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에 오른 비정규직 굴다리에 매달린 정규직
송전탑에 오른 비정규직 굴다리에 매달린 정규직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2.12.05 14:47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성으로 한 해 마무리하는 노동자들
요구는 하나 “일하고 싶다. 함께 살자!”
[송년 특집 3_ 르포] 끝나지 않은 싸움

ⓒ 박석모 기자 smpark@laborplus.co.kr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해라며 연초부터 떠들썩했던 2012년도 어느덧 저물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벌써 몇 년째 똑같은 요구를 내걸고 싸우는 노동자들도 있고, 올해 새로이 싸움을 시작한 노동자들도 있다. 그러나 기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의 요구는 다르지 않다. “일하고 싶다. 함께 살자”는 게 이들이 요구하는 전부다. 연말을 앞둔 지금,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는 현장을 둘러본다.

대법원 판결 받고도 또다시 송전탑으로

올 들어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는 11월 14일 아침 울산행 KTX에 몸을 싣는다. 바로 어제는 전태일 열사 42주기였다. 근로조건을 개선하라며 열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지 벌써 42년이나 지났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이 KTX에 실은 몸을 축 늘어지게 한다.

지난 10월 17일 밤 송전탑에 올라 29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다.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일했지만 현대자동차의 직원은 아닌 노동자들, 바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고 오늘도 국내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일하러 간다.

그들에게 이 시대의 전태일이라는 호칭을 붙인들 그들의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는가. 너도나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시대에 그나마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게 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하청업체가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 될까. 2년을 주기로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그들 역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직영’과 ‘업체’로 나뉘어 말 한 마디 섞기도 껄끄러운 현실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니다. 지금 송전탑에 오른 2명의 노동자 중 한 명은 ‘법적’으로는 업체가 아닌 직영 노동자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았으니 분명 그는 현대자동차의 정규직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현재의 법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대자동차의 사원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일했던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송전탑에 올랐다.

ⓒ 박석모 기자 smpark@laborplus.co.kr

옷 속까지 파고드는 한기

송전탑이 있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명촌쪽문 주차장에는 몇 동의 농성천막이 들어서 있다. 어디 정규직화 요구가 송전탑에 오른 최병승과 천의봉에게만 국한된 일이랴. 현대자동차에서 사내하청으로 일하는 모든 이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농성에 함께하든 그러지 못하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모두 최병승과 천의봉을 응원하고 있다.

지난 2010년 파업으로 해고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송전탑 아래 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근무를 마친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삼삼오오 천막농성장을 찾는다. 송전탑에는 ‘함께 살자’는 글귀와 함께 절규하는 노동자 그림이 새겨진 펼침막이 걸려 있다. 세찬 바람에 나부끼는 펼침막 속 노동자의 절규가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한 쪽 천막에서는 송전탑 위, 아래 농성자들이 먹을 점심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준비된 점심은 송전탑 농성장과 천막농성장을 연결하는 밧줄에 묶여 송전탑 위로 올라간다. 지금 이 순간, 이 밧줄은 송전탑 위 농성자들의 생명을 이어주는 생명줄이다.

천막농성장을 지키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송전탑에 오르려는 기자를 한사코 말린다. 바람이 너무 거세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농성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내려온 길, 이대로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걱정하는 이들을 뒤로 하고 기어이 송전탑을 오른다.

지상 30m. 생각보다 높고 아찔하다. 혹시 발을 잘못 디딜까, 혹시 잡은 손을 놓치지는 않을까, 손발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올라가는 중간쯤, 최병승과 천의봉을 위해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올려 보낸 얇은 합판이 기둥과 난간에 걸쳐져 있다. 조금 더 올라 최병승과 천의봉이 농성하고 있는 높이에 다다랐다. 철판을 이어 붙인 바닥과 지붕을 대신하는 천막이 바로 아래 있던 합판보다는 튼튼해 보인다. 하지만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한낮이건만 몰아치는 바람에 옷 속으로 한기가 파고든다. 잠깐 올랐다가 내려가면 땅 위의 따스함이 기다리고 있는 기자와는 달리, 두 농성자는 벌써 29일째 이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바람에 비까지 섞여 퍼붓는 날이면 한기는 더욱 위세를 떨칠 터. 두 농성자의 거무스름한 얼굴은 바람에 부어 있다.
애써 송전탑에 올랐지만 두 농성자는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송전탑 농성이 1달 가까이 지속되면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는 상황이라 한마디 말도 조심스럽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올라간 지 10분도 채 안 돼 건강 챙기라는 의례적인 인사만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박현제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장은 “2004년에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 2010년과 2012년에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회사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시간만 끌고 있고 신규채용 카드도 현장에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며 두 농성자가 송전탑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여론도, 대선후보도, 심지어 정부도 정규직화 하라는데 현대차만 버티고 있다”는 박 지회장의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 박석모 기자 smpark@laborplus.co.kr

창조컨설팅은 해체됐지만

울산을 뒤로 하고 아산으로 향하는 기자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겨울의 길목으로 들어서는 지금 송전탑 위의 두 농성자는 혹한을 견뎌내야 한다. 이 농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기약도 없다. 어찌어찌해서 텐트를 치고 비바람은 피할 수 있다지만, 그 텐트가 살을 에는 추위까지 막아주지는 못할 터.
영하의 날씨보다 그들을 더 춥게 하는 것은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오로지 함께 농성하고 있는 동료의 체온에 의지해 이 추위를 버텨야 한다. 하지만 두 농성자는 수많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을 보내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기에, 언젠가는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산에도 땅을 버린 노동자가 있다. 지난 10월 20일, 홍종인 유성기업아산지회장은 회사 앞 굴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농성을 시작했다. 지난해 심야노동 철폐 요구를 발단으로 시작된 유성기업사태가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 노무관리를 자문했던 창조컨설팅은 지난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노조파괴라는 불법적인 컨설팅을 한 사실이 드러나 노무법인 설립인가를 취소당했다. 창조컨설팅의 자문에 따라 친 회사 노조인 유성기업노조가 설립됐고, 기존의 노조를 파괴하려는 시나리오가 실제로 작동됐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그러나 창조컨설팅의 설립인가가 취소됐어도 유성기업에서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회사는 기업별노조의 존재를 핑계 삼아 유성기업지회와는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유성기업지회에 대한 기업별노조의 적대적 태도 역시 그대로다. 해고자들은 여전히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변한 게 있긴 하다. 지난 청문회와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기업별노조로 넘어갔던 조합원들이 다시 유성기업지회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업별노조는 이제 대놓고 유성기업지회를 비난하고 있다. 1년 반을 끌어온 유성기업사태를 끝내기 위해 홍종인은 최후의 수단으로 굴다리 농성을 택했다.

ⓒ 박석모 기자 smpark@laborplus.co.kr

“어용노조 해체하라”

굴다리 농성장으로 가기 위해 성환역에 내려 택시를 탔더니 나이 지긋한 기사가 “아 데모하는 데요?” 한다. 유성기업 문제는 지역사회에서 주요 이슈가 된 지 오래다. 택시기사는 “오늘 또 데모해요? 아까 한 무리가 그쪽으로 가던데” 하며 묻더니, 뭐라고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에휴, 겨울 오기 전에 빨리 끝나야 할 텐데” 하며 탄식이다.

택시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후 5시가 다 돼서 굴다리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간단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노동자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소연 후보가 굴다리 농성을 지원하기 위해 왔단다. 유력 대선후보가 아니어선지 취재기자도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집회가 열리는 동안, 바로 위 굴다리에 매달린 농성천막에서 홍종인이 고개를 내밀고 ‘투쟁’을 외친다. 굴다리를 사이에 두고 홍종인의 농성천막 맞은편에는 오전에 송전탑에서 봤던 ‘함께 살자’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굴다리 농성천막 아래로 10여 동의 천막이 줄지어 서있다. 굴다리 바로 아래 설치된 천막은 유성기업지회 간부들이 굴다리 농성천막을 지키고 홍종인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그 한 동을 제외한 나머지 천막들은 유성기업지회 조합원들이 설치한 것이란다. 홍종인이 농성에 들어가자 누가 부른 것도 아닌데 유성기업지회 조합원들이 각 반별로 조를 짜서 간부들의 천막 뒤로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천막만 친 게 아니라 퇴근 후에는 돌아가면서 농성도 벌인다. 일요일에는 조합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나와 하루 종일 홍종인과 함께한다.
조합원들이 모이니 매일 저녁 굴다리 아래서는 촛불문화제가 열린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연대단위가 함께하는 제법 규모 있는 집회도 열린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이해남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함께하는 집회가 예정돼 있었다.

약식집회가 끝나자 김소연 후보와 함께 온 이들과 저녁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한편에선 커다란 천을 펴고 ‘홍종인 힘내라’는 글귀를 써 내려간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그다지 밝지도 않은 조명 아래서 길바닥에 흩어져 저녁을 먹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아프게 박힌다. 지금 아스팔트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 시간이면 가족과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거나 동료와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어야 할 이들이 아닌가?

노동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굴다리 옆 둔덕에 올랐더니 홍종인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올해 안에 끝내려고 올라왔다”는 홍종인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지만, “민주노조 파괴를 위해 회사와 창조컨설팅에 의해 만들어진 ‘어용노조’는 스스로 해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결기가 느껴진다.

다행히 아직까지 농성천막을 철거하려는 시도는 없었지만, 홍종인은 농성을 시작하면서부터 목에 밧줄을 걸고 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강제철거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올해 안에 모두가 공장으로 복귀해 아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길, 이미 짙게 어둠이 내린 아스팔트 위로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앰프를 타고 흐른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은 저마다 대한민국의 희망찬 내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후보들의 이야기 속에 저물어가는 한 해를 농성으로 보내고 있는 노동자들의 “일하고 싶다. 함께 살자”는 바람이 헤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외치는 후보들의 목소리는 유력후보들의 목소리에 밀려 잘 들리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노조를 일컬어 ‘그들만의 리그’라고 이야기했다지만, 대선후보들이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의 내일이 ‘그들만의 공화국’으로 그치지 않길, 노동자들이 걱정하지 않고 일할 수 있길,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경청되고 존중되는 사회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