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여도 위기 아니다
위기여도 위기 아니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08.12.3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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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떠들면 더 악화된다며 ‘괜찮다’는 말만
[신년 특집Ⅱ_르뽀] 위기의 공단을 가다

‘어렵다’는 말은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됐다. 눈만 뜨면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각종 지수들도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자동차업체가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하고 일시적으로 문을 닫고 있다. 더 많은 업체들이 가동시간을 줄이고 휴업에 들어갔다. 정부도 기업도 노동조합도 한 목소리로 어렵다고 말한다.

‘덩치 큰’ 기업들마저 이런 상황인데 중소업체들의 상황은 어떨까. <참여와혁신>이 2008년 연말 현장 분위기를 담았다.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 경주 모화공단, 인천 남동공단을 다녀왔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

 

도화선 품은 채 오늘은 평온
공장 가동률 절반으로…근무시간 안전교육으로 대체
 

왜 올라카는교?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와 경주 모화공단을 방문하기로 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첫 마디부터 “왜 올라카는교? 오지 마소” 한다. 필요하면 전화로 알려주겠단다.

어렵사리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를 찾았다. 관계자는 한사코 취재를 거절하다 설득 끝에 겨우 익명을 전제로 취재를 허락했다. 이 관계자가 털어놓는 취재 거절의 사유는 역설적으로 공단지역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사실 경제위기가 닥치고 나서 공단지역 가동률이 조금씩 떨어졌습니다. 물론 석유화학산업의 특성상 완전히 셧다운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자꾸 언론에 실리면서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니, 오히려 더 악화될 뿐 도움 될 일이 없습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언론에 자꾸 위기다, 어렵다 하는 기사만 나오면 위기가 기정사실화 돼서 그나마 있던 거래처마저 ‘아, 저기가 위기구나’ 하면서 불안해하고 떠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사코 취재를 거절한 것이다.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에는 20여 개의 석유화학업체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주로 정유사로부터 1차 원료를 받아 가공해서 2차 원료를 생산한다. 소비자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제품은 이런 2차 원료를 가공하는 업체들의 제품이다.

그런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2차 원료를 납품받는 업체들이 감산이나 가동중단에 들어갔다. 석유화학산업단지 업체들의 입장에선 납품처가 끊기거나 납품량이 줄어든 셈이다.

삼중고 시달리는 석유화학산업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에선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에 파급되기 시작한 때부터 원가절감 방안을 마련했다.

타격을 가장 먼저 입은 곳은 엉뚱하게도 공단지역에 우유를 보급하는 대리점. 각 업체들이 원가절감 방안의 하나로 간식으로 지급하던 우유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연간 수억 원의 매출을 올리던 우유대리점에 난데없이 불똥이 튀었다.

“석유화학산업단지의 경우 울산시청에서 조사한 최근 자료를 보면 공장가동률이 평균 60% 정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수요처가 없는데 마냥 공장만 가동할 순 없잖습니까? 그중에는 30%대의 가동률을 보이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업체들의 경우 노동자들을 교육으로 돌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은 주로 안전교육과 작업교육 위주로 진행된다. 이와 함께 휴가 사용이 권장되고 있다. 작업 대신 교육을 시키더라도 인건비는 나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인건비를 아끼려면 휴가 사용을 권장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또 이번 기회를 이용해 정기보수를 하는 업체도 있다. 석유화학산업은 대표적인 장치산업으로 정기보수에만 1달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 업체들은 미리 예정된 정기보수 일정을 당겨 실시함으로써 유휴인력을 최소로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석유화학산업단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크게 세 가집니다. 우선 유가와 환율의 불균형이 문젭니다. 최근 유가는 떨어지고 있지만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기업들의 부담은 전과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유가가 떨어져 원료값은 내렸는데, 환율이 오르면서 다 까먹고 있는 거죠. 또 하나는 물량이 줄었다는 겁니다. 주로 2차원료를 생산하는데 국내 수요가 위축되면서 판매가 안 돼 재고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수출을 주로 하는 기업은 그나마 조금 낫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유를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조만간 대규모 공단이 건설된다고 하는데 아마 전 세계적으로 석유화학산업이 타격을 입을 겁니다. 사실 30년 전에 울산에 석유화학산업단지가 생길 때는 경쟁도 거의 없고 호황이었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구조조정만은 안 된다

공단 관계자는 “이 상태로는 답이 없다”고 진단했다. 아직까지 인력 감원 움직임은 공단 내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장담할 수 없단다. 당장은 버티더라도 위기가 길어지면 업체들이 구조조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이다. 이 관계자는 그 시기가 2009년 상반기쯤 되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노동조합 입장에서도 위기감이 크다. 공단 관계자 말마따나 위기가 길어져 구조조정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노동자들이 위기를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학노련 울산지방본부 최규헌 본부장은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의 가동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면서도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현장에선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석유화학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각자가 맡은 고유 업무가 있고, 공장이 완전히 셧다운 되지 않는 한 업무에는 변동이 없다. 원료투입량이 줄어들더라도 공장은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은 똑같이 작업을 한다. 또 이들이 받는 급여도 자동차산업과는 달리 월급제가 기본이라서 고정적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위기를 몸으로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사업주들은 어렵다는 말을 곧잘 하죠. 그렇지만 올해 적자를 본 기업은 드뭅니다. 사업주들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올해 경영목표에 미달했다는 의미라고 보면 될 겁니다.”

하지만 최규헌 본부장은 “위기가 길어진다고 해도 구조조정만은 본부 차원에서 결단코 막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기로 인해 경영이 어려워진다면 “상여금을 반납하는 등 고통을 나눌 용의는 있지만 구조조정만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최 본부장의 확고한 의지다.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도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기감이 조용히 퍼지고 있다. 도화선에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는 채 석유화학산업단지는 위태로운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 최규헌 화학노련 울산지방본부장
LDPE는 한화석유화학의 효자제품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제품은 자칫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다. LDPE 개발 당시 더딘 진척속도에 경영진은 개발을 포기하고 연구비를 중단하려 했다.

당시 한화석유화학노동조합 위원장이던 최규헌 본부장은 그 즉시 경영진에게 달려가 LDPE 개발을 계속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당장 개발이 어렵다고 신기술 개발을 포기하면, 나중에 조합원의 고용과 회사의 이익을 보장해 줄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영진을 만난 최 본부장은 “필요하다면 임금을 동결할 용의도 있다. LDPE 개발 중단만은 절대 안 된다. 만약 LDPE 연구비를 중단한다면 노동조합은 바로 총파업에 들어가겠다”며 경영진을 설득했다. 최 본부장의 위세에 밀린 경영진은 LDPE 개발 중단 계획을 보류했고, LDPE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탄생한 LDPE는 지금 한화석유화학의 매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제품으로 발전했다. 한화석유화학의 LDPE 개발 사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산업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 LDPE - 고압 폴리에틸렌으로 가공성과 광학성이 우수하고 내충격 강도가 탁월해 농업용·공업용 필름, 압출피복, 사출, 발포, 중공성형 등의 원료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