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운수노조 연속기고①] 안전인력은 남아도는 인력이 아니다
[공공운수노조 연속기고①] 안전인력은 남아도는 인력이 아니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22.10.21 13:48
  • 수정 2022.10.2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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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공공운수노조가 4일 오전 10시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용역형 자회사·다단계 민간위탁 지하철 역무원 안전인력 충원 요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공공운수노조 

노동자들이 안전인력을 요구할 때 흔히들 ‘2인 1조 작업’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때 2인 1조 작업형태는 기존에 1명이 작업하던 것을 2명이서 나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2인 1조란 작업팀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를 관찰하거나 모니터링하는 작업방식이다. 미국산업안전보건법에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으로 법제화되어 있고, 한국의 경우 ‘2인 1조’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노동자가 유해·위험한 작업을 할 경우 관리감독자의 역할을 규정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35조(관리감독자의 유해·위험 방지 업무 등)에 관한 조항이 있다.

2인 1조 작업을 한다고 해서 모든 위험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비상상황에서 사고방지에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구의역 ‘김군’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태안발전소 김용균 사망사고에 이어 이번 SPC 평택공장 사망사고에서 비상정지버튼을 눌러줄 ‘동료’가 없었다는 현장 노동자들의 진술은 단지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라, 사고예방과 사고대응에 대한 조치를 사전에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신당역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신당역 사건의 경우 근본적으로 젠더 기반 폭력이기 때문에 2인1조와 같은 작업형태의 변화만으로 사건의 예방과 대응을 이야기할 수 없지만, 신당역 사건의 배후에는 지난 수십년간 감축되어온 역무인력의 악화가 자리한다.

2006년 한국철도공사는 역무분야 인력운영 합리화방안을 마련하면서 역무 업무를 “안전유지가 낮은 비핵심 업무”로 규정하고 외주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수도권 전철역의 절반은 ‘코레일네트웍스’라는 자회사로 외주화되었다. 서울교통공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공사가 직접 운영하는 역의 역당(km) 인원은 14.2명인데, 외주화된 9호선의 경우 6명에 불과하다. 역무인력이 감축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업무가 위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순업무라는 재정의가 불가피하다. 그런 한에서 기존의 안전인력은 ‘남아도는 인력’으로 간주되어 필요인력의 범주가 축소된다. 이렇게 외주화를 위한 적정인력은 기존의 안전인력을 와해시켜면서 다시 계산된다.

공공부문 자회사는 공공부문의 인력예산을 감축하기 위한 저임금, 저인력 구조를 만들면서 만성적인 인력부족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채용공고를 내더라도 웬만하면 공공부문 자회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부족한 정원에, 실제 인원은 더 적으니 현장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점점 강화되고 있다. 저임금과 부족한 인력은 공공부문 자회사 노동자들의 위험과 건강을 해치는 공통적인 유해·위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해결되기는커녕 점차 악화되고 있다. 이는 ‘자회사’가 특정 업무의 전문성과 독립성에 기반한 공공기관이 아니라 저임금의 인력보급형 원·하청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과 무관하지 않다.

공공부문 자회사 노동자들이 말하는 ‘안전인력’은 단지 위험업무에 한정된 2인1조 작업방식의 확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외주화 과정에서 깎여나간 인력, 그로 인해 만성화된 저인력 현상은 오히려 더 많은 위험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은 쉬고 싶어도 여유인력이 없어 동료들에게 업무량을 부담 지워야 하는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고 말한다. 동료들의 수명을 서로 갉아먹는 일터가 아니라 동료의 건강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요구가 ‘안전인력’이다. 동료(Buddy)의 노동과 삶을 지켜내는 것, 이를 위해 공공부문 자회사 노동자들이 곧 파업을 한다. 우리는 동료 시민으로서 이들 노동자들의 노동이 ‘비핵심 업무’라는 말로, ‘위험하지 않다’는 말로, 공공부문을 효율화해야 한다는 말로 더 이상 폄하되지 않도록 지지하고 응원하길 바라본다. 이는 곧 나의 수고로운 노동에 대한 격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