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고딩’으로 살아가기
대한민국에서 ‘고딩’으로 살아가기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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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꼭두각시도, 실험용 쥐도 아니다”
‘바리깡’의 획일성에 ‘똥침’을 놓는 아이들
‘어른’들의 잣대를 버리고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 2005년 5월 7일, 광화문


“광화문 집회 20만 명(전국 17살 이하 청소년의 삼분의 일)만 모이면 등급제 폐지 된답니다. 꼭 돌려”, “내신 위주의 대입제도 반대 촛불 시위, 5월 7일 19시 대구 동성로”, “[돌려!] 5월 8일 부산시청 앞 내신등급제폐지, 자살 추모 촛불 집회 모두 참석”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문자가 번져나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급히 “내신만으로 대학가는 것은 아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다른 한편으로 서울시교육청은 집회참석 학생들을 징계조치한다고 엄포를 놨다.


설득과 엄포 속에서도 아이들은 광화문에, 동성로에, 부산시청 앞에 모였다. 5월 7일 광화문에 모인 인원은 학생 400여 명, 시민단체 등 관계자 50명을 포함하여 총 450여 명이다. 광화문에 왔지만 ‘무서워서’ 집회장소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은 교보문고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날 교사와 교육청 관계자 600여 명이 나와 집회참석 아이들을 만류하였고, 광화문과 시청 앞에는 61개 중대, 6000여 명의 경찰이 배치됐다.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 고등학교에서 내신 부풀리기가 이루어졌을 때도, 암묵적으로 고교등급제가 실시됐을 때도, 일진회와 수능 부정 사건 등을 두고 전체를 싸잡아 도덕성을 문제 삼았을 때도 이들은 묵묵히 교실에서 ‘공부만’ 했다. 학생이기에, 어리기에 어른들이 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더 이상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무엇을 기준삼아 한 발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들이 거리로 나오는 이유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만 거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젠 아이들이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집회 사실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는 K고 여학생은 또래 학생들의 촛불집회에 대해 “자칫하면 오해와 폭력을 낳을 수 있다”며 우려했다. 이런저런 우려 속에서도 이들은 왜 거리로 나와야 했는가?


중·고등학생들의 광화문 집회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공부나 할 것이지 학생들이 무슨 집회냐? 우리 때는 지금보다 더 했어도 이러지 않았다’는 의견에서부터 ‘우리는 왜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라는 의견까지…. 하지만, 모두 ‘어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들이다.

2005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고딩’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학교는 전쟁터


“고1은 교육부 꼭두각시이고, 고2는 실험용 쥐냐?”
기존의 ‘수·우·미·양·가’의 절대적 등급제에서 1∼9등급까지의 상대적 등급제로의 변화와 2008학년도 대학입시부터 내신반영비율이 높아진다는 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매번 변하는 입시정책에 학생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상대적 등급제의 적용으로 교실은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노트 필기한 것을 보여주지 않고, 친구를 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현재 고등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고민을 이야기할 곳도, 시간도 없는 아이들. 하루 10시간 이상을 부대껴야 하는 내 옆의 짝궁, 내 앞·뒤의 친구가 적이 되어야 하는 현실은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버겁다. 연일 심심찮게 보도되는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소식에는 짙은 외로움의 냄새가 배어 있다.


현재 학생들의 심리는 ‘불안’과 ‘억울함’으로 대변된다. 자주 바뀌는 입시정책에 대해 고2인 C군은 “그동안 준비해 온 것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새로운 입시제도에 허덕여야 하는 것은 너무 억울해요”라고 항변했다. 현장에서 고1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P교사는 “학교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등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내신등급제는 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B교사는 “사회적 분위기와 기업이 생각하는 대학서열화가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교육정책의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꼬집었다. 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두발자유화가 교권에 대한 도전?

 

아이들은 관심과 칭찬에 목이 말라 있다. 부모님은 돈을 벌기에 바쁘고, 형제는 많지 않고, 선생님은 평범한 나에게는 관심 없고, 그 속에서 외로움은 점차 커져만 간다. 싸이월드를 비롯한 커뮤니케이션 사이트들의 인기도 이러한 정서가 반영된 결과이다. 인터넷 문화의 아이들에게 ‘악플(욕설 등의 악성 댓글)’보다 무서운 것은 ‘무플(댓글이 달리지 않는 것)’이다.


단지 인터넷 세상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현실에서도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서는 더 이상 ‘나’는 ‘나’가 아니다.


S여고에 다닌다는 여학생은 “꾸미고 싶은 것은 본성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같은 학교의 A양은 “‘귀밑 5cm’같은 지나친 규제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불편을 안겨줘요. 귀밑 20cm 정도의 적당한 길이를 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두발자유화 논쟁에 대해 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H교사는 “두발자유화가 학생들 간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H교사는 “현재 아이들은 자유를 주더라도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며, “학생회 간부와 학생대표들과의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일찍 시작된 ‘홀로서기’


대한민국의 ‘고딩’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학교에서의 친구는 경쟁자가 되어 버렸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는 것은 어느새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더욱이 고3들의 경우에는 고시원에 들어가 홀로 생활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빨리 ‘홀로서기’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과거보다 덩치가 커졌을지는 몰라도 마음은 아직도 여리고 순수하다. “야간자율학습 때 자고 있는 친구를 (경쟁자로 생각해) 깨우지 않았다가 뒤늦게 자책했다”는 어느 여고생의 고백과 “집회에 참석하면 경찰에 잡혀간다는 선생님 말 때문에 참석하고 싶어도 무서워서 못 한다”는 한 남학생의 말은 여린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2005년 대한민국 중·고등학생들이 주말마다 광화문으로 모이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른들이 만든 단체들이 나누어준 전단지 문구처럼 ‘내신등급제 반대’와 같은 성적문제가 아니다. 그건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른들의 문구와 구호다. 사실 많은 아이들은 대입정책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아이들은 함께할 수 있는 ‘친구’와 ‘꺼리’가 필요했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주고 있는가?


아이들은 말한다. 자신은 ‘고등학생’이 아니고, ‘청소년’이라고. ‘학생’이라면 학교란 틀에 묶여있는 존재같다고,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청소년’이라고 불러달라는 어느 학생의 말은 입시와 규제라는 틀 속에 묶여 있는 우리 아이들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