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 크레인이 사라졌다
85호 크레인이 사라졌다
  • 이순민 기자
  • 승인 2012.06.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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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합의 직후 복수노조 출범…기업별 노조로 80% 넘어가
매달 휴업으로 200명도 안 남아…정리해고자 복직도 불투명”
[뉴스 後] 한진중공업 노사합의 반 년, 영도를 가다

85호 크레인이 사라졌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태권브이로 개조하고 싶다던 85호 크레인. 김주익 전 지회장이 2003년 ‘나의 무덤’이라며 올라가서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지키고 말았던 85호 크레인. ‘평생을 짝사랑했던 한진중공업 동지’들을 위해 기어오른 ‘한 마리의 파리 목숨이’ 309일을 버틴 85호 크레인.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부르짖은 사람들이 모였던 85호 크레인이 자취를 감췄다.

“영도조선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깨끗했던 120억짜리 크레인은 고철이 되어 5억에 팔리고”(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 말았다. “30년 넘은 크레인이 1년 동안 작동을 안 해서 안전진단을 실시했는데 위험하다는 결과가 나왔다”(회사 관계자)는 이유였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 2011년 5월,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간 고공농성하던 85호 크레인 ⓒ 참여와혁신 포토DB

영도조선소는 ‘죽음의 공장’

“너무 안 와서 오늘 점심때는 세어봤어예. 밥 먹으러 20명 나오더라꼬예.”

영도조선소 앞 식당 주인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때 공장에서는 4천 명 넘는 사람들이 일했다. 점심시간마다 수백 명이 공장 정문을 드나들었다. 작년부터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 주변 식당은 한 집 걸러 문을 닫았다. 식당 주인은 “오늘 하루 종일 열 그릇 팔았다”고 했다. “영도는 한진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불거지면서 영도의 상권은 큰 타격을 받았다.

“돌아가면서 휴직을 한다꼬 하대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한진이 잘 돌아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예.”

영도조선소가 ‘죽음의 공장’으로 변하고 있다. 크레인은 멈췄고, 현장에서 일하는 이는 2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회사가 강제 휴업을 실시하면서다. 휴업은 작년 12월 1일부터 매달 이뤄졌다. 적을 때는 50여 명, 많을 때는 100명이 넘는 규모다. 6개월 시한이다. 하지만 복귀는 불투명하다. 여전히 물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영도조선소의 가동률은 평소의 10%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특수선, 해경ㆍ해군 배를 만드는 방산 부문만 돌아간다.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 될 때는 일반 상선 부문이 80%, 방산이 20%를 차지했다. 차해도 지회장은 “방산 부문도 예전에 잘 나갈 때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라고 말했다.

휴업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회사에서는 이미 휴업자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낸 상태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상태에 대해 설명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6월 1일 복귀를 손꼽아 기다린 1차 대상자 170여 명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차해도 지회장은 말했다.

“휴업 가면 임금이 절반으로 줄어드니까 굉장히 힘들어해요. 노동조합에서 처음에 2개월씩 순환 휴업 하자고 말했지만 회사는 딱 잘라 거절했죠. 휴업도 파업 참여자들 성향을 분류해서 진행됐습니다. 1, 2기는 파업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을 먼저 보내고, 이탈자들을 나중에 보내는 식으로요. 현장에 있는 사람 중에 금속노조 조합원은 2명뿐입니다.”

생산직뿐만이 아니다. 5월에는 40%에 이르는 사무기술직 사원들도 휴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회사에선 늘 사무기술직이 부족하다고 했다. 설계 쪽만 하더라도 숙련에 3~5년이 걸리는 ‘고급인력’이기 때문이다. 휴업이 발표되자 600명에 이르는 사무기술직 중 100여 명이 사표를 쓰고 떠났다. 내부적으로도 회사에 더 이상 비전이 없다는 분위기가 퍼졌음을 보여준다.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일 수밖에 없다. 휴업 기간에는 월급이 반 토막 나지만 이중취업에 걸려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편의점ㆍ주유소 알바, 공사장 일용직, 대리운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혼에 이르는 조합원들도 하나 둘 나오고 있다.

▲ 2012년 5월, 6m 높이의 펜스, 굳게 닫힌 정문. 노사합의 반 년이 지난 한진중공업의 첫인상 ⓒ 이순민 기자 smlee@laborplus.co.kr

노조는 둘로, 교섭은 답보

“정리해고 투쟁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뜻을 저버리고 일부 소수만 인정할 수 있는 합의서가 투표도 없이 박수로 통과됐습니다. 임단협이 3년 동안이나 밀려 있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당시 조합원들의 원성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난 1월 11일 새로 출범한 한진중공업노동조합 김상욱 위원장의 말이다. 노사 합의 이후 한진중공업의 노동조합은 둘로 갈라졌다. 기존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에는 150명도 남지 않았다. 700여 명의 현장 조합원 중 80%가 기업별 노조로 넘어갔다. 새 노조 출범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차해도 지회장은 회사가 오래 전부터 복수노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기업별 노조에 가입하면 휴업을 안 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금속노조에 남아 있으면 휴업 가서도 못 돌아온다면서 회유, 협박을 했던 거죠. 생활안정자금 1000만원을 복수노조로 옮긴 사람만 주겠다는 소문도 퍼뜨렸어요. 우리가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하겠다고 하니까 모두에게 지급됐지만 복수노조 조합원들에게는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로 동의를 받고,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직접 와서 약정서를 쓰라는 식의 차별 대우도 있었습니다.”

아직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교섭 대표권을 갖고 있다. 1월부터 임단협 교섭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나도록 답보 상태다. 차해도 지회장은 7월 말에 교섭 대표권이 과반수 노조인 한진중공업노동조합으로 넘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사가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섭위원들이 딱 한 번 나오고는 실무교섭으로 전환해버렸어요. 부장들 몇 명 내보내서 주 3회 형식적인 교섭만 하고 있습니다. 나와서 그냥 앉아 있다가 퇴장하는 거예요. 징계위원 조정, 해고 사유 신설 등 8가지 개악안을 고민해보겠다고 했는데도 전혀 진척이 없습니다.”

회사 관계자는 “현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의하고 있고, 특별한 이슈는 없는 상태”라고 답했다. 김상욱 위원장도 “우리가 대자보나 공문을 통해서 임단협 교섭을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 공장을 정상화시키자고 했지만 지회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며 “7월에 교섭 대표권이 넘어오면 조합원 생계에 필요한 부분은 당당하게 요구하고, 수주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 2010년 2월, '대한민국 조선 1번지' 한진중공업의 모습 ⓒ 참여와혁신 포토DB

우울증, 대인기피증, 왕따 심각

“지금 파악된 우울증 환자만 8명입니다. 심각해서 요양을 간 사람들도 있어요.”

박성호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는 요즘 거의 매일 재판에 따라다닌다. 희망버스 관련 재판이 연일 이어지면서다. 박성호 대표는 94명에 이르는 정리해고자들을 이끌고 있다. 작년 11월, ‘1년 내 재고용’하기로 한 노사 합의에 따라 복직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그들의 삶도 휴업 중인 조합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취업은 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계약직으로 용접을 하고 있다.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학원에서 기술을 배워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지만 허드렛일 하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에는 회사가 ‘장난’을 쳤어요. 우리 복직 대기자들이 생계비를 받기로 되어 있는데 작업복을 입고 집회에 갔다고 안 준 거죠.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명단에 포함됐어요. 우리가 국회의원들과 노동청을 통해서 움직이려 하니까 바로 꼬리를 내리더라고.”

복직을 앞두고는 있지만 불안감이 크다. 휴업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복직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진중공업은 전례가 있다. 2003년 김주익 전 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건 노사합의 파기였고, 2007년 해외공장으로 인한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특별 합의도 지켜지지 않았다. 2010년 정리해고 추진을 중단하겠다는 합의도 마찬가지였다. 박성호 대표는 “다들 불안해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합의서로 약속된 거니까 일단은 복귀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기면 쌍용자동차 같은 투쟁이 될 수 있는 거 아입니까”라고 말했다. 박성호 대표는 법원을 향해 황급히 떠났다. 그가 머물러 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 분향소에는 ‘정리해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적힌 현수막과 ‘일하고 싶다. 제발, 제발 죽이지 마라’라고 쓰인 피켓이 걸려 있었다.

애초에 회사가 목표로 한 정리해고 인원은 400명이었다. 복직 대기자 94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희망퇴직으로 채웠다. 희망퇴직자들은 위로금과 퇴직금을 받고 회사를 떠났다. 목돈을 쥐었지만 가족들로부터, 동료들로부터 ‘왕따’ 신세가 된 사람이 많다.

▲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 ⓒ 이순민 기자 smlee@laborplus.co.kr
“퇴사하면 제일 먼저 집을 구해야 돼요. 그동안 사원아파트에 있었으니까. 집 구하고, 애들 학자금 내면 남는 게 없어요. 근데 노사 합의가 되니까 난리가 난 거죠. 가족들이 처음에는 ‘잘했다’고 했는데 생계비와 재취업 얘기가 나오니까 ‘야, 이 ××아 니는 뭐했어. 싸우지’하는 불만이 터지는 거예요. 밖에 나가서 일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_ 차해도 지회장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원아파트는 각각의 부류로 나뉘어 이미 한 울타리가 아니었다. 자녀들도 부모의 입장으로 갈려 따로 노는 상황이었다. 파업 이탈에 따라 부류가 나뉘고, 휴업으로 생계가 막막하고, 복직 때문에 마음 졸이고, 왕따가 된 사람들을 보듬어야 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심리치료 프로그램인 ‘와락’에서 힌트를 얻었다.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사랑방’을, 자녀들을 대상으로 ‘꿈틀이’ 프로그램을 열었다. 8주간 진행된 사랑방은 얼마 전 1기 과정이 끝났다.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조합원들에게 대화 상대를 만들어주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새로 시작된 2기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차해도 지회장은 “그동안 나도 모르게 분노가 쌓여 있었는데 서서히 풀어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아직 참여는 미미한 수준이다. 10~15명으로 계획한 인원을 채우기도 힘들다. 휴업 조합원, 복직 대기자들은 생계 때문에, 희망퇴직자들은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자녀 프로그램인 꿈틀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들이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한 달째 진행 중인 프로그램에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17~18명이 참여하고 있다.

노사 합의는 승리가 아니었다

“사실 조합원들 연령대가 높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무리하게 안 해도 됩니다. 자연감소도 있으니까. 여기가 사람이 많은 곳도 아니잖아요. 지금이라도 회사가 노동조합과 머리를 맞대는 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_ 박성호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

“일단 상선은 해야 됩니다. 영도조선소 주력 선종이던 컨테이너선은 이제 경쟁력이 떨어지겠지만 쇄빙선 같은 특수목적선을 수주하면 나아질 겁니다.” _ 김상욱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

“조선 경기가 녹록치 않지만 수주를 위해서 영업팀에서 모든 역량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고, 사업 다각화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_ 회사 관계자

“영도조선소가 남아있진 않을 겁니다. 방산 부문만 특화한다고 해도 이전할 겁니다. 그럼 여긴 재개발 되고 빌딩이 올라가겠지요. 다행히 유지가 된다면 좋겠지만….” _ 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

지난해 11월, 노사 합의를 마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입고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41주기에 왔다. 언론에서는 연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승리’를 말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차해도 지회장은 담담한 얼굴로 승리가 아니라고 했다. 새로운 투쟁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2003년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가깝게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현실이 눈에 밟혀서였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새로운 투쟁을 준비 중이다. 조합원들을 떠나보내고, 교섭권도 잃기 직전이지만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로도 삼으려 한다. 지난 4월 말에는 액땜을 했다. 광화문에서 대정부 요구안 전달식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차는 폐차 지경이었지만 다들 큰 부상은 없었다. “열사들이 지켜준 거 같다”며 일어서는 차해도 지회장은 여전히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영도조선소를 다시 찾았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마침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식당에서 나온 이와 마주쳤다.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그는 “별로 할 말 없는데요”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왕복 8차선 도로를 건너가는 그의 뒷모습 위로 불을 환하게 밝힌 한진중공업 건물이 보였다. 건물 양옆으로는 회사가 노사합의 다음날부터 30억 원을 들여서 만들었다는 6m 높이의 담벼락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크레인들은 쓸쓸했다. 주위는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