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박싱] 이 주의 날 : 제주 4‧3항쟁
[언박싱] 이 주의 날 : 제주 4‧3항쟁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1.04.03 00:10
  • 수정 2021.04.03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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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일 #제주도 #분단 #총파업 #평화 #통일 #레드콤플렉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비극적인 일. 온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게 된 이유. 연좌제로 상처와 슬픔조차 목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이유. 73년 전 4월 3일 그날의 제주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다.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의 끈질긴 싸움으로 진상조사가 진행되고 제주도에는 4‧3평화기념관이 지어졌다. 그날의 역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화해하며 상생으로 나가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날의 역사를 잠깐이라도 돌아보려 한다.

제주 4.3 대한민국을 외치다 퍼포먼스 ⓒ노효진기자 hjroh@laborplus.co.kr
제주 4.3 대한민국을 외치다 퍼포먼스 ⓒ노효진기자 hjroh@laborplus.co.kr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 4‧3항쟁은 1948년 4월 3일로 대표된다. 하지만 4‧3의 시간은 꽤나 길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에 이르기까지 7년의 시간이다. 2003년 10월 15일 4‧3항쟁의 진상을 담은 정부 공식 진상조사의 내용을 보면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고 당시 모인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가두시위 도중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아이가 치여 다쳤다.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떠난 기마경찰을 보고 군중들이 분노해 돌을 던지고 항의하자 근처에 포진했던 무장경찰이 발포를 했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이 희생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조직적으로 시작됐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유래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총파업으로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다. 제주도 외부에서 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제주도로 들어와 소위 빨갱이 사냥이라는 미명하에 테러를 자행했고 충돌이 시작됐다. 여기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당시 피해로 신음하는 제주 공동체의 민심과 5‧10 남한 단독선거 반대 투쟁의 열기를 합해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그 때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이다.

이후로 계속된 무장 충돌과 유혈 사태에 대해 당시 미군정은 강경진압작전을 펼친다. 5‧10 선거가 제주도에서 투표수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자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미군 대령을 제주도 총사령관으로 파견해 무장대 검거작전을 감행하며 6‧23 재선거를 실시했으나 그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은 진압작전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는 제주도로 군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1일에 제주도에 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1월 17일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

1949년 3월에는 한라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방침의 선동이 시작돼 한라산에 피신한 1만여 명이 하산했다. 그러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1,600여 명이 총살당하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예비검속과 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자들이 또다시 희생양이 됐다.

그 기간 동안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과 이후 사건들로 수많은 제주 주민이 희생당했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심했다. 진상조사에 따르면 2만 5,000 ~ 3만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4만여 채의 가옥이 불에 타 없어졌다. 마을은 온통 폐허가 됐으며, 당시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과 주요 산업시설도 파괴됐다.

1954년 9월 21일 이후로도 4‧3항쟁 관련 아픔은 멈추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이 유가족들을 얽매고 제주 주민들은 애도의 마음조차 숨겨야 했다. 또한 고문 피해로 인한 장애와 트라우마, 레드 콤플렉스로 인한 정신적 상처가 제주 공동체에 깊게 남았다. 일본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4‧3항쟁으로 수형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제주도라는 이름 앞에 평화와 인권의 섬이라는 슬로건이 붙은 이유는 이러한 역사에서 비롯했다. 제주 4‧3평화기념관 위령탑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평화는 만인에게 공평한 것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인권의 소중함을 인식하여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탑을 세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