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40대 고길동, 창조자 김수정을 만나다
<커버스토리> 40대 고길동, 창조자 김수정을 만나다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4.01 11:08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취중 격정토로> 40대 고길동, 나를 말한다
두 아이도 모자라 정체불명 생물까지 먹여 살린다?
이 시대의 진정한 슈퍼맨, 고길동을 만나다
ⓒ 둘리나라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의 평범한 주택에 초능력을 사용하는 생물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둘리, 도우너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코끼리를 맨손으로 들어 올리거나, 정체불명의 악기를 사용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초능력자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일터의 동반자’이며 애초에 스케일이 남다른 본지는 여타의 매체들이 주목할 만한 초능력이나 시간 여행 능력 따위는 관심이 없다. 다만 본지의 관심은 집 주인 ‘고길동’의 가공할만한 능력에 쏠려 있다.

40대 만년 과장에 월급쟁이인 고길동은 자신의 두 자녀뿐 아니라 동생의 아이까지 떠맡아 키우며 정체불명의 생물 셋을 함께 먹여 살리고 있다. 특히 정체불명의 생물들은 초능력을 남용하며 고길동에게 적지 않은 재산피해를 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년 과장이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고길동의 집에는 화수분이 있다’, ‘고길동이 주식시장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등 여러 루머에 가능성을 열어둔 채 그를 추적·조사하던 중 고길동이 자신을 창조한 김수정 작가를 쌍문동 모처에서 만난다는 제보를 접수하고 현장을 찾아갔다. 그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 #1. 재회

고길동 참 행복한 인생이었죠…그런데

김수정 응? 그건 무슨 소리?

고길동 …몰라서…물어요?

김수정 뭔 소리야? 간만에 술 먹자고 부르더니 아직 불판에 삼겹살도 안 놨는데 벌써부터 봉창 두드리고 그래?

고길동 내 인생이 형님 만화에 들어가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고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김수정 이 인간이 시작부터 박태환 튜브 타는 소리하고 앉아있네. 야 둘리 연재 끝난 지가 언젠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이 다 아는 유명인으로 만들어줬잖아! 뭘 더 바래?

고길동 아 유명인은 맞죠. 대한민국 최고 밉상 캐릭터.

김수정 뭐 밉상이라도 일단 상위권에 있으니까. 영광인줄 알아 임마.

고길동 뭐라구요? 지금 그게 원인 제공자의 태도 맞아요?

김수정 아까부터 자꾸 내 탓이라고만 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건데? 이야기 좀 제대로 해봐!

ⓒ 둘리나라

>>>>>> #2. 소주 한 잔, 이야기 시작되다

고길동 한 때 내 소원이 애들 선남선녀로 잘 키워놓고 대궐 같은 집 지어놓고 떵떵거리며 말년을 보내는 거였다고요.

김수정 그것 참 창대한 소원이로고. 요즘 세상에 상위 1% 정도나 그렇게 살려나?

고길동 그런데 둘리에 출연하고 나서 내 소원은 뭔지 알죠?

김수정 ‘사람’들하고만 같이 사는거?

고길동 …그게 어떻게 ‘소원’이 될 수 있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

김수정 그것 참 소박한 소원일세…

고길동 내가 슈퍼맨이에요? 애들 둘 교육비로도 허리가 휘는데, 아니 희동이는 언제까지 내가 먹여 살려야 되는 건데요?

김수정 하긴. 철수랑 영희는 중학생인가?

고길동 철수는 곧 고등학교 간다구요! 무책임하게 그려만 놓고 신경 끄고 살아요?

김수정 미안 -_-; 바빠서...

고길동 아니 그런데 이미 멸종된 파충류에, 조류에, 에일리언까지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고요! 요즘 세상에 월급쟁이가 감당 가능한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김수정 …둘리, 또치, 도우너 말하는 거지? 걔들 이름 있잖아. 이름 불러. 어쨌거나 그래도 IMF 때 목 안날아가고 잘 버텼잖아. 그것만 봐도 넌 그 정도 식구 먹여 살릴 능력이 있어. 암 그렇고말고.

고길동 그거야 운이 좋았던 거고요…

김수정 아냐. 운도 실력이라고.

고길동 운이 실력이면 내가 왜 아직도 과장이겠어요? 어쨌거나 그 운이 슬슬 약발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애들이 얼마나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데요.

김수정 하긴 요즘 애들은 다들 유학에 연수에 자격증에…

고길동 어제는 중요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난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끝내고 나서 뿌듯하더라고요.

김수정 그래? 그럼 됐잖아. 뭐가 문제야?

고길동 문제는 내 차례 다음에 했던 후배 녀석이었죠. 뭐 울긋불긋한 바탕에 신기한 것이 공중에 휙휙 날아다니고, 소리도 뻥뻥 나고. 내가 발표할 때 졸던 사람들도 다들 빠릿빠릿하게 듣더라니 까요. 끝나고 나서 박수소리는 얼마나 큰지…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김수정 니가 기계에 약하구나…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고길동 박수 치는 척만 하고 소리 안 냈어요.

김수정 처절하구나 (-_-;)

고길동 사장은 매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조직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는데, 우리 또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면서 ‘나는 아니겠지?’ 하고 있다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잘려나가면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김수정 음…둘리랑 또치랑 도우너 데리고 서커스단 해보면 어때? 둘리랑 도우너는 초능력도 있고, 또치는 원래 서커스단 출신이잖아.

고길동 동춘서커스단은 왜 문 닫겠어요?

김수정 …그럼 마이콜 가수 데뷔시켜. 네가 매니저하면 되겠네.

고길동 요즘은 소녀시대 같은 걸그룹이 대세라던데요.

김수정 왜? ‘라면과 구공탄’ 음악성 있다고.

고길동 그럼 형이 해요. 그 좋은 매니저.

김수정 …아 난 만화 때문에 바빠서…

ⓒ 둘리나라

>>>>>> #3. 늘어가는 빈 병, 발갛게 상기된 길동씨

김수정 여전히 쌍문동 살지? 요즘 집은 어때? 집값 많이 올랐을 거 아냐?

고길동 올랐죠. 곧 재개발 한다잖아요.

김수정 그래. 내가 그래도 번듯한 집은 만들어줬잖아. 비관적인 상황만 만들어 준건 아니라고. 대한민국 사람 중 60%가 무주택자인 건 알지?

고길동 그렇죠. 집값도 올랐고. 그런데 그건 알아요?

김수정 뭘?

고길동 둘리랑 도우너랑 초능력 대결한다고 지붕 날려 버렸던 날. 수리비가 얼마 였는지…

김수정 흠흠…

고길동 그 수리비 모아놨으면 새로 지어질 아파트에 입주해서 살 텐데 말이죠. 아니 돈을 더 얹어줘야 입주가 가능하다는 게 말이 돼요? 도대체 어디로 이사 가라는 건지…아니 왜 하필 쌍문동이에요? 압구정동, 청담동,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하다못해 판교나 성남만 됐어도 그 집 판돈으로 다른 데로 이사 가기 쉽잖아요!

김수정 …너랑 둘리 그릴 때 내가 쌍문동 살았거든…그럼 이제 쌍문동에 못 살겠네? 애들도 전학시켜야 되는 거야?

고길동 그래야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요즘 마누라 바가지가 장난이 아니에요.

김수정 왜? 그게 바가지 긁을 거리가 되나?

고길동 이왕 이사하고 전학 갈 거면 월세를 사는 한이 있더라도 애들 강남 명문고에 보내야 된다는 거죠. 애들 사람 노릇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김수정 허어. 맹모삼천지교일세. 훌륭한 어머니야. 근데 그건 좀 오버 같다.

고길동 당연히 오버죠. 말이 돼요? 달린 식구가 몇인데. 강남에 큰 집 전세 얻으려면 쌍문동 집 내놔서는 어림없다고요. 게다가 지금도 애들 학원비에 허리 휘는데 거기 학원비는 2배~3배는 더 비쌀 거 아니에요. 매달 대출 이자는 빠지고 지금 회사를 잘리느냐 마느냐하고 있는데 속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김수정 야. 다 제수씨도 생각이 있어 그러는 거야. 자식 교육비 그거 다 투자인거야. 애들 인생 잘 돼야 너도 잘 되지.

고길동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강남은 온 천지에 CCTV가 깔려 있다는데, 둘리 놈들 매일같이 CCTV에 찍혀 올걸요. 나 위궤양 심해지는 꼴 보고 싶어요?

김수정 …그나저나 철수랑 영희는 공부는 잘 하냐? 그래도 애들은 착하잖아.

고길동 공부 잘하는 건 둘째 치고 애들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집에서 아빠 얼굴 보기 힘드니까 애들이 더 날 무시하는 것 같아요. 한 번은 철수 녀석이 성적을 엉망으로 받아왔기에 호되게 혼을 내주려고 일찍 들어갔더니 학원에 가 있더라고요. 그 놈 기다리다가 그냥 자버렸잖아요. 늦게 들어가면 또 그 놈이 먼저 자고 있고. 자는 녀석 깨워서 혼내긴 좀 그렇고…

김수정 그럼 주말에 하면 되잖아?

고길동 주말엔 제가 자느라 정신없어요…

김수정 그러고 보니 너도 좀 문제야. 주말엔 애들이랑 좀 놀고, 나들이도 좀 나가고 해야지. 주말마다 바가지 긁히면서도 만날 퍼져 자고, 라면 끓여놓고 바둑 TV 보면서 혼자 바둑 두고 있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널 무시하지.

고길동 주말엔 그냥 집에 늘어지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일주일 동안 전쟁터에서 자기들 때문에 혹사당했으면 주말만이라도 아무것도 안하고 내 시간을 좀 보내야 할 것 아니에요. 쉬는 건 또 편히 쉬는 줄 알아요? 둘리 놈들 사고 칠까봐 매일매일 노심초사에요. 나에게도 나의 시간을 좀 달란 말이야!!

김수정 그럼 둘리 애들 쫓아내버려. 희동이도 동생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고… 네가 그 애들까지 먹여 살릴 의무가 있진 않잖아. 어차피 둘리 연재도 끝났는데…

고길동 한참 쫓아내려고 했었잖아요. 지금은 그냥 포기하고 살아요. 그래도 시끌시끌하니까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잖아요.

김수정 사람은…아니지…(-_-;)

고길동 …희동이도 동생내외 유학 끝나기 전까진 키워줘야죠. 제가 동생 앞길 막으면 되겠어요? 희동이가 둘리라면 그저 좋다고 따르는데 둘리 쫓아내 버리면 희동이도 따라 나가버릴지도 몰라요. 또 둘리가 희동이 업고 안고 키우고 있으니 집사람 일도 많이 줄고 있는 거도 사실이고…뭐 미운정도 정이니까요.

김수정 그래. 네가 그래도 본성은 참 착해. 어쩌다 그리 망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길동 그래도 제가 애들 크는 거, 희동이 크는 거 보는 낙으로 하루하루 버티면서 사는데 다들 둘리 좋아 하고 많이 웃고 하니까 그 모습 보고 버티는 거죠. 다른 이유가 있나요.

김수정 그래. 사는 게 별거냐? 애들 크는 거 보는 보람으로 사는 거지. 기운 내. 앞으론 좋은 일만 있겠지.

고길동 그래야죠. 달린 식구가 몇인데요. 그래도 가끔씩 영희랑 철수가 ‘아빠 고맙습니다’하고 안아주면 참 행복하고 그래요.

김수정 햐 길동이 그래도 행복하게 사네. 둘리 애들도 언제까지 철없이 굴지는 않을 거야. 애들은 다 크는 법이잖니.

고길동 형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책임은 지셔야죠, 형님. 제 망가진 인생이요.

김수정 아~둘리 연재는 이미 끝났구요, 당신 캐릭터를 수정하기에 둘리는 너무 유명한 만화야. 팬들도 생각해야지. 불가능함!

고길동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당신 맘대로 이렇게 만들어 놨으면 책임져야 할 거 아니에요!

김수정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고길동 술이랑 삼겹살 쏘면 되잖아요.

김수정 알았어. (-_-;)

고길동 진짜죠? (전화 걸며) 야! 둘리야! 김수정 아저씨가 삼겹살 쏜단다. 갈비가 좋다고? 와서 주문해! 또치랑 도우너랑 다 데리고 와! 철수랑 영희는? 학원 갔어? 수업 빠지고 엄마 데리고 오라고 그래. 희동이도. 아, 마이콜 잊지 말고! 이모! 여기 삼겹살 50인 분 추가요! 오늘 이 가게 통째로 전세요!

김수정 (-_-;;;;;;)

   
사진제공 -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