된 것이다. 아마 사측은 징계권을 ‘양보’했다고 생각하면서 이에 대한 노조측의 화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섭과정에서 원칙이 무시된 양보는 더 이상 양보로 통하지 않는다. 적대적인 노사관계 하에서 상대방의 양보는 양보가 아니라 자기의 우월한 힘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킨 것이거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협상과정에서 원칙을 벗어난 양보를 하는 것은 호랑이에게 계속해서 고기를 던져 주면서 그 호랑이가 내 말을 잘 듣는 순한 양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같다.’
세계적인 협상의 대가 로저 피셔(Roger Fisher)의 말이다.


그러면 노사교섭 과정에서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측의 입장에선 내가 원칙을 고수하는 경우 단기적으로는 타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노사갈등이 증폭되거나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이나 임기제 CEO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이해관계자들 즉, 오너나 주주들로부터 자기의 경영능력을 의심받게 되고 따라서 연임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원칙을 깨뜨리면서 적당히 타협을 시도하거나 힘에 의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갈등상황을 단기간에 종결시키고 교섭비용을 줄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오히려 갈등을 임기응변으로 미봉한 것에 불과하고 향후 더 큰 갈등으로 표출되도록 문제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A 사는 자기의 가장 큰 권한이자 가장 강한 무기인 징계권을 양보하면서 노사 Win-Win을 기대하였지만 결국은 Win-Win은 커녕 Win-Lose도 아닌 Lose-Lose로 끝나고 말았다. ‘노조는 이에 화답하여 생산성 향상에 힘쓰고, 사측은 근로조건 개선과 고용보장으로 보답하면서 지금도 서로 협력하면서 잘 살고 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한 결과 회사가 부도나고 망하게 되었다’로 그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먼저 나부터 원칙을 신중히 결정하고 지켜라.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원칙을 지킬 것을 강하게 요구하라. ‘원칙’은 ‘타협과 양보’의 대상이 아니라 ‘고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