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초단시간 노동자, 한국어교원의 설움
무늬만 초단시간 노동자, 한국어교원의 설움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1.11.02 11:39
  • 수정 2021.11.11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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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강의 시수 11시간...저임금에 고용불안까지
한국어 관심 늘어나도 한국어교원 처우 개선은 뒷전
10월 18일 열린 '한국어 교원의 사회적 지위 보장과 정부 책임 요구' 기자회견에 걸린 문구 ⓒ 참여와혁신 DB
10월 18일 열린 '한국어 교원의 사회적 지위 보장과 정부 책임 요구' 기자회견에 걸린 문구 ⓒ 참여와혁신 DB

오징어게임, BTS, 기생충. 한때의 유행으로 그칠 거란 기우와 달리 '한류'는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한국 대중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의 수도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0년에 9개국에서 한국어를 신규 교과목으로 채택해 전체 39개국 1,699개교 약 16만 명이 한국어를 배운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영국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는 26개의 새로운 한국어 단어가 추가되기도 했다. 한국어 교육에 관한 수요는 늘어가는 만큼, 관련 부처에선 한국어 교육 지원에 나서고 있다.

높아지는 한국어 교육 수요에 관련 종사자도 좋은 대우를 받을 것 같지만,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코리안 티처'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에 가입한 한국어교원들은 한글날을 앞둔 지난 10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렸다.

한 주 강의 시수는 11시간,
'쪼개기'가 만든 초단시간 노동

전국의 대학 내에는 어학당, 교육원, 문화원 등으로 불리는 한국어 교육 부설 기관이 있다. 한국어교원은 이들 기관에선 외국인, 재외교포, 선교사, 대사관 직원 등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친다.

대다수의 기관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학기로 운영된다. 한 학기는 10주이며 총 200시간, 한 주에 20시간 수업을 한다. 그렇다고 한국어교원들이 한 주 20시간 강의를 하는 건 아니다. 20시간은커녕 대부분의 한국어교원은 주당 15시간 미만 근로하는 초단시간 노동자다. 가령 한 주에 A 교원이 12시간을 수업하면, B 교원은 8시간을 수업하는 식이다. 20시간을 교원 3명에게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강의시간 '쪼개기’를 하면 대학으로서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초단시간노동자는 근로기준법상 주휴수당, 연차 유급휴가, 퇴직금 등을 적용받지 못하고 4대보험도 산재보험만 가입되기 때문이다.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76개 대학 기관에서 일하는 한국어교원 3,013명의 주당 평균 강의 시수는 11시간이다. 그중 강의 시수가 12시간 미만인 한국어교원은 60.7%에 달한다(2021년 6월 기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각종 업무...
'무늬만 초단시간 노동자' 한국어교원

국립대학인 강원대학교 국제교류처 언어연수과에서 한국어교원으로 일하는 최혜영 씨도 초단시간 노동자다. 이번 학기에 배정받은 주당 강의 시수는 12시간이다. 그는 한국어교원 3년 차인 2018년 문화원으로부터 재계약을 거부당했다. 최혜영 씨는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을 했고 승소했다. 언어연수과는 이에 불복하며 행정소송까지 이어갔지만, 2021년 7월 서울고등법원 2심까지 모두 부당 해고로 판결하며 최혜영 씨의 손을 들어줬다.

최혜영 강원대학교 한국어교원 ⓒ 참여와혁신 DB
최혜영 강원대학교 한국어교원 ⓒ 참여와혁신 DB

재판에서 언어연수과는 최혜영 씨가 2년 이상 일했더라도 초단시간 노동자이기 때문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지 않았고, 따라서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재판부의 견해는 달랐다. 무엇보다 최혜영 씨의 실질적인 업무 성격을 보고 초단시간 노동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학생 생활지도와 신분 관리, 상담, 평가 및 출석 관리, 연구활동 참여 등 강의 시간 외에도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업무를 모두 노동시간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강원대 언어연수과는 지노위 판정 이후 최혜영 씨를 복직시켰으나, 항소심 판정에 불복해 상고를 제기한 상태다.

최혜영 씨뿐만 아니라, 한국어교원들은 강의 외에도 다양한 업무를 담당한다. 한 학기가 끝난 이후에도 1주간 학급별 보고서를 작성하고 다음 학기를 준비한다. 한 주에 12시간만 수업을 배정받더라도 강의 준비와 행정업무 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업무 시간은 강의 시간을 초과한다. 그러나 강의 시간 외 업무는 임금에 산정되지 않는 ‘공짜 노동’인 경우가 많다.

한국어교원은 한국어 수업과 관련 없는 일을 할 때도 있다. 외국인 학생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구하거나 은행 일을 봐준다. 한국어가 서투른 학생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일이지만, 학교 측의 부당한 지시로 공짜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19 확산 이전 국내로 입국하는 학생이 많은 시기,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교원으로 일하는 문선미 씨는 공항 픽업 업무를 지시받았다. 다른 교원들과 함께 별도 수당을 요구했지만, 학교에선 예상 밖의 대답을 들려줬다. 공항 픽업 등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겐 수업 강의 시수를 많이 주고, 하지 않는 사람에겐 강의 시수를 10시간만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행정 업무를 하더라도 10시간을 초과한 강의료는 기존에 책정한 것보다 적은 액수를 지급한다고 했다. 한국어교원들은 임금 삭감을 우려해 행정 업무를 도맡았지만, 코로나19로 강의 시수와 행정 업무가 감소하면서 급여가 대폭 줄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 한국어교원들은 강의료 원상복구를 요구하고 있다.

심할 경우 학내 행사에 동원되는 한국어교원도 있다. 이러한 부당 지시에도 참고 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한국어교원들은 사제나 선후배 관계로 얽힌 관계를 지적했다. 대학에서 일하는 한국어교원은 상당수가 내부에서 석사 이상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한국어교원으로 취업한 이후에도 지도 교수를 관리자로 만나기 때문에 부당한 지시나 억울한 상황에도 항의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코로나19에 10년 차 월급은 140만원,
고용보장 돼도 저임금 되풀이 될 우려 커

한국어교원들은 심각한 고용불안을 호소한다. 매학기 강의 평가 등에 따라 다음 학기 재계약 여부를 정하는 기관이 많아서다. 기간제 계약을 맺을 때 10주마다 계약하는 기관도 있다. 이 경우 '해고'도 쉬워지니 한국어교원은 10주마다 고용불안을 겪어야 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한국어교원의 무기계약직 전환이 확산세를 보이고 있다. 2019년 고용노동부가 “한국어교원도 기간제법(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는 해석을 내놓았고, 비슷한 시기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한국어교원들이 투쟁을 시작해서 2020년 3월 전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이후 연세대, 경희대 등 대학 기관에서도 한국어교원의 무기계약직 전환을 시작했다. 다만, 이들은 2018년부터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에 가입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대학 측과 맞섰기에 무기계약직 전환도 가능했다고 본다.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교원인 최수근 씨는 "여전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한국어교원이 상당수"라고 강조했다.

최수근 연세대학교 한국어교원 ⓒ 참여와혁신 DB
최수근 연세대학교 한국어교원 ⓒ 참여와혁신 DB

이와 관련한 사례는 인천대학교가 대표적이다. 인천대학교 한국어학당은 올해 3월 봄학기를 끝으로 운영을 잠정 중단했다. 코로나19로 수강생이 90%가량 급감한 탓이다. 200명이 넘는 한국어교원은 재계약을 하지 못해서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어교원들은 이러한 현상이 한국어 교육을 수익 사업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러 대학이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려고 규모를 늘려서 교원을 채용했다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쉽게 해고한다는 것이다.

무기계약직 전환으로 고용을 보장 받은 한국어교원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10년째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일하고 있는 최수근 씨는 코로나19로 인한 학생 수 급감으로 저임금의 고통을 겪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강의했지만, 학생이 줄어들자 10~11시간 강의를 하게 됐다. 연봉은 세전 1,400만원 수준이었다. 최수근 씨는 "올 상반기 이후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고용만 보장되고 임금은 보장이 안 되는 게 지금 상황"이라고 말했다. 근속이 쌓여도 연세 어학당 한국어교원의 시급은 최대 35,000만원 수준이다. 이들은 시급 인상과 함께 최소 15시간의 강의시간 보장을 대학 측에 요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윤영덕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시급 책정이 가능한 전국 128개 대학 기관 한국어교육원의 평균 시급은 31,800원에 불과하다. 평균 11시간에 불과한 강의 시수를 고려할 때, 한국어교원들이 심각한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부 한국어교원은 생계곤란으로 '투잡'을 뛰기도 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일터,
“교육부가 나서서 개선방안 마련해야”

현재 한국어교원 자격증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급한다. 제도의 법적 근거는 국어기본법에 있다. 2000년대 초반 한류 열풀으로 한국어교육에 관한 관심과 규모가 급성장하자, 정부는 2005년 한국어 보급 사업을 국가가 지원하도록 하는 국어기본법을 제정했다.

언어라는 문화, 교육, 출입국 관리와 연계된 한국어 교육은 문체부, 교육부, 법무부 등 다양한 정부 부처와 관련돼 있지만, 어느 곳도 한국어교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관련 부처가 많다 보니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쉬운 상황이다. 한국어교육원들은 각종 문제가 교육 기관인 대학 내에서 발생하는 만큼, 교육부를 주무 부처로 정하고 담당 부서를 배정해 한국어교원에 관한 종합적 관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고용은 불안하고, 임금은 낮고,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받는다. 그런데도 한국어교원들은 ‘코리안 티처’로 남으려고 한다. 3년 넘게 부당해고 소송 중인 최혜영 씨는 ‘학생들과의 교감’을 그 이유로 밝혔다.

“사실 한국어교원들은 일에 대한 보람 때문에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견디는 거예요. 저희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굉장히 특별한 존재가 돼요. 다른 나라에서 외국생활을 힘들게 시작한 친구들이 만나는 첫 번째 선생님에게 보내는 특별한 감정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굉장히 정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힘들지만 소송을 하고 있고요.”

최수근 씨도 “교실에서 학생을 마주하면 행복을 느낀다”면서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한국어교원들은 노동현실에 대한 불만은 많지만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들 만나면서 다들 행복해합니다. 저는 한국어 초급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어제까지는 식당에서 음식 주문도 못하던 학생이 수업을 듣고 나면 밥을 먹을 수 있게 돼요. 그 학생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거죠. 그런 이유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참아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