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 창의적 연구 기피 조장
R&D 예산 삭감, 창의적 연구 기피 조장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3.12.07 11:36
  • 수정 2023.12.07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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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도 처방도 잘못···R&D 예산안 원상복구 해야”
[인터뷰]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

지난 8월 22일 정부는 30여 년 만에 삭감한 국가 R&D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내년도 국가 R&D 예산안은 25조 9,000억 원으로 2023년 대비 16.6%(-5조 2,000억 원) 줄어든 액수다. 당초 6월 2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보다 증액된 R&D 예산안을 마련했으나,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삭감한 국가 R&D 예산안을 발표했다. ‘미래 경쟁력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는 거센 비판에 당정은 예산안을 재논의하겠다고 밝혔지만, 예산 삭감 기조는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10여 개의 연구원 단체로 구성된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는 6월 예산안으로 원상 복구할 것을 정부에 요구 중이다. 지난 11월 24일 연대회의를 만나 현장 연구원들이 R&D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이유를 들어보았다. 인터뷰에는 이운복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이상근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ETRI지부 지부장, 이준영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수석부지부장 세 사람이 자리했다.

(왼쪽부터) 이준영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수석부지부장, 이운복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이상근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ETRI지부 지부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연구개발 중단, 학생연구원 처우는 악화

- 연구원들이 국가 R&D 예산 삭감에 반발하는 이유는?

이상근 : 예산 문제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이전에도 연구비 부족으로 새로운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R&D 예산안은 신규 연구개발과제뿐 아니라 기존 연구개발과제 예산마저 줄여 놨다. 앞으로 3~4년은 더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중단해야 할 상황이다. 그렇다고 연구자가 설정했던 목표치나 성과를 삭감된 예산만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구는 제품 생산과 다르다. 하다 말면 남는 게 없다.

그렇게 돈도 없고, 연구를 중단할 수도 없다면 결국 사람을 줄여야 한다. 10명이서 하던 과제를 1~2명이 하게 된다. 남은 사람끼리 연구를 잘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구비가 줄어들 것에 대비해 새로운 연구개발과제를 기획하고 수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따놓은 연구과제는 숙제처럼 수행해야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이준영 : R&D 예산이 재료, 장비 및 시약을 포함하는 연구비와, 연구자와 학생연구자의 인건비, 연구소나 대학을 운영하기 위해 지원되는 간접비를 지원하는 주요 재원이기 때문이다. R&D 예산이 삭감되면 연구를 수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연구자가 충분한 급여를 받지 못하고, 연구소를 운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연구 생태계 전체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 연대회의는 물론 사회 각계에서 기초연구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다.

이준영 : 요즘 ‘거대과학(Big Science)’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입자가속기처럼 거대한 시설과 막대한 지원을 필요로 하는 거대과학은 개별 연구원이 수행하기 어렵다. 일례로 실험에 쓸 유전자 조작 쥐는 한 마리에 수 천 만원을 호가하는 경우가 있고, 1ml도 안 되는 시약을 구매하는데 수 백 만 원이 들기도 한다. 정부에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으면 한국 과학기술계의 경쟁력이 국제적으로 퇴보할지 모른다.

단지 기초연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R&D에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이유로 ‘시장 실패’를 꼽곤 한다. 기업을 비롯한 시장은 불확실성이 크고 많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연구개발에 도전하기 어렵고, 도전하더라도 실패했을 때 피해가 크다. 정부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이준영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수석부지부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 특히 젊은 연구원들이 국가 R&D 예산 삭감을 비판한다. 왜 그런가.

이준영 : 국가 R&D 예산 내 연구비에 연구원의 인건비가 포함돼 있다. R&D 예산이 줄어드는 만큼 연구개발과제도 적어지고, 과제가 적어질수록 연구기관은 연구비·인건비를 마련하기 어렵다.

유독 대학원생 연구원(학생연구원)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국가 R&D 예산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국가 R&D예산을 통해 인건비를 지급받는 학생연구원이 8만 여 명이다. 약 40%(이공계 한정 80%)의 대학원생이 학생 인건비를 통해서 생활비를 조달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서 일하는 학생연구원은 근로계약을 맺기 때문에 비교적 영향을 적게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 있는 학생연구원은 사정이 다르다. 아직 정부가 내년도 R&D 예산을 확정하지 않았는데도 일부 학생연구원이 지도교수로부터 인건비를 삭감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남은 인건비를 줄여서 내년도 인건비로 쓰자는 식인데, 인건비를 협상할 능력이 부족한 학생연구원의 의사가 과연 얼마나 반영됐을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대학원생들은 졸업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인건비를 깎아서라도 연구하려 한다. 예산이 삭감된 상황에서 ‘교수님 인건비 더 늘려주십시오’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연구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목소리는 잠식될 가능성이 크다.

주도적이고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든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주제가 정해져 있는 정부 연구용역과 달리, 기초 개인연구사업은 주제 선정이 비교적 자유롭다. 여기에 ‘신진 연구자 지원’, ‘생애 첫 연구’, ‘창의·도전 연구’ 등 미래 세대를 위한 연구개발과제 지원 사업도 있는데, 주제 선정이 자유로운 만큼 학생연구원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생애 첫 연구’, ‘창의·도전 연구’ 등에 관한 예산도 삭감됐다.

창의 연구 기피 조장
중소기업도 타격 클 것

- 연대회의는 R&D 예산 삭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를 받는 현장 연구자들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이탈을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했다. 출연연 연구원들의 노동조건이 궁금하다.

이운복 : 출연연은 기타 공공기관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임금 인상률이 정부 가이드라인을 넘지 못한다. 연봉이 대기업 민간연구소의 절반 수준이다. 복지제도도 공무원 수준에 맞게 계속 축소시키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연연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연구원들이 있다. 고용안정도 하나의 이유지만,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과학자로서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R&D 예산 삭감 발표 이후 현장에선 출연연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과기정통부가 R&D 예산 삭감과 함께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하위 20% 사업을 구조조정 한다는 내용인데, 그렇다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창의적인 연구는 기피할 수밖에 없다.

이운복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 국내 산업계에도 R&D 예산 삭감이 영향을 끼칠까?

이상근 :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 본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과학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발표해왔다. 항상 강조하던 표현 중에 하나가 ‘민간 주도’, ‘민간 중심’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민간은 업체 연구, 혹은 연구원 스스로 창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듯하다. 이 정부에서 말하는 민간은 오직 삼성, LG, 현대차, 한화 등 대기업 같다. 출연연에서 연계하는 사업 중 ‘R&D 바우처 사업’이 있다.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사업인데 국가 R&D 예산 삭감으로 대폭 깎였다.

이운복 : 대기업은 자체적으로 연구소를 운영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 지원이 필요한 곳은 중소기업이다. 수출의 한 축을 차지하는 알찬 중소기업 중 출연연과 연구개발과제를 함께 수행하는 곳들이 있다. 이번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하는 중소기업의 연구개발비가 최대 80% 감액된다. 조그마한 기업체들이 적잖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진단도 처방도 잘못···
예산안 원상복구 해야”

-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이라며 R&D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운복 : 연대회의를 출범하고 지난 10월 조성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과 면담을 했다. 조성경 차관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연구소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이니 뭐가 비효율적이고 뭐가 카르텔인지 잘 알지 않느냐’고. 그래서 ‘비효율적이고 카르텔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통령이니 그게 뭔지 알려 달라,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즉답은 안 하고 추후에 알려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과학기술계에 여러 집단이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럼 정부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지시하는 게 맞을 텐데 그저 ‘비효율’, ‘카르텔’이라며 R&D 예산을 깎겠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근 : 물론 비효율적인 몇 가지 사례들이 나오고는 있다.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부 사업을 따내서 적당히 회사를 유지하려는 기업이 있다. 그렇다면 제도 정비와 철저한 감사를 해야지, 총예산을 깎아서 될 게 아니다. R&D 예산을 깎아버리면 오히려 부정적인 사례가 더 늘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예산이 부족할 것을 대비해서 너도나도 연구 사업을 따오는데 매몰되다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불법을 조장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상근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ETRI지부 지부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이준영 : 연구개발과제가 전문적일수록, 첨단일수록 그 업무를 수행할 연구원이 많지 않다. 하는 사람이 다시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분야처럼 R&D에도 수의계약이 적용될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연구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키웠으면 한다.

- 정부·여당은 여전히 R&D 예산 감축 기조를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연대회의가 원상복구를 촉구하는 이유는?

이운복 : 감축된 R&D 예산 속에서 기관별 연구비를 조정하거나, 일부만 복원하는 방식으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일례로 각 지역에 위치한 테크노파크는 그 지역의 산업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자체와 관련한 연구를 하는 기관들에 할당되는 예산을 살리지 않으면 연구기관도 지역도 어려움에 처하고 만다. 피해는 광범위한데 문제로 지적되는 항목만 복원하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준영 : 예산 삭감이 학생연구자에게 미치는 피해가 너무 큰데, 지금 여야가 제시하는 해결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불충분하다. 국민의힘은 학생연구원의 처우를 개선한다며 장학금 지원 규모 확대를 내세운다. 더불어민주당은 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 학생 인건비를 37억 3,900만 원으로 증액해 단독 의결했다. 민주당이 제시한 37억 3,900만원의 예산은 4대 과학기술원 학생들에게 연 30만 원 정도 지급할 수 있는 금액으로 예산 삭감의 피해를 보전하기에는 부족하다. 장학금을 늘리겠다는 여당의 계획도 현재 국내 대학 지원 체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장학금 제도는 학부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은 연구개발 참여 인건비·조교비를 통해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야가 제시한 해결책은 진단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처방이다. R&D 예산은 보통 ‘인문사회기초연구’나 ‘나노·소재 기술개발’ 등 특정 주제에 대한 사업을 바탕으로 지급돼서 어느 대학으로 들어갔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4대 과학기술원이나 출연연의 경우 주요 사업비나 연구운영비 명목으로 지원 대상을 명시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또한 해당 기관에서 사용하는 연구비의 절반에 미치지 않아서 전체 금액을 추산하기에는 무리다. 학생연구원에게 지급되는 인건비를 정부도, 학생도, 지도교수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 R&D 예산이 학생연구원들 인건비로 얼마만큼 투입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예상 피해 규모도 가늠하기 어렵다. 진단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처방이기 때문에 예산을 땜질하기보다는 삭감액을 원상 복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