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기업 투쟁 10년] 노사 합의에도 마음 놓지 못하는 유성지회
[유성기업 투쟁 10년] 노사 합의에도 마음 놓지 못하는 유성지회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01.06 10:05
  • 수정 2021.02.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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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파괴 대명사 ‘유성기업’, 2020년 마지막 날 노사 합의 성공
​​​​​​​이제야 10년 전으로 돌아간 유성기업 노사 … 현장의 기쁨은 아직
22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진행하며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2019년 8월 22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진행하며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유성기업’ 앞뒤로는 ‘노조파괴의 대명사’가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유성기업이 무슨 회사인지 몰라도 말이다. 지난 10년의 결과였다. 2011년 5월 18일 회사의 공격적인 직장폐쇄로부터 시작된 유성기업 노사 갈등은 2020년 12월 31일, 햇수로 10년 만에 끝이 났다.

잊지 못할 2011년 직장폐쇄

유성기업은 피스톤링 등 자동자 엔진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다. 현대차의 협력업체이기도 하다. 전국에 모두 5개 공장을 가지고 있다. 그중 충남 아산‧충북 영동공장에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이하 지회)가 구성돼 있다.

유성기업 노사 갈등의 시작은 2009년 임단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임단협에서 유성기업 노사는 2011년 1월부터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장시간 노동과 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2009년 한국 연평균 노동시간이 2,174시간인데 비해 유성기업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400~2,600시간에 달했다.

2012.07.18  유성기업노조 농성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2012년 7월 18일 유성기업노조 농성장 ⓒ 참여와혁신 자료사진

그러나 당장 다음해에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성기업 노사는 1년의 준비기간을 뒀다. 그러나 막상 준비 시기가 되자 회사는 차일피일 제도 도입을 미뤘다. 2009년 임단협을 성사시킨 김성민 유성기업영동지회 전 지회장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제가) 2005년, 2007년 지회장을 두 번 연달아 하면서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을 2009년에 합의해요. 그런데 회사가 차일피일 미뤘던 거죠. 회사의 이유는 현대차보다 먼저 주간연속2교대제를 시행하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거기다 우리 안이 현대차보다 좋은 안이었어요. 하청업체가 완성차업체보다 더 좋은 걸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실 2009년부터 노조파괴하려는 게 있긴 했어요. 유시영 유성기업 회장도 노조파괴 카드를 아마 그때부터 만지지 않았나 싶어요.”

민주노조에게 2003년 1월은 악몽 같은 날이다. 심종두와 김주목이 노조파괴의 대명사 창조컨설팅을 설립한 것이다. 창조컨설팅 설립 이후 발레오, 영남대의료원, 보쉬전장, KEC 등에서 노조파괴 공작이 펼쳐졌다. 유성기업도 창조컨설팅의 그림자가 미친 곳 중 하나였다.

2011년 5월 18일 지회는 2009년 합의사항 미이행을 이유로 주간조 2시간 부분파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회사는 18일 오후 5시를 기점으로 직장폐쇄를 감행했다. 지회는 즉각 항의했다. 저녁 8시 회사 정문에 직장폐쇄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이 모였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저녁 10시에는 회사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용역회사 직원들이 조합원들을 승용차로 들이받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 18일 밤 11시께 충남 아산에 위치한 유성기업에서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조합원이 사측의 직장폐쇄에 항의하던 중 농성장을 덮친 경비용역 직원의 승용차에 치여 바닥에 쓰러져 있다. ⓒ 금속노조 충남지부
2011년 5월 18일 밤 11시경 유성기업 아산공장에서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조합원이 사측의 직장폐쇄에 항의하던 중 농성장을 덮친 경비용역 직원의 승용차에 치여 바닥에 쓰러져 있다. ⓒ 금속노조 충남지부

지회는 공장 점거파업을 이어갔다. 회사는 ‘불법 파업’이라며 공권력 투입을 요청했다. 정부는 2011년 5월 24일 경찰 31개 중대 3,000명을 동원해 파업 중인 조합원을 연행했다. 지회는 6월 14일 전 조합원 일괄 복귀선언을 하고 직장폐쇄 철회, 성실교섭 촉구를 회사에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선별적 복귀’를 고수했다. 파업에 참가한 정도에 따라 조합원을 관리하겠다는 의도였다.

노사 갈등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법원은 2011년 8월 16일 ‘유성기업 직장폐쇄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8월 22일부터 31일까지 수차례 나누어 전원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이를 지회가 받아들이면서 문제는 해소된 듯 보였다. 그러나 ‘노조파괴 시나리오’는 이제야 1단계가 끝났을 뿐이었다.

치열했던 2012년, 2013년
지쳐버린 유성기업지회

“제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건 2011년도 용역이 회사 정문에서 소화기 뿌리고서 집어던지는 장면하고 그리고 2016년 한광호 열사 돌아가시고 서울분향소. 그 이후에 바로 광화문 광장 텐트촌에서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2011년 8월부터 4년 동안 유성기업아산지회 지회장을 맡은 홍종인 전 지회장은 2011년과 2016년의 두 장면을 떠올렸다. 2016년 3월 17일은 모든 지회 조합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돼 있는 날이다. 이날 아침 유성기업 영동공장에서 일하던 한광호 조합원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 이유는 회사의 지속적인 차별과 괴롭힘에 있었다. 2011년 8월 복귀 이후 회사는 2개월 만에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계를 내렸다. 3차례에 걸친 징계에서 총 27명의 해고자가 발생했다. 또한 회사는 조합원 89명을 대상으로 17억 5,000만 원대의 손해배상소송도 제기했다.

더군다나 직장폐쇄 기간이었던 2011년 7월 18일에는 회사 주도로 설립된 기업별 노조가 설립신고를 했다. 5년 후인 2016년 4월 14일 노조설립 무효를 확인 받은 ‘어용노조’였다. 회사는 징계와 민사소송으로 지회와 조합원을 압박하는 동시에 어용노조를 통해 회유작업도 병행했다. 회사의 공작으로 2012년 지회는 조합원 수가 감소해 교섭대표노조 지위를 상실했다. 지회의 극렬한 투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2012년도 서울사무소 밑에 움막처럼 천막치고 한 6개월 정도 투쟁했거든요? 홍종인이 굴다리 올라갈 때. 그 때 서울사무소 정리하고 내려왔거든요. 농성장에 6~7개월 있었어요. 우리가 다시 투쟁할 수 있는 계기점이 그때 만들어졌고. 그러면서 국회 청문회가 열렸거든요. 유성기업의 노조파괴는 이랬다. 청문회가 열리고 증거자료 다 있었는데도 그냥 가는 바람에 그것 때문에 길어진 거죠.”

엄기한 유성기업아산지회 부지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2012년 6월 28일 지회는 유성기업 서울사무소 앞에서 6개월간 농성을 진행했다. 이 후 2012년 9~10월 은수미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은 국회에서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공작을 폭로했다.

기세를 몰아 금속노조는 10월 23일 고용노동부에 유성기업을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했다. 이틀 전인 2012년 10월 21일 홍종인 전 지회장은 유성기업 아산공장 앞 굴다리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하기도 했다. 국회가 유성기업의 노조파괴 실상을 들춰냈고, 지회가 유성기업 사태를 전국적 이슈로 만든 것이다.

2020년 11월 15일 유성기업 아산 공장 앞 굴다리 농성장 앞. ⓒ 참여와혁신 자료사진

남은 건 고용노동부와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였다. 하지만 묵묵부답인 채로 2013년이 찾아왔다. 조급해진 지회는 2013년 국정감사에서 다시 이슈화하기 위해 이번에는 고속도로 광고탑에 올라갔다.

이정훈 유성기업영동지회 지회장은 2013년 10월 13일 충북 옥천에 위치한 고속도로 광고용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진행했다. 유성기업 희망버스도 운영됐다. 하지만 2013년 말 검찰은 지회의 부당노동행위 고발을 무혐의로 종결한다. 이에 금속노조는 2014년 6월 11일 법원에 검찰의 불기소 처분 정당성 여부를 묻는 재정신청을 진행했다. 2014년 4월 28일 이정훈 지회장이 259일 만에 고공농성을 해제하면서 지회는 법정으로 싸움터를 옮겼다.

2016년 한광호 열사의 죽음

“그러고 가장 뚜렷한 거는 2016년 한광호 열사 투쟁. 우리가 한광호 열사 투쟁을 거세게 했잖아요? 유시영 회장 증거 다 있었지만 검찰이 기소를 안했잖아요? 압수수색해서 증거를 다 숨겨놨어요. 캐비닛에다 다 보관하고 있다가 민사재판과정에서 드러났죠. 한광호 열사 투쟁하면서 기소가 된 거라고 봐요. 그러면서 유시영 회장 구속도 되고.”(엄기한 부지회장)

지회는 해고 무효 소송, (기업별)노동조합설립무효확인소송, 직장폐쇄 불법성 여부 등 지루한 법적 공방에서 매번 승리했다. 하지만 기나긴 법정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회사에서는 지회에 대한 차별을 계속 유지했다. 조합원들이 차별에 항의하면 “노동부에 말하라”는 식이었다. 소송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 조합원들이 상여를 든 채 국회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자료사진

한광호 열사가 유명을 달리하기 이전, 회사로부터 다섯 차례의 고소와 세 차례의 징계를 받았다. 한광호 열사뿐만 아니라 지회 조합원 대다수가 회사의 무분별한 고소‧징계 남발에 고통 받고 있었다. 2014년 충남노동인권센터가 실시한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 유성기업영동지회 조합원 187명 중 41%인 77명이 주요 우울장애 고위험군에 속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노조 파괴라는 싸움을 쭉쭉 해오고. 이슈화해내기 위해서 홍종인 동지나 이정훈 동지가 고공농성까지 하면서도 이슈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했었는데 어려웠던 건 사실이거든요. 한광호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면서.... 조합원들이 더 이상 이 싸움을 끌어선 안 된다는 이런 마음으로 투쟁을 했죠. 그때 당시 파업을 굉장히 많이 했거든요. 투쟁을 격렬하게 이어갈 수 있었던 계기였고….”

김성민 전 지회장은 한광호 열사 투쟁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지회가 벌인 한광호 열사 투쟁은 결국 유시영 회장 구속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2017년 2월 17일 법원은 유시영 유성기업 회장에게 검찰의 구형보다 더 높은 징역 1년 6개월과 벌금 200만 원을 선고했다. 한광호 열사의 장례식도 그의 죽음 353일 만에 거행될 수 있었다.

이후 2017년 12월 23일 대법원에서는 유시영 회장의 형벌을 징역 1년 2개월, 벌금 100만 원로 확정했다. 다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회장을 감방 보내면” 교섭도 착착 진행될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유시영 회장은 2018년 4월 만기출소 한다. 이후 지회는 회사와 산발적으로 교섭을 진행하면서도 유성기업에 대한 소송을 이어나갔다. 또다시 소송전이었다. 지회는 여기서도 승리한다. 2020년 5월 14일 대법원은 업무상 배임‧횡령 혐의로 유시영 회장에게 징역 1년 4개월, 벌금 500만 원을 내렸다. 유시영 회장의 두번째 감옥행이었다.

아직 합의의 기쁨보다는

“뭐. 익히 유성투쟁은 전국이 다 알고 있잖아요? 2011년 5월 18일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해온 거고요. 유시영 회장 2번 감빵 보내고. 온갖 형사사건, 민사사건 500여 개 됐죠. 그렇게 10년을 해왔는데 마무리하니까 막상 이때까지 어떻게 왔던가 하는 거에. 그런 기분과.. 뭐. 만감이 교차하죠.”

“찬반투표하는 총회날 보니까 조합원 얼굴이 밝지가 않더라고요. 찬성률이 87%가 나왔는데... 87%면 높게 나왔잖아요? 높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의 얼굴이 어둡더라고. 뭐. 나 역시도 크게 기분을 못 느껴요. 마음 한 곳에... 뭐 이래 비어있는 느낌. 뭐. 허탈감. 이게 그동안의 단협을 회복시키는 거잖아요? 별 다른 쟁취가 아니라. 있던 것을 되돌려 받은 거잖아요? 이때까지 10년 동안 싸워서 회복한 정도 이런 기분이잖아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밝지가 않더라고요. 뭐 내용은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건 다 쟁취했으니까요.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고.”

이정훈 지회장은 합의 이후 현장의 정서를 이렇게 말했다. 현장에서는 합의했다는 기쁨보다 허탈감이 컸다. 엄기한 부지회장은 조합원들의 허탈감 이면에는 ‘회사에 대한 불신’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년간 유성기업지회 조합원이 겪은 경험이 회사의 ‘합의문 사인’조차도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하도 사측에서 번복을 많이 했잖아요? 이게 우리가 보고대회를 3번 했어요. 합의했으니까 보고대회를 해야 하잖아요? 합의했는데 그 다음에 보고대회하고 마무리하려고 실무회의하면 풀어버리고. 그러고 또 몇 달 가고. 뭐 합의를 여러 차례 했는데 번복하고. 이번에는 사인까지 했잖아요? 좀 다르긴 한데 몇 십 년 동안 있었던 게 있으니까....”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 조합원 50여 명이 서울에 도착해 추모행진에 함께했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자료사진

홍종진 전 지회장은 1월 5일 현장에 복귀했다. 2016년 지회장 생활을 마친 뒤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에서 일하다가 이제 온전히 현장에 복귀하는 것이다. 홍종인 전 지회장도 노사합의라는 ‘새로운 상황’이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다.

“해고 두 번 되고. 대법 판결로 복직한 이후에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에 가 있다가. 이제 올곧이 현장에서 일을 하러 들어가는 거거든요. 상당히 어색해요. 사실은. 현장에서 일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본부 다니면서도 일하면서 조퇴하고. 파업하면서 나가서 본부일 봤던 건데. 낯선 환경과 접해야 한다는 이런 느낌이 있어요. 과연 해결된 건가? 이게 10년 만에 교섭 타결된 건가 하는 게. 아마 현장에서 조합원 부딪치면서 적응해 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유성기업지회의 미래

이번 합의를 통해 2011년 문제가 됐었던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은 순차적으로 실시될 예정이다. 또한 유성기업 노사는 2011~2020년 임단협 미체결로 인해 지급받지 못한 임금인상분 및 위로금 지급에 합의했다. 손배가압류를 포함한 민‧형사상 고소고발도 취하하기로 했다. 10년을 돌아서 다시 원점에 선 셈이다. 지회에게도 이제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생겼다.

ⓒ 참여와 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2019년 8월 22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진행하며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이정훈 지회장은 지회의 미래을 위해서 ‘어용노조’ 문제가 아직 남아있다고 전했다. 유성기업 기업별 노조는 2016년 4월 14일 고용노동부에 의해 노조설립무효가 됐지만 5일 후인 4월 19일 동일한 집행부로 다시 설립신고를 냈다. 이를 두고 당시 논란이 일었으나 고용노동부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어용노조를 없애야만 유성자본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게 제일 숙제죠. 그 조합원을 금속으로 땡기려면. 과연 쉽게 땡겨질 것인가. 어용과 금속의 대립각. 아무래도 마음을 열어야 할 텐데. 금속노조는 어용조합원을 가슴으로 허락이 안 되잖아요? 집행부는 조직을 보고 어용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기조를 세울 수 있는데…. 현장의 조합원들은 어용 얼굴만 봐도 보기 싫은 거지. 어떻게 설득을 해서 데려와서. 어떻게 한 집에서 어울릴 수 있게 해줄까. 이게 큰 숙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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