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최초 ‘임금피크제 무효’...“합리적 이유 없으면 차별”
대법원 최초 ‘임금피크제 무효’...“합리적 이유 없으면 차별”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2.05.27 08:17
  • 수정 2022.05.2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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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 “전향적 판결...임금피크제 폐지 나설 것”
대법원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
ⓒ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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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이유 없이’ 오직 ‘고령’을 이유로 적용된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장에선 적법성을 둘러싼 법리 다툼이 일 것으로 보인다. 임금피크제의 부당함을 지적해온 노동계에선 환영의 뜻을 밝히며, 한발 더 나아가 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계에선 임금피크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우려를 표했다.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태악)는 26일 퇴직자인 A씨가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한 임금 차액 청구 소송에서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한 것. 앞서 A씨는 연구원에서 도입한 임금피크제가 ‘고령자고용법 4조의4 1항’을 위반해 무효라고 주장하며, 퇴직할 때까지 임금피크제로 인해서 발생한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고령자고용법 4조의4 1항은 ‘사용자는 임금, 임금 외의 금품 지급, 복리후생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노동자나 노동자가 되려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채용, 승진, 퇴직·해고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판결의 쟁점은 고령자고용법 4조의4 1항이 강행규정에 해당하는지, 강행규정일 경우 연구소가 이 법을 위반했는지였다.

먼저 대법원은 고령자고용법 4조의4 1항에 대해서 “고용의 영역에서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여 헌법상 평등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려는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동 조항은 강행규정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해당 법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판단이다.

그러면서 이 사건 임금피크제에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며, 연구원이 4조의4 1항을 위반했다고 봤다. 그 이유로 대법원은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 제고를 목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점 ▲그러한 목적으로 55세 이상 직원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 삭감 조치는 정당하지 않다는 점 ▲임금피크제로 인해서 A씨가 불이익(일시에 임금 대폭 하락)을 입었음에도 적정한 조치를 받지 못한 점 ▲임금피크제 적용 전후 A씨에게 부여된 업무의 수준·내용에 차이가 없었다는 점 등을 언급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임금피크제에 대해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에 해당하여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고령자고용법 4조의4 1항의 ‘합리적 이유’에 관한 기준을 제시한 것에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라며 그 의의를 강조했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도입목적의 정당성 및 필요성 ▲실질적 임금 삭감의 폭이나 기간 ▲임금피크제 적용에 따른 대상 조치의 적정성(임금 삭감에 준하는 업무량 또는 업무강도의 저감 등)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의 원래 도입 목적에 사용되었는지 등의 기준에 따라 사안별 임금피크제의 효력을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의 판결 직후, 노동계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국노총은 “지금처럼 연령을 이유로 임금을 깎는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지속돼서는 안 된다”며 “오늘 판결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서 “현장 지침 등을 통해 노조 차원에서 임금피크제 무효화 및 폐지에 나설 것을 독려할 계획”이라고 했다.

민주노총은 “대법원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고령자고용법 제4조의 4 제1항을 강행규정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에 충실한 전향적인 해석이므로 적극 환영한다”고 했다. 다만 민주노총은 “강행규정이라고 판단하였다면 임금피크제 자체를 무효로 선언하였으면 되었을 것”이라며 “임금 삭감에 대한 대상조치 등을 도입한 경우 유효가 될 여지를 남겨둔 것은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을 끼워 넣어서 자본가들의 퇴로를 만들어 줘 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게 한 사건이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공공운수노조는 “대법원의 전향적 판결에 대해 환영의 입장을 밝힌다”면서도 “대법원이 강행법규 위반으로 임금피크제를 당연 무효로 판단하지 않고, 그 효력 여부를 판단하는 다소 복잡한 판단기준을 판례로 제시하여 침해된 노동자들이 권리를 구제받기까지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 우려된다”고 전했다.

사무금융노조는 “임금피크제 도입 후 일자리 창출 효과는 거의 없었고, 실질은 인건비 축소와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다른 한편으로, 중장년 노동자들의 임금을 단계별로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희망퇴직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사무금융노조는 “노령층의 빈곤 문제를 따로 고민할 것이 아니라 임금피크제 폐지를 통해 안정적인 노후 자금을 마련하고, 국민연금 수급시기까지의 정년연장과 사회안전망이 함께 구축될 수 있도록 획기적인 고용유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영계는 이번 판결에 불안한 내색을 드러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임금피크제는 고령자의 고용불안, 청년 구직자의 일자리 기회와 밀접하게 관련된 만큼 향후 관련 판결들이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과 법의 취지,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 신중하게 내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연령에 따른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는 5월 26일 대법원의 판결로 시행 6년을 맞는 임금피크제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권고에 따라 제도를 도입한 기업 현장의 혼란과 임금 소송 남발로 인한 노사 간 갈등이 격화될 우려가 커졌다”고 했다.

임금피크제는 일정 연령에 이르면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대신, 정년을 연장하는 제도다. 한국에서는 금융업계에서 조금씩 적용되다, 박근혜 정부 시기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본격 확산됐다. 당시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이 청년고용 확대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하며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노동계에선 청년 일자리 증가 효과는 거의 없고, 중장년층 노동자의 임금 삭감만 불러올 뿐이라며 이 제도를 비판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