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부품사 ‘국내 공장 전환’ 속도 내나? 말레베어 폐쇄 예고
글로벌 부품사 ‘국내 공장 전환’ 속도 내나? 말레베어 폐쇄 예고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4.03.26 01:03
  • 수정 2024.04.02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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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말레그룹 이사회, 내년 9월 한국공장 폐쇄 결정
말레그룹-노조 26일 대화 예정···부품사 노사 논의에 사회적 관심 필요

전기차 판매가 주춤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전동화로 인한 부품사 위기가 고조됐지만, 현장에선 위기를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부품사와 부품사 노동자가 늘었다는 정부 통계(‘자동차부품 제조업 산업·일자리 전환 지도’, 2023년 9월 기준)가 나왔다.

속도는 줄었지만 방향은 달라지지 않는다. 특히 글로벌 완성차와 부품사들은 전기차로 전환을 이유로 공격적인 자산·인력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 업체의 한국공장이 전환 위기를 먼저 마주하고 있다. 부산 말레베어공조가 그렇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동부산지회 말레베어분회는 얼마 전 내년 9월에 공장 문을 닫는다는 독일 말레그룹 이사회의 결정을 통보받았다. 말레베어공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제작 : 참여와혁신 디자인팀
제작 : 참여와혁신 디자인팀

본사의 공장 폐쇄 통보
“멍하고 충격적”

지난해 12월 7일, 자동차 부품사 말레베어공조 한국 경영진이 노조 대표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내용은 ‘독일 본사에서 공장 폐쇄 결정을 전달받았다’는 통보였다. 공장 폐쇄 시기는 내년 9월, 임주희 금속노조 말레베어분회 분회장은 “그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냥 멍하고 충격적이었다”고 떠올렸다.

부산시 기장군 장안산업단지에 있는 말레베어공조는 독일 말레그룹이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 사업장이다. 자동차 열 관리 공조 분야(콘덴서·배기가스 순환장치) 부품을 만드는 말레베어공조에는 160명(생산직 121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기장군 주변만 봐도 “대부분 월급이 딱 200만 원, 세금 떼면 더 줄어드는 데다 점심도 주지 않는 공장이 수두룩”한데, 그나마 200만 원 후반대 월급에 할 말은 하면서 일할 수 있어 부러움을 사온 160개 일자리가 한 번에 사라진단 뜻이다. 말레베어공조 노동자들은 “절망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 아직도 가족에게 공장 폐쇄 사실을 말하지 못한 이들도 여럿이다.

희망퇴직, 분리 매각···
계획된 폐업이었나?

돌이켜 보면 회사는 계속 신호를 보냈다. 말레베어공조는 인적·물적 구조조정을 해왔다. 2019년 말레베어공조는 희망퇴직을 받기 시작했다. 두 차례 희망퇴직을 통해 약 100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떠났다. 2023년에는 말레그룹의 서모스탯(THERMOSTAT·냉각수 온도 유지 부품) 사업부 매각에 따른 한국공장 분리 매각이 추진됐다. 

말레베어분회는 “코로나 시기 독일 본사는 한국 노동자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노조는 희망퇴직 2회, 상여금 지급 유보, 인력 재배치, 휴업, 분리 매각을 수용하며 본사의 고통 분담 요구에 협조했다”며 “한국공장 노동자들은 경영 위기 극복 자구안 합의로 2022년 회사를 흑자 전환시키는 성과를 만드는 한편, 서모스탯 사업부 매각까지도 노사 간 분쟁 없이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런 과정을 거친 말레베어공조 노동자들은 회사의 ‘기획 폐업’을 의심하고 있다. 말레베어분회는 “한국공장의 인원 감축과 분리 매각을 통해 사업을 축소시켜 공장 폐쇄 사전 정지 작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며 “2022년 아시아태평양 부사장의 한국공장 지속 발전을 위한 지원과 협조 약속에도 불구하고 1년 만에 공장 폐쇄 결정으로 이어진 것은 한국공장 노동자들과 노조에 거짓 희망을 품게 해 눈을 속인 기만적인 쇼였다”고 비판했다.

제작 : 참여와혁신 디자인팀
〈말레베어공조의 사업 축소 과정〉 제작 : 참여와혁신 디자인팀

말레그룹, 자동차 산업 변화에 따른 결정··
노조, 어떤 의사 결정 과정 거쳤는지 몰라

말레그룹은 구조적인 이유로 한국공장 폐쇄를 결정했단 입장이다. 말레그룹 이사회는 ‘매출 감소와 투자 가치가 떨어지는 한국공장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가 부적합하기에 2025년 9월까지 한국공장을 폐쇄한다. 한국공장 생산 제품은 인도와 중국공장으로 이전한다’는 입장을 노조에 전했다. 

구체적으로 말레그룹은 완성차 업체가 부품이 조립된 형태의 덩어리, ‘모듈’ 납품을 요구하기에 모듈 납품을 할 수 없는 말레베어공조의 구조상 단품 납품으로는 향후 매출을 올리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모듈 납품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려면 1,000억 원 가량의 투자가 필요한데, 이미 모듈 납품을 할 수 있는 중국공장에 더 투자하면서 ‘중국 전기차 시장’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말레그룹 측은 이번 한국공장 폐쇄 결정은 구조적인 문제이기에 한국 직원들의 잘못이 아니며 한국공장뿐 아니라 일본공장, 미국공장도 폐쇄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박병호 금속노조 동부산지회 지회장은 “결국 중국과 인도로 가면 더 이윤이 남으니까 가겠다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말레베어공조의 원청 현대차·기아는 한국에 있다. 현대차·기아는 품질 기준이 무척 까다롭다. 이에 대응하면서 물류비, 공급망 불안 리스크 등을 감당하는 것이 결국 한국공장을 유지하는 쪽과 비슷하지 않겠나. 회사는 3년 전부터 분석해 이런 결과를 냈다는데, 어떻게 제대로 분석을 했는지 노조는 확인도 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

말레베어분회 조합원들이 20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열린 ‘금속노조 2024년 투쟁선포식’에서 공장 폐쇄철회를 촉구하는 내용의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말레베어분회 조합원들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열린 ‘금속노조 2024년 투쟁선포식’에서 공장 폐쇄철회를 촉구하는 내용의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글로벌 부품사 구조조정 영향받는
한국공장 노동자들

글로벌 부품사의 공격적인 구조조정에 따른 국내 공장의 불안은 말레베어공조만의 일은 아니다. 정유림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경기 전망이 좋지 않은 가운데 급증하는 미래차 투자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글로벌 완성차와 부품사들은 기존 사업 축소, 대규모 인력 감원을 발표하고 있다”며 “미국, 유럽 등 한국 주요 자동차 수출국들의 통상 장벽도 높아져 국내 생산 축소도 여전히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국내 외투 기업 소속 노동자들의 구조조정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며 “공장 폐쇄가 예고된 말레베어공조뿐 아니라 국내에 있는 콘티넨탈 등 부품사는 감소군(엔진 부품, 동력 전달 등) 부품사가 아닌데도 구조조정이 예정된 상황”이라고 했다. 

독일 3대 자동차 부품사 콘티넨탈도 내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7,150명을 줄일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조남덕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콘티넨탈지회 지회장은 “독일 콘티넨탈 본사 차원에서 특정 사업부 일부를 매각하거나, 별도 법인 분리를 하는 등 사업을 잘게 쪼개는 식의 계획을 발표했다”며 “그런데 한국공장에선 어느 수준으로 구조조정을 하는지 여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현재 전기차 판매가 주춤하고 있는데, 이 시기를 이용해서 내부적으로 미래차 전환을 준비하려는 것 같다. 우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방법은 없고 우려만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공장 폐쇄로 209명의 조합원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사회적 고용안정기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합의를 지난해 사측과 맺은 한국와이퍼 노동자들도 비슷했다. 한국와이퍼는 전 세계 자동차 부품사 2위 일본 덴소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덴소는 산업전환기에 맞춰 파워 트레인(PT·Power Train) 등 기존 사업부를 정리하고 신사업 중심으로 체질 개선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와이퍼 청산도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성원 동의 없는 공장 폐쇄 반대
우리에겐 그런 권리가 있어”

말레베어분회는 노조의 동의 없는 공장 폐쇄, 이에 따른 집단 해고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말레베어분회가 2022년 7월 13일 회사와 체결한 노사 합의서에도 명시돼 있다. 노사 합의서에는 ‘회사는 노조 동의 없이 인원 정리를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또 노사 단체협약에는 ‘공장 폐쇄, 정리 해산, 사업 철수 최종 종결 전에 노사 합의하되, 최종 종결 효력은 노사 합의 후 발생한다’는 문구가 있다. 이는 회사 청산 절차에 대한 노조의 합의권을 규정한 조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말레베어분회는 말레그룹에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본사와 교섭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또 “구성원의 동의 없는 공장 폐쇄는 반대하며 우리에겐 그런 권리가 있다”고 말레그룹에 강조해왔다. 동시에 분회는 사내 출근 선전전, 부산 독일 영사관과 독일 문화원 앞 1인 시위, 기장군 총선 국회의원 후보(더불어민주당 최택용·국민의힘 정동만) 사무실 앞 1인 시위, 말레베어공조 폐쇄 철회 촉구 1만 서명 운동, 주한 독일 대사와 독일문화원장 면담 추진, 기장군의회 성명서 추진 등을 통해 “대리점 폐쇄하듯 쉽게” 한국공장을 문 닫으려는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산업전환, 시장 상황, 고객 요구, 제품 전략···” 말레그룹이 말하는 단어들 넘어 말레베어분회의 요구와 투쟁은 노동자가 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한 존재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하나의 이해관계자로 참여해 목소리 내야 한다는 세계적인 흐름 위에 있다. 

앞서 영국 보수당은 2017년 총선에서 기업의 지배구조를 ‘주주 중심주의’에서 노동자,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영국 보수당은 당시 공약에서 “(기업) 이사회는 주주들만이 아니라 노동자, 협력업체, 지역사회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2020년 대선 후보 시절 “기업은 노동자, 지역사회, 국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기업의 주된 책임이 주주 수익 창출에 있다는 것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고 연설한 바 있다.

ⓒ 말레베어분회
말레베어분회가 공장 내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다. ⓒ 말레베어분회

말레그룹-노조 대화 예정
사회적 관심 필요

결국 말레그룹 말레베어(공조사업부) 관계자들은 26일 오전 9시부터 말레베어공조 공장에서 노조와 종일 논의하기로 했다. 

구조조정이 벌어지고 있는 독일 자동차 노사는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이문호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내에서 현재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독일 자동차 회사 구조조정 대상이 100이라면 80은 자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독일에선 노사가 산업전환 로드맵을 짜는 방식으로 합의를 이뤄가고 있다. 사측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가 아니라 언제까지 공장 문을 닫을지부터 인력 운영, 노동자 지원 방안 등 전환 과정에서 연착륙을 위해 노사가 협약을 맺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은 “독일이나 유럽의 경우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사가 로드맵을 짜서 대응하지만 미국은 수시로 구조조정했다가 금세 재고용하는 식이다. 평생 고용 개념이 있던 일본은 점차 고용이 유연한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며 “한국은 유럽, 미국, 일본과 모두 다르다. 우리 상황에 맞는 결과를 노사가 모색해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국내 자동차 부품사가 산업전환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를 맞지 않은 과도기, 글로벌 부품사의 국내공장에서 이뤄지는 이번 노사 대화는 향후 비슷한 일을 겪게 될 부품사 노사가 참고할 사례이자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말레베어공조 노사 합의에 대한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